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古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기〉 신라 하대, 천관산은 불국토(佛國土)였다(1)
장흥의 古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기〉 신라 하대, 천관산은 불국토(佛國土)였다(1)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1.0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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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선사, ‘동문선’에 시문 26편이 수록된 당대의 대문인
‘천인 선사, 고려 초‧중기에 고려조 ‘최고의 승려문인이었다’
장흥고대 순수산문으로 최초 작품 - ‘불국토 천관산’ 소개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천관산기

 

 

 

 

 

 

 

 

 

 

 

 

 

 

 

 

 

 

 

 

 

 

 

장흥의 현대문학으로 토대가 된 장흥 고문학 중 문헌이나 출전 등의 사서가 희귀한 신라·고려 때의 장흥문학은 어떠했을까.

장흥고문학을 신라·고려조를 제1기로, 조선조를 제2기로 분류하고, 이어 이를 산문과 운문(韻文)으로 분류한다.

제1기 장흥 고문학에서, 산문의 상황은 어땠을까.

역대 고문헌을 다 수집해 고찰한 결과, 장흥 고문학 산문의 시작점은 통일신라 때인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804~880)의 ‘보림사창성탑비’가 그 첫째로 나온다. 그 이후 나타난 산문은 백련사(白蓮寺) 제 2세주 정명국사 천인(靜明國師 天因,1205∼1248) 의 ‘천관산기(天冠山記)’다. 그리고 이어 나타난 산문은 고려후기 충렬왕 때의 문신인 안향(安珦, 1243~1306)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이산(李㦃, 생몰 미상)의 ‘용두산금장사금당주 미륵삼존개금기(龍두산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다. 이어 고려 말 정세운(鄭世雲,?~1362)의 ‘노포문(露布文)’과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 1396)의 ‘중령산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가 장흥산문으로 나타난다.

이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김영의 ‘보림사창성탑비’

②천인의 ‘천관산기(天冠山記)

③이산의 ‘용두산금장사금당주 미륵삼존개금기(龍頭山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

④정세운의 ‘노포문(露布文)’

⑤이색의 ‘중령산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

지난 호에 소개한 보조선사 체징의 ‘보림사창성탑비명’에 이어 이번에는 정명국사 천인 의 ‘천관산기(天冠山記)’에 대해 고찰해 본다.

정명국사 천인-대문인

‘천관산기’의 저자 정명국사 천인(靜明國師 天因, 1205~1248)은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이기도 했다.

천인은 강진군 만덕산의 백련사 제2세주로, 백련사의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2∼1245)의 제자였다. 천인은 산문 ‘천관산기’외에 1240년에 쓴 ‘원상인이 철쭉 지팡이를 선사함에 사례하여(謝圓上人惠躑躅柱杖)’도 작시, 장흥과 인연이 아주 깊은 승려였다.

속성이 박朴씨였던 천인은 어릴 때부터 명석하여 널리 익히고 많이 기억하는데다가 특히 문장에 능하여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228년 5월, 천태지관과 참회행 그리고 염불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대중운동으로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하여 천태종을 부흥시켰던 만덕산의 백련사 제1세주였던 원묘국사 요세의 문하에 들어갔지만 잠시 만덕산을 떠나 송광산(松廣山) 수선사(修禪社)에서 당시 대중적인 참선을 실천하는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끌고 있던 혜심(慧諶,1178~1234)의 문하에서 조계선(曹溪禪)을 배우기도 했다.

천인은 1245년에 만덕산 백련사의 제2세 주법(主法)이 되었고, 1248년 7월 7일에 주법을 원완(圓脘)에게 물려주었다. 동문선 제83권 서(序)편 ‘만덕산백련사정명국사시집서(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에 보면, 천인은 ‘호적(胡賊)의 난을 피하여 상왕산(象王山) 법화사(法華社)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산의 남쪽에 있는 용혈암(龍穴庵)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인은 유작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사후의 문인들이 말년의 유고를 여러 편 수습하여 〈정명국사시집(靜明國師詩集)〉 3권과 〈정명국사후집(靜明國師後集)〉 1권을 찬술하였지만 온전하게 전해지지는 않았다.

