■장흥한담(2)-곡신의 바다 여다지
■장흥한담(2)-곡신의 바다 여다지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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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용수/시인. 수필가

사랑하는 그대여 보았습니까./안개 낀 봄밤에 별들이 여닫이 바다하고 혼례 치르는 것, 보았습니까./ 한여름 보름달이 마녀로 둔갑한 바다와 밤새도록 사랑하고 아침에 서쪽으로 가며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것, 보았습니까./ 늦가을 어느 저녁에 여닫이 바다가 지는 해를 보내기 싫어 소주 한 병에 취하여 피처럼 불타버리던 것, 보았습니까./ 달도 별도 없는 겨울밤 눈보라 속에서 여닫이 바다가 혼자 외로이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것, 그대는 알아채셨습니까. /여닫이 바다의 몸짓이 사실은 제 마음을 늘 그렇게 표현해주고 있다는 것.

-한승원 시 ‘여닫이 바다의 혼례’ 전문

며칠 전 싸락눈에 매화는 만삭의 몸으로 봄을 홀기더니 어느새 꽃망울을 부풀리며 거친 밀물을 마중하고 있다. 봄이 짙어질수록 바다는 옥빛으로 변할 때 매운바람이 삶의 비린내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이곳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앞 여닫이이다.

시끌벅적한 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남쪽 바다는 아기자기한 삶의 한쪽을 고스란히 새겨두었다. 뭍으로 올라온 목선 한 척은 바다를 가르며 오르내렸던 치열함을 삭히며 육지로 밀려나 긴 모래사장 한쪽에서 화려했던 한때를 추억하고 있고, 검은 갯벌을 삼키고 올라오는 옥빛 바닷물은 누구나가 똑같은 시간에 맞춰 움직이도록 정해놓았다. 누구에게도 남몰래 특혜를 주는 일은 없다. 갯벌을 휘젓고 나올 만큼만 허락하기에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오래전부터 여닫이를 가장 깨끗한 갯벌이 숨 쉬는 아름다운 바다로 선정했고, 해산 토굴 시인은 여닫이를 일컬어 연꽃 바다이며 만물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곡신(谷神)이라고 말하며, ‘곡신은 현빈(玄牝)이고 현빈의 문은 천지근(天地根)이다’라며 여근(女根)을 상징하는 곡신과 ‘그윽한 암컷’인 현빈의 문은 천지근, 즉 우주적인 뿌리이기에 곡신을 바다라고 한다.

해송을 살피며 바람 소리를 들어본다. 쉬이∼쉬이 해송을 흔드는 바람은 퍽퍽한 일상을 버틸 힘을 내게 주고, 곤줄박이의 청량한 소리는 세상의 더러움에 함몰된 나의 내면을 더듬게 한다. 일상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은 내버려 두고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는 요령을 찾고 있는 어리석음에 도래질을 치고 있을 때, 바다를 뜨겁게 풀무질하며 일몰을 끌어안았던 여닫이의 수문이 열리기라도 했을까. 바다로 쏟아져 들어오는 민물의 청정함과 더러움과 가련함과 음탕함까지도 옥색 빛으로 안아주고 있다.

갯벌을 빠져나오는 순박한 사람들의 절제된 삶이 꿈틀거리는 여닫이를 긴 침묵으로 맞서고 있다. 세상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어 무심히 살아가고 있듯이 여닫이는 오늘도 누군가 찾아와 부족한 만큼만 가져가기를 바라며 출렁이고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넘친 소유는 언제쯤 비워낼 수 있을까. 몸에 배어있는 탐착(貪着)스러움을 언제쯤 도려낼 수 있을까. 항상 비우고 베풀기를 꿈꾸지만,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집착의 소유를 언제쯤이면 털어낼 수 있을까. 흰 구름 아래로 펼쳐진 백사장에서 초췌해진 나를 보듬고 위로할 뿐이다.

해송의 잔가지에 웅크리고 있는 응달 바람이 흔들리면 푸르고 향기로운 봄날이 상쾌하듯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여닫이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삶이 비움이고 털어내고 있기에 서로를 비교하고 저울질할 삶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기에 여닫이의 허름한 정자는 오가는 길손에게 싱그러운 멋을 내어주어 고단하게 지친 몸 잠시라도 쉬어가도록 붙잡는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길 건너 청보리 밭을 스치고 넘어오는 봄볕에서 온전히 들려오는 안온함에 날 선 마음이 조금씩 무디어지자 조용히 옥빛을 채우며 해산의 날을 기다리며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느티나무 가지의 눈록(嫩綠)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길가에 순결한 동백은 서기가 흐르는 날을 해산의 날로 잡았는지 바다를 건너온 청정한 바람에 옹골진 기운을 채우고, 겨울을 이겨낸 영산홍은 봄물을 끌어당기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산책길로 불어오는 초록 바람이 나뭇가지에 엉기어 봄을 알린다. 봄볕이 마른버짐 피듯이 내려앉은 여닫이 몽근 모래밭, 바닷물에 솟아있는 장재도, 몽돌처럼 도드라진 슬픈 소록도, 그리고 가물거리는 득량도가 봄볕에 헐떡인다. 여닫이의 봄은 자지러지는 숨소리로 갯내음을 흘리고, 봄꽃은 만삭의 몸으로 해맑게 맞이해주지만, 여닫이를 어찌 한 번의 계절로 다 표현하고 느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수채화처럼 펼쳐진 연꽃 바다 백사장을 오감을 열어 천천히 걷고 싶고, 오래도록 머물고 싶고, 해맑은 사람과 잠언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방랑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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