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이 절망의 시대, 처사(處士) 정신 구현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
사설 - 이 절망의 시대, 처사(處士) 정신 구현만이 바로잡을 수 있다
  • 김선욱
  • 승인 2022.02.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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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천방(天防)의 ‘처사정신’- 본받고 되살리는 수장(首長) 나와야

조선 조 양반들은 ‘지식인’을 자처했다. 유교 경전과 유교 관련 사서들이 그들 인격의 바탕을 만들어냈고, 당대 인간들(양반들)의 가치를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부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들 대부분은 크든 작든 ‘그 벼슬’로 탄탄대로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과시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을 물리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진정한 선비도’, ‘진정한 군자도’의 실현 그리고 ‘그 기개와 절의’를 위해 재야에서 은일자(隱逸者)로 은둔하거나 징사(徵士-나라에서 벼슬하라고 불러도 나가지 않은 선비)나 처사(處士)로, 오로지 한평생을 학문 궁구(窮究)와 시문(詩文)에 쏟아 붓거나 후진 양성에 매진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처사(處士)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이었다.

대개 우리나라의 위인전의 위인은 특별한 능력이나 통찰력 등 과시적이고 긍정적인 것만 강조하는 성향이 짙다. 그런데 조식 남명의 경우, 당대 시대적인 상황(밖으로 외침 위기, 안으로는 극심한 당파싸움 등)속에서 가족의 거듭된 불행 속에서도 실학의 비조(鼻祖)로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처사로서, 미래와 후대를 위한 교육가로서, 책상머리만의 학문이 아닌 죽음도 무릅쓴 상소 등으로 진정한 군자도에 올인했던 조선조 행동하는 최고의 석학이었다.

당대는 극심한 당파싸움, 권력자들의 부패 무능으로 인한 국정의 문란, 전제정의 폐해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로 암흑 같았던 절망의 시대였다. 사림도 감히 그 비정상적 부정(不正)을 비판할 용기도 갖지 못한 그 시대, 죽음을 각오하고 출사를 명한 왕명을 거부하고 비판한 참된 선비정신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것이 처사 남명이었다.

평소 그의 허리춤에는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한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이 있었다.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의(敬義)’를 실천하기기 위한 고뇌이자 군자로서 절의를 고수하고 세속의 유혹을 잘라내고자 하는 뜻이었다.

동년배로 영남좌도의 대학자 퇴계 이황과도 대비되는 남명이었다. 남명은 퇴계에게 국정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를 비판·질책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출세에만 혈안이 젊은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당대 사림(士林) 총수로서 무책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55세 때(1556년)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죽기를 각오한 처사의 직언 ‘을묘사직소’는 당시 조정을 진동케 했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그릇되었으며,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갔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인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희희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 내직에 있는 신하들은 용이 연못을 차지하고 버티듯 후원 세력을 심고 있으며, 외직에 있는 신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심으로서 신민의 요체를 삼으시고 수신으로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왕도의 표준을 세우도록 하소서. 왕도의 표준이 표준 구실을 하지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 조식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온 조정을 얼룩지게 한 이 사화(士禍)에도 칼끝은 남명을 향하진 못했다. 결국 이로써 남명은 재야 사림을 대표하는 ‘진정한 선비’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노장의 처사는 68세 되는 해에 또 ‘무진봉사’를 선조에게 올린다. 정치의 도리를 논한 이 상소문은 ‘서리망국론’을 주장하며 임금을 질타하며, 관료들의 폐단을 바로 잡아 민생을 살피라는 직언이었다.

남명은 또 군자도 실천의 교육으로 김효원·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곽재우 등 50 명에 달하는 의병장들을 배출했다.

남명이 조선을 대표하는 처사였다면, 장흥의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1502~1584)은 장흥을 대표하는, 아니 호남을 대표하는 처사였다. 장흥 고문학(漢詩)의 선구자요, 사회상을 통렬히 비판한 참여 시인이었으며, 장흥에서 유일하게 학맥을 일구었던 성리학자 천방은 평생을 참된 군자도의 실천과 실현을 위해 한생을 투신했던 진정한 처사였다. 남명이 목숨을 걸고 임금께 바른 정치를 하라며 간언했던 것처럼, 천방도 대 가뭄이라는 재난위기에서 몸을 분신하려는, 죽음도 불사한 절의(節義)정신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선비’로서 전범을 보여주었다. 참된 선비 정신, 곧 진정한 처사정신을 고수하기 위해 남명이 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면, 천방은 잠자리에서 나태해지려는 자기를 지키려는 칼전대를 차기도 했다.

남명과 천방의 가장 큰 공통점은 미래를 내다보는 시대정신이었다. 남명이 수많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군자도는 물론 무(武)도 함께 공부시켜 다가올 임진왜란 때 그의 50여 명의 제자들이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이 되었듯이, 천방의 제자들도 임진란 때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거나, 의병으로서 절의를 지켰다.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1542∼1662)은 임진왜란 때 선사군수로 왜군을 물리쳤고, 이순신의 병참모가 되어 이순신의 기적 같은 승전을 주도한 영웅이었다.

천방의 제자 청영 문희개(淸潁 文希凱,1550~1610)도 임진란 때 풍암공(文緯世)과 함께 창의,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었으며, 1598년 낙향 후 정자 ‘청영정(지금은 부춘정)’을 지어, 당대 사림(士林)‧문림(文林)의 강학‧유락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하여 조선조 중기 장흥문학 부흥에 크게 일조했다. 천방의 제자 청계 이덕의(聽溪 魏德毅,1540~1613)도 임란 때 장흥에서 90일을 걸어 왕이 피난했던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까지 달려가 왕을 호종했던 충신이었다.

남명이 처사로서 교육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 남명학파라는 학파‧학맥을 일구었듯이 천방도 장흥위씨에서 위덕의, 영광정씨에서 정경달, 수원백씨에서 백문림 등을 위시로 3대에 이르도록 성리학과 시문이 전수되는, 장흥에서 유일한 학맥을 일구었던 처사였다.

이처럼 남명이나 천방은 지금의 시각으로는 미래를 보는 시대정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절의‧청빈의 정신을 바탕으로 정도(正道)의 군자도를 실천하는 참된 처사의 정신으로 백성을 위무하고 미래의 비전을 모색하는, 시대정신이 탁월했던 선비들이었다.

그렇다. 진정한 처사 정신이란 ‘청빈하다, 물욕을 탐하지 않는다, 국익을(郡益) 위해 죽음도 무릎쓴다, 기개(氣槪)‧절의(節義)를 고수한다, 애민정신·학문을 실천한다, 후학을 양성해 후대를 대비한다 … 등으로 집약된다.

지금 장흥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은 인구 고갈로 반세기 후쯤이면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소멸위기다. 이는 거의 절대적인 위기다. 이 위기에서 과연 ‘길게 흥하는 장흥’의 비전은 있을 것인가? ‘길게 흥할 장흥’의 비전은 바로 처사정신에 담겨 있는 그 시대정신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 시대정신을 가진 수장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절체절명의 이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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