천인은 당대 선사로 고명뿐만 아니라 문인으로 위명을 떨쳤던 선승이었다. 고려조의 문인‧고승들의 시문이 소개된 《동문선》에 그의 시문이 17편이나 소개될 정도였다. 고려조 승려 문인으로는 원감국사 충지 다음으로 많은 시문이었다. 이로 보아, 천인은 고려조 초‧중기에, 즉 원감국사 충지 이전에, 최고의 문인이었던 것이다.

동문선에 소개된 그의 시문을 보면, ①次韻晥上人山中作 ②誓上人在龍穴寫經有詩見贈次韻 ③奉答 ④遊四仙嵓有作 ⑤致遠庵主以詩見示仍以請予紀山 ⑥中故事次韻答之 ⑦謝圓上人惠躑躅柱杖 ⑧海月樓看月 ⑨寄沃洲誓上人 ⑩題權學士法華塔 ⑪病中雲住叔大老見示松檜圖 ⑫次韻雲上人病中作 ⑬次韻靑谷老吊趙承制 ⑭舟次南海得眼疾寄常寂法主 ⑮以長句代書答崔學士 ⑯再和 ⑰洪英上人以詩見贈次韻答之 ⑱次韻答晥上人 ⑲冷泉亭 ⑳說法臺 (21)天冠山記 (22)祭先師圓妙國師文 (23)立浮圖安骨文祭 (24)立碑後諱旦祭文 (25)初入院祝聖壽齋䟽文 (26)初入院祝令壽齋䟽文 등이다.

이제, 천인의 〈천관산기〉를 보자.

《東文選》권68/기(記)/천관산기/석천인

천하에 통한 것이 한 기운이니 새면 내와 개천이 되고, 쌓이면 산과 멧부리를 이룬다. 조령(鳥嶺) 남쪽 바닷가 옛적 오아현(烏兒縣) 지경에, 천관산(天冠山)이 있는데, 꼬리는 궁벽한 곳에 서리고 머리는 큰 바다에 잠기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며 높고 우뚝하게 솟아 여러 고을 땅에 걸쳐 있으니, 그것은 큰 기운이 쌓인 것이리라. 서로들 전하기를, “이 산을 지제산(支提山)이라고도 한다.” 하는데, 《화엄경(華嚴經)》에도 있듯이, “보살(菩薩)이 머물렀던 곳을 지제산이라 하고, 현재 보살이 있는 곳을 천관이라고 한다.”는 설도 이와 같았다.

산 남쪽 언덕에 우뚝 서서 두어 길이나 되는 포개진 돌이 있으니, ①이것은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이 성사(聖師)의 신통력을 빌려서 8만 4천 개의 탑(塔)을 세웠는데, 이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탑 앞의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위에 한 길 남짓하게 우뚝 솟아 있는 층대(層臺)가 있으니, 이것은 우리 부처님과 가섭(迦葉)이 편안히 앉았던 곳이다. 상고하건대, 〈불원기(佛願記)〉에 이르기를, “내가 가섭과 편안히 앉았던 곳에 아육왕이 내가 입적(入寂)한 뒤에 탑을 세워서 공양(供養)하겠다.” 하였는데, 아마 이곳이리라. 신라(新羅) 효소왕(孝昭王)이 유밀(宥密)에 있을 때에 부석존자(浮石尊者)라는 사람이 그 아래에서 살았는데, 지금의 의상암(義湘庵)이다. 형세가 요충지이고 맑고 수려하기가 천하에 제일이어서 창문을 열어 놓고 내려다보면, 호수와 산의 온갖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안석으로 들어와 나로 하여금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풀리어 심오(深奧)한 진리의 경지(境地)로 들어가게 한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 부처님과 가섭이 여기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②후에 통령화상(通靈和尙)이 탑 동쪽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지금의 탑산사(塔山寺)이다. 이 대사가 하루는 꿈을 꾸니, 북갑(北岬)이 땅 속에서 솟아 나오는데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이 날아서 산봉우리를 지나 북갑에 가서 꽂혔다. 석장이 꽂혔던 곳이라고 어렴풋이 생각되는 곳에 가시 덤불을 베어내고 ③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천관사(天冠寺)이다.

