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송기숙, ‘장흥동학’에 뿌리 둔 ‘장흥문학의 대표적 표상’이었다
사설 송기숙, ‘장흥동학’에 뿌리 둔 ‘장흥문학의 대표적 표상’이었다
  • 김선욱
  • 승인 2021.12.0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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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에 즈음, 고인의 생애를 회억하며 명복을 빈다

①‘인간천연기념물(고은 시인)’, ‘순 조선 얼굴’, ‘산적 같은 인상파’ …

②‘민중문학의 대가’ ‘저항문학의 기수’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 ‘5.18 광주 정신의 표상’…

이상은 민족·민중문학의 중추로,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펜으로, 몸으로 헤쳐 오며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으로 일컬어져 온 소설가 송기숙을 지칭하는 애칭이요 별칭들이다.

그 송기숙 선생이 지난 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상기 별칭 ①은, 송기숙의 강직한 인간적 품성과 미덕을 두고 동료 교수나 고은 등 가까운 문인들이 부른 애칭들이고 ②는 문단이나 언론 등에서 민중문학 등 그의 문학적 성취나 5.18운동 등 헌신적인 사회운동에서 보여 준 선생의 ‘고귀한 지성인으로서 면모’를 지칭하는 말이다.

4,5세 때 완도에서 장흥 용산 포곡마을로 이거해 와 계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간 마을 뒷산인 억불산 자락인 자포지재를 넘나들며 장흥중고를 걸어서 통학했던 송기숙은 그 자포지재가 장흥동학군들이 넘나들었고 석대들 최후의 격전에서 퇴패한 후 자포지재를 거쳐 부용산으로 도피했던 ‘동학군 고개’였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하여 그 자포지재를 통해 많은 어른들로부터 동학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다.

자포지재의 묻힌 그 서사와 서정이 이른바 송기숙의 동학문학 《녹두장군》의 단초요 시작이었으며 선생의 민중문학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민주화운동과 민주교육 운동에 치열하게 헌신적으로 참여, 선도했던 송기숙은 시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강경한 시국선언’을 비롯해 거침없는 목소리를 당당하게 토해냈으며, 나아가 행동으로까지 실천해 보이는 ‘참된 지성인’으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유신시절이던 1973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했으며, 1980년대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등을 결성해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였다.

특히 유신과 광주학살 등 ‘유신‧독재’에 맞서다 두 차례의 구속과 해직을 겪은 대학 교수로는 그가 거의 유일할 정도였다. 전남대 교수 재직 중이던 1978년 대학 교수 10명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한 ‘우리의 교육지표’를 작성·발표해 대통령급 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됐으나 교수직에서 파면됐고, 다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학생수습위원회에서 활동한 내력으로 ‘국가 내란죄’로 다시 구속돼 복역하다가 이듬해 석방됐고 다시 교수에서 파면됐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직 7년만인 1984년에 다시 전남대에 복직한 송기숙은 1988년 전남대학교에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열었다. 2년 동안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500명의 증언을 채집해 2만5천장 분량으로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1990)을 간행했다. 그가 5.18 사료연구소를 세우고 증언을 채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었다. 송기숙은 간행사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민중들의 저항에 대한 자료는 거의 가해자 입장에서 왜곡된 관변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그런 자료의 한계를 구전이나 구술로 어느 만큼 보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이 자료집은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의 참조 자료로 활용됐다).

또 1996년에는 20년 세월에 묻혀진 ‘그날 광주의 분노’를 형상화한 소설 《오월의 미소》를 출간, 교수‧작가로서 ‘1980.5.18’ 때 묵은 빚을 다소나마 해소시킬 수 있었다.

송기숙은 이처럼 1970~80년대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민주화, 광주 민주화 운동 등에 헌신하며 선도 역할을 해냄으로써 자연스레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 ‘광주 민주화운동의 표상’으로까지 불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륜으로 노무현 정부때인 2004년 2월 국무총리급인 ‘광주 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장’의 초대 위원장(2004∼2006)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작가 송기숙은 또 작가로서 ‘민중의 아픔을 형상화하며 민중의 이상(理想) 실현’을 위한 노력의 결실을 맺으니, 민중소설인 1974~1975년 《자랏골의 비가》, 1979~1980년 《암태도》에 이어 그 결정판으로 갑오농민전쟁 100주년이던 1994년, 역사의 뒤안길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갑오년 때 그 민초들을 위한 최상의 문학적 헌사로 상재(上梓)된 작품을 선보이니, 바로 송기숙의 대표작이 된 대작(대하소설 12권) 《녹두장군》이었다.

실은즉, 장흥에서의 학창시절, 억불산 자포지재를 넘나들며 ‘문학적 이상’으로 담았던 그 ‘동학정신의 발현’이 그때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작가로서 송기숙은 ‘민중의 삶에 천착하며 민중정신을 형상화시킨 한국 민중문학사 대표적인 작가’로 우뚝 설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송기숙의 ‘광주민주화 운동의 표상’ ‘한국 민중문학의 제1인자’로서 위명은 기실 ‘장흥동학’이 기저가 된 ‘장흥의 민중정신’의 토양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작가 송기숙이야말로 현대 장흥문학 맨 앞자리에 입지하는, 장흥동학정신에 뿌리를 ‘장흥문학의 대표적 표상’이라 할 만한 것이다.

황소 같은 강직한 품성으로, 고은 시인의 표현처럼 ‘인간 천연기념물’의 ‘순수 열정’으로 민중의 아픔을 소설에 녹여온 송기숙 씨.

그는 “도깨비로 살면서도 도깨비인 줄 모르는 이들을 깨우치는 게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강조했다(소설 ‘도깨비 잔치’, ‘작가의 말). 그는 “우리가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처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실현하는 것”이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존재의 가장 적극적인 발현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도깨비가 판치는 세상에서 도깨비가 아닌 사람다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였을, 하여 소설 속에서나마 더욱 치열하게 그러한 민중의 이상을 불태웠을, 소설가 송기숙 선생.

( … 이제 저승에서나마 이런저런 천태만상의 도깨비 춤일랑 깡그리 잊어버리고 편히 영면하소서 …).

우리는, 장흥군은, 장흥의 문학계는 이제라도, 서둘러 송기숙의 문학을 장흥에 재현해 내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확인된 바로, 우선 서울 추모공원에 안장했다가 후에 광주 5.16묘역으로 이장한다고 한다. 그때 유해 일부나마 장흥 포곡마을 ‘송기숙의 문학자리’에 모셔질 수 있도록, 당신의 문학을 품어 안은 장흥 여러 곳들을 ‘송기숙 문학 터’로 조성. 송기숙 선생의 영혼이 고향의 억불산 자락에서나마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송기숙 현창 기념 사업’도 서둘러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뒤늦게나마 우리가 ‘송기숙 작가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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