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고문학-산문2-정면국사 천인의 천관산기(6)-탑산사 한국 불교 최초 도래지 …설화로만 그치는가?
장흥의 고문학-산문2-정면국사 천인의 천관산기(6)-탑산사 한국 불교 최초 도래지 …설화로만 그치는가?
  • 김선욱
  • 승인 2022.02.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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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보살 주처로 ‘불국토 천관산’+아육왕탑 조성설 = 천관산의 불교성지 위상 제고
천관산 불교성지로 현실화는 장흥 후인들의 몫으로 남아
천관산 세력이 장보고의 해상왕국에 한몫까지 했다?
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룬 구정봉 전경. ‘천자의 면류관 같다’는 천관산(天冠山)이란 이름을 붙게 한 바위군이다
천관사 역사와 성격 규명 학술대회 
해상왕국을 꿈꾸었던 장보고

 

 

 

 

 

 

 

 

 

 

 

 

 

 

 

 

 

 

 

 

 

 

 

<지난호에서 계속>

현재의 탑산사는 …

현재 ‘탑산사’라 명칭 되는 절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위치도 본래의 위치가 아니다. 본래의 탑산사는 현재의 탑산사에서 왼쪽 계곡을 타고가다 구룡봉 오르는 길 중간에 있었다. 천관산남쪽 중허리이고, 거의 정상에 가까운 위치다.

원탑산사는 800년(신라 애장왕 1) 통령(通靈)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찰 이름은 절의 북서쪽에 있던 아육왕탑에서 유래되었으나, 현재 탑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의상암이 있었던 자리에는 중간석이 없는 석등 하나만 달랑 남아 있다

설화에 따르면, 아육왕이 이곳에 보탑(寶塔)을 세워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 아육왕탑 터 아래에는 가섭불(迦攝佛)이 좌선했다는 자리로 알려진 '가섭불연좌석(宴坐石)'이 남아 있다. 이는 경주 황룡사지에 있는 가섭불연좌석과 관련이 있어 불교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탑산사는 대웅전, 시왕전, 공수청, 정방 등 크고 작은 방들을 갖춘 큰절이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전만 해도 대웅전과 시왕전·공수청·향적각 등 많은 건물이 있었던 사찰이었다. 800근이나 되는 대종도 있었다고 한다. 대종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녹여 총포를 만들었는데, 이때 작은 종도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이 종의 용두에 기록되어 있다.

1745년(영조 21) 이후 3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작은 암자로 명맥을 이어왔다. 1923년 화재로 이 작은 암자마저 소실되었다.

현재는 탑산암이라는 암자만 하나 있지만 탑산암 주변에 옛날 사찰 터로 보이는 축대와 계단, 기와들이 흩어져 있어 이 절의 융성했던 시절을 말해 준다.

특히 현재의 탑산암에 있는 샘은 사방 1미터가 넘는 크기로 탑산사가 매우 큰 절이었음을 웅변해 준다.

원탑산사의 위치는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위치다.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육왕탑이 바로 곁에 있을뿐더러,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산비탈 가득 어울려 있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탑산암에서 바라보면 대덕읍과 회진항,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며 하루종일 해가 드는 명당 가운데 명당이다.

현재의 탑산사는 1991년, 청화 스님이 ‘탑산암’ 암주 최 보살의 권청을 받아 새로이 개원했다. 이어 1992년 6월 12일에는 부처님 이운식도 가졌다. 곡성군청 창고에 방치돼 있던 곡성군 목사동(木寺洞)에 있던 폐사의 불상을 모셔왔다. 큰스님께서는 그 후로도 수 차례에 걸쳐 탑산사 중흥을 위한 큰 법회를 가져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제지‘에 나오는 아육왕탑


존재 위백규의 《지제지》에 탑산사와 아육왕탑에 얽힌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支提誌)》

선조 때 청금공 위정훈(聽禽公 魏廷勳)이 선세휘(宣世徽)와 천관산 의상암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어느 날 이승(異僧)이 위정훈을 찾아와 “소승이 거처한 곳이 불영대”라며 매우 청절(淸絶)하니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하고 청하였다. 위정훈이 승려의 청에 응해 그 암자로 가니 다른 중은 없고 그 중 하나만 극진히 대우를 했다.

새벽 삼경이 되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 들어와 말하기를 '아육왕탑이 무너져 의상암에 있던 모든 선비들은 다 죽었다'고 했다. 위정훈이 놀라 그 중에 친한 친구인 손세징 또한 죽었느냐고 묻자 중은 '학덕이 있고 청빈한 선비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의상암에 가보자 중이 말한 데로 아육왕탑이 무너져 의상암을 덮쳤고 다른 선비는 다 죽고 오직 손세징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손세징의 말을 들은 즉, 갑자기 밖에서 '급히 나오라'는 세 번의 외침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아육왕탑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그 중이 산신령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설화는 탑산사 와육왕탑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지금처럼 폐허로 변해버렸을 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아육왕과 불국토 사상

인도신화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이 전륜성왕(轉輪聖王, 약칭은 ‘전륜왕’)이다. 전륜왕은 자이나교와 힌두교에서도 상정되고 있으며 옛 비문 등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즉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지배하는 왕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이 전륜왕의 화신이 아육왕(아소카왕)이다. 즉 아육왕은 불교 사회에서 이상적인 지배자를 뜻하는 개념인 전륜성왕의 모델이어서 이른바 세속의 전륜성왕이었다.

아육왕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황제인 아육왕(재위 기원전 265년~기원전 238년)으로, 인도 역사상 최고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다.