④신라 신호왕(神虎王)이 태자로 있을 때에, 마침 임금의 견책(譴責)을 받아 산의 남쪽 완도(莞島)로 귀양갔는데, 화엄홍진(華嚴洪震) 대사가 본래 태자와 좋아하는 사이라, 동궁(東宮)의 일이 다급함을 듣고 달려가서 이 절을 의지하여 밤낮으로 정성껏 예를 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불렀다. 그러자 여러 신중(神衆)이 감동하여 부름에 응하여 절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으니, 지금의 신중암(神衆岩)이 그것이다.

절 남쪽에서 바라보면 바위가 더욱 기이하니, 뾰족하게 우뚝 솟은 것은 당암(幢岩)이고, 불쑥 튀어나서 외롭게 매달려 있는 것은 고암(鼓岩)이고, 구부정하여 몸을 굽혀 명령을 듣는 것 같은 것은 측립암(側立岩)이고, 엉거주춤하여 사자가 뽐내는 것 같은 것은 사자암(獅子岩)이고, 겹겹이 쌓여 있어서 음식을 괴어 놓은 것 같은 것은 상적암(上積岩)과 하적암(下積岩)이고, ⑤높다랗게 가운데 서서 홀로 높은 체하는 것은 사나암(舍那岩)이고, 뾰족뾰족하게 양쪽을 옹위하여 이즈러진 곳을 보충하는 것은 문수암(文殊岩)과 보현암(普賢岩)이다. 참으로 화엄대덕(華嚴大德)이 도(道)를 닦은 곳에 정도에 의지하여 서로 나타나고, 상대방과 내가 온전히 참되었으니, 그 같은 곳을 형상하여 지목한 것이 공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천관사에서 남쪽으로 5백 보를 올라가면 작은 암자가 낭떠러지 바윗집 아래에 끼어 있어서 아홉 개 바위의 정기를 머금고 있으므로 구정암(九精庵)이라 이름을 붙였다. 만일 암자에 사는 사람 중에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신령이 반드시 무섭게 하여 머물러 살 수가 없게 한다. 만일 마음이 참되고 깨끗하면 반드시 별과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느끼고, 혹 금종(金鐘) 소리가 바위 골짜기에 울리는 것도 들을 수 있어서, 모든 정(定)을 닦고 혜(慧)를 익히는 자는 반드시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

⑥그러므로 남악(南嶽)의 법량사(法亮師)가 일찍이 와서 암자에 머물러 있었는데, 처음에는 종소리를 듣고 다음에는 별빛을 보고, 삼칠일(三七日)이 되어서는 다라니(陀羅尼)를 얻어 그때에 혜해(慧解)가 제일이라고 일컬어졌다.

암자의 구멍으로부터 비탈을 기어 백여 보를 올라가면 넓적한 석대(石臺)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한다. 산에 오르는 자가 위험한 길에 곤란을 겪다가 여기에서 쉬면 기쁘다는 뜻이다. 석대 앞 숲 사이에 옛길이 있어서 지름길이 되었는데, 이 길을 찾아 올라서 산꼭대기에 이르면 사방의 전망이 확 트인다. 구름과 노을도 맑고 선명하며 초목도 빛나고 밝아 쇠잔한 산과 나머지 물[殘山剩水 패망한 나라의 산천(山川)]이 푸른 소라를 쭉 늘어놓고 흰 비단을 손바닥에 놓고 보는 것 같다.

산꼭대기로부터 남쪽으로 3십 리쯤 달려가 선암사(仙岩寺)가 있고, 절 북쪽에는 바위가 총총히 있는데 지선(地仙)이 살던 곳이니, 아마 단애옹(丹崖翁) 황석공(黃石公)의 다음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절 남쪽 다른 봉우리 위에 있는 미타암(彌陀庵)의 북쪽에 신령스러운 돌이 있어서 높이와 크기가 8척 쯤 되는데 손으로 떠밀면 끄덕하며 움직이는 것 같으니, 아, 참 놀랄 만하다. 또 포암(蒲岩)이 서쪽에 있는데, 위에 있는 모난 우물이 깊이는 한 자쯤 되고 영롱한 샘이 깊고 맑아 사계절 마르지 않고 푸른 부들 두어 포기가 돌 틈에 나서 마치 이 샘을 보호하는 것 같다. 그 외에도 너무 이상하고 괴이하여 오똑한 것, 납작한 것, 오목한 것, 빠끔한 것, 우뚝 일어난 것, 푹 엎드린 것들이 올망졸망하고, 높직하고, 펑퍼짐하고, 두루뭉술하고 뾰족뾰족하여 천태만상이니 기이한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어찌 조물주가 수수한 기운을 여기에 모아 놓고 큰 바다를 한계로 하여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옛날 사람의 성품이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나막신에 밀랍을 바르고서 올라간 이도 있고, 나귀를 거꾸로 타고 돌아간 이도 있고, 혹 며칠씩 묵다가 돌아오기를 잊은 이도 있고, 오래오래 돌아오지 않은 이도 있었으니, 우뚝 솟은 산을 구경하고 졸졸 흐르는 물 소리를 듣고 그 정서를 기쁘게 하려한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산수 사이에 붙이고 산수의 즐거움을 좇아서 본성을 회복하고 그 도(道)에 이르려는 것이었다.

더구나 여러 대사(大士)의 넓은 눈으로 경계하니, 화장(華藏)의 장엄(莊嚴)한 경치가 있는 곳에서 바로 앞에 나타나고 백성(百城)의 여러 벗을 반 걸음에서라도 찾을 수 있으니, 비록 조화(造化)를 폈다 오므렸다 하여 산과 바다를 삼켰다 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나머지 일이니, 그다지 괴이할 것도 없는 것이다.

⑤지난 경자년(1240년) 가을 7월에 내가 일찍이 이 산에서 놀면서 성적(聖迹)을 탐방(探訪)하였는데, 탑산(塔山)의 주공(主公)인 담조(曇照)가 나에게 고적(古迹)을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 초본(草本)이 산 뒤 민가에 유락(遺落)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가서 얻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파손되고 썩어서 글자가 없어진 것이 많으니, 그 뜻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새롭게 해서 후세에 보여주면 이것도 유통(流通)의 일단(一段)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때 마침 내가 다른 곳의 청을 받아 가므로 생각을 모아 볼 겨를이 없었는데, 뒤에 담일(湛一)이라는 자가 또 이 초본을 나에게 주었다. 상자 속에 넣어 둔 지가 오래되었는데, 요즈음 한가한 날에 우연히 검열하게 되어 대강 그 줄거리를 기록하여 그의 뜻에 부응하고 초본과 함께 돌려 보내노라.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68

《東文選》卷之六十八 / 記 /天冠山記 / 釋天因

通天下一氣也。泄爲川瀆。積成山岳。則嶺之南濱海之地。古烏兒縣之境。有天冠山。尾蹯荒陬。首漫大洋。起伏穹隆。距數州之壤。其氣積之大者乎。相傳云。此山亦名支提山。如華嚴經說有菩薩住處名支提山。現有菩薩。名曰天冠是也。山之陽。有累石屹立數仞者。是西竺阿育王。假聖師神力。建八萬四千塔。此其一也。塔前斷崖之上。有層臺斗起丈餘者。是吾佛與迦葉宴坐處也。按佛願記云。我與迦葉宴坐之所。有阿育王。於我滅後。起塔供養。盖此所也。新羅孝昭王在宥之時。有浮石尊者。卜居其下。今義湘庵也。面勢得要。淸秀甲天下。開戶而下瞰。湖山萬朶。倂入於几案閒坐。使人心凝形釋。入希夷之境。是知吾佛與迦葉宴坐于此。眞不虛也。後有通靈和尙。創寺于塔之東。今塔山寺也。是師甞夢。北岬從地而湧。所持錫杖飛過山頂。至北岬而植焉。於髣髴植杖處。剪榛莾而創迦藍。今天冠寺是也。新羅神虎王。爲太子時。適遭天譴。流山南莞島。華嚴洪震師。素善太子。聞東宮事急。走依是寺。日夜精勤。禮唱華嚴。神衆因感。諸神衆隨唱而應。遍列寺南峯。今神衆嵓是也。自寺南而望之。巖石尤奇。峭然而挺立者。幢巖也。突然而孤懸者。鼓巖也。僂然如鞠躬聽受者。側立巖也。跪然如獅子嚬伸者。獅子巖也。纍纍乎如供具飣餖者。上積下積巖也。巍巍乎中峙而獨尊者。舍那巖也。峨峨焉分擁而補缺者。文殊晉賢巖也。良以華嚴大德。所履踐處。依正互現。物我全眞。則其所狀類而目之者。非苟然也。自天冠寺南行而上五百步。有小庵介于崖广之下。舍九巖之精。因號九精庵。若住庵之人心不淨者。神必怖之。不得住。若其心眞淨。必感星月入襟懷。或聞金鐘響巖谷。凡修定習慧者。必果其願。是以南嶽法亮師。甞來止住。初聞鐘聲。次見星光。至三七日。得陁羅尼。時稱慧解第一。自庵竇緣崖而上百餘步。有石臺盤陁者曰歡喜臺。以登陟者。困於危險。憇乎此則歡喜也。臺前林薄之閒。有古路成蹊。尋蹊而上。至山椒。四望豁如也。雲霞澄鮮。草木韡曄。殘山剩水。排靑螺曳白練。如指諸掌。自山巓南走一舍許。有仙巖寺。寺北巖叢。是地仙所居之處。殆丹崖翁黃石公之流亞也。寺南別峯頭彌陁庵之北。有靈石。高大僅一尋。手推則動如有情。吁可駭也。又有蒲巖在其西。上有方井。可深一尺。靈泉泓澄。四時不渴。靑蒲數叢。生于石罅。如有物護焉。自餘恢詭譎怪。有兀者亞者窪者呀者崛起者隱伏者。碨磊犖确。胚渾蔟縮。千態萬狀。奇哉異乎。不可殫記也。豈造物者鍾粹於此。限以大海而莫之越逸乎。噫。古之人性。酷愛山水。有蠟屐而上。倒驢而還。或信宿而忘歸。長往而不返者。非唯目嵯峨耳潺湲。務快其情而已。盖寓意山水之間。從仁智之樂。將復其性而適其道也。况在諸大士普眼境界。華藏莊嚴。當處現前。百城諸友。跬步可尋。則雖盈縮造化。吞吐山海。皆其餘事也。無足恠焉。嚮者庚子秋七月。予甞遊此山。搜訪聖迹。塔山主公曇照。示予古迹曰。此草木遺落在山後民家。偶往而得之。歲久破爛。文多盖闕。若紬繹而新之。照示於後。斯亦流通之一段也。時予方赴他請。未遑屬思。後有湛一者。又以此本遺予。委在篋中久矣。今於暇日。偶獲檢閱。粗記其梗槩。以副其意。幷其本而歸之。

ⓒ 한국고전번역원

《천관산기》-민가의 고적이 단초였다

이상의 ‘천관산기’에서 천인은, 자신이 원저자가 아님을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주의 표식⑤)

“지난 경자년(1240년) 가을 7월에 내가 일찍이 이 산에서 놀면서 성적(聖迹)을 탐방(探訪)하였는데, 탑산(塔山)의 주공(主公)인 담조(曇照)가 나에게 고적(古迹)을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 초본(草本)이 산 뒤 민가에 유락(遺落)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가서 얻게 되었다’면서 ‘오래되어 파손되고 썩어서 글자가 없어진 것이 많으니, 그 뜻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새롭게 해서 후세에 보여주면 이것도 유통(流通)의 일단(一段)이 될 것이다” 하여 이 고문서를 얻게 되었고, 후에 담일(湛一)이라는 자가 또 이 초본을 자신에게 주어, 어느 한가한 날에 우연히 검열하게 되어 대강 그 줄거리를 기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천인에 의해 윤색되고 정리된 천인은 ‘천관산기’는 최초 접했던 때로부터 최소 2,3년쯤이 지난 후(1240년대 초반)에 정리했음을 추측케 하고 있다.

‘천관산기’의 의미는, 첫째 장흥고문학의 본격적인 산문학의 시작이었다는 점 외에도 당대 천관산의 불국토로서 위상, 당대 천관산 세력의 상황과 청해진·장보고와 관계성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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