젋은 시절엔 왕위 계승 다툼에서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동생 99명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까지 모두 죽인 뒤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이기도 했다. 이후 타국과도 무수한 정복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이런 과거의 폭정·악행을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특히 불교 귀의 뒤에는 불교 보호 외에도 인도 전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중앙아시아뿐 아니라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 헬레니즘 세계까지 포교관을 보내 불교의 가르침과 함께,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인 아육왕탑 조성을 전파, 불교의 세계 종교화에 크게 기여했다.

아육왕에 대한 이야기는 10권으로 구성된 《잡아함경》 ‘권 23 아육왕경(阿育王經)’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아육왕경’에 의하면, 아육왕은 과거의 폭정과 악행을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8만 4천의 사리탑을 세웠다. 아육왕이 8만 4천 탑을 조성한 사실에는 전하는 경전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아육왕이 실제 많은 탑을 조성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사리를 봉안한 탑 8만 4천 탑을 조성, 불탑신앙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단초를 만들게 되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아육왕을 이상적인 불교의 상징으로 존숭했는데, 아육왕이 만든 불상이나 탑과 관련된 설화가 유포되기도 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전후의 삼국시대이다. 전래된 내용은 중국에서 변용된 인도 불교로, 특히 남북조시대 북조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 북조 불교는 국왕이 곧 불교라는 ‘왕즉불(王卽佛)사상’이 기조를 이루었고 국내의 삼국도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주도로 새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하였다. 삼국에서 불교는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반인 동시에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이 되었으며, 특히 전륜성왕 사상은 무력이 아닌 정법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이었고 불교의 정치이념이었었다.

그러므로 전륜성왕의 정치학, 곧 아육왕의 불교사상은 당대 신라가 추구하는 불국토 재현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또 이미 천관보살 주처로서 불국토였던 천관산에 아육왕탑의 조성설이 보태지면서 천관산은 불교의 성지로서, 불국토로서 위상을 더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장보고 세력권이었던 천관산 세력

장보고와 운명도 같이해?

신라 신호왕(神虎王)이 태자로 있을 때에, 마침 임금의 견책(譴責)을 받아 산의 남쪽 완도(莞島)로 귀양갔는데, 화엄홍진(華嚴洪震) 대사가 본래 태자와 좋아하는 사이라, 동궁(東宮)의 일이 다급함을 듣고 달려가서 이 절을 의지하여 밤낮으로 정성껏 예를 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불렀다. 그러자 여러 신중(神衆)이 감동하여 부름에 응하여 절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으니, 지금의 신중암(神衆岩)이 그것이다.

-‘천관산기’ 中

“장보고 불교사상 기반은 천관산 천관사”

지난 2013년 10월 24일 장흥 천관사가 ‘천관사의 역사와 성격 규명’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천관사가 주최하고 민족문화유산연구원이 주관한 이날 학술대회에서 이계표 조선대 사학과 교수가 ‘천관산 천관사의 역사’ 주제의 발표를 시작으로, ‘천관사와 천관보살 신앙’(최성렬 조선대 철학과 교수), ‘천관사와 장보고 대사’(장일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천관사의 유적과 유물’(최인선 순천대 사학과 교수) 등이 각각 발제됐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해상왕이라 일컬어지는 장보고와 천관사의 관계를 전개한 주제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장일규 연구원은 ‘천관사와 장보고 대사’의 발제문에서 “장보고의 불교사상 내지 신앙의 기반은 완도와 강진만을 내려다 보는 천관산 천관사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하대의 천관사는 장보고 선단과 연결되어 천관산 일대의 사찰을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는 천관산이 청해진의 본영이 자리했던 완도의 배후 지역이었던 강진만 주변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고 그 이유를 지적했다.

당시, 서남해를 오가는 해로상에 위치했던 천관산에는 당 나라부터 여러 사상적인 편린이 전해졌는데, 그 구체적인 것으로 도교 수련처였던 복건성 영주 곽동산의 화엄경 보살주처신앙으로 ‘천관보살 상주처’의 모습이 반영됐다. 때문에 천관산은 선도(仙道)와 불도를 닦으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명산으로 알려졌다.

신라와 당, 일본을 오가는 해상 무역활동에 종사했던 이들은 바다에서 풍랑과 질병에 시달리며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잦았는데, 장보고는 이런 현실적 위험을 제거하고자 수련처로 알려진 천관산을 주목했다고 주장했다.

장 연구원은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켜 신라 정부에 진압됐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찰 기록도 멸실되거나 윤색됐을 것으로 유추된다. 하지만 천관사로부터 비롯된 장보고의 불교사상과 신앙은 남해안 일대의 선종 사찰뿐 아니라 고려 초의 교종 및 선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천관사의 유적과 유물’을 주제로 발표한 최인선 순천대 사학과 교수는, 천관사가 고대 장흥의 중심지였던 곳에 자리잡고 있어 창건기부터 지방의 토호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최인선 교수는 “신라 42대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837년 화를 피해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의탁했는데 홍진대사가 적극 조력했다”며 “이후 김우징이 45대 신무왕에 즉위하고 그 아들인 문성왕과 헌안왕이 그 인연으로 천관사 불사를 일으켜 천관사 삼층석탑과 석등, 옥룡사지 석조여래좌상 등의 결과물로 나타났다. 그런 이유로 “천관사 지역의 초창기 석조물들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보고와 천관사, 장흥 천관 세력

*개성(開成) 원년(836, 희강왕1)에 동쪽에 꼬리 달린 별이 있었고, 태백성(太白星)이 달을 범하였다. 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니 왕의 재종제 김균정(金均貞)과 재종질 김제륭(金悌隆)이 왕위를 다투므로 중원 대윤(中原大尹) 김양(金陽)이 김균정을 세웠는데, 시중(侍中) 김명(金明)이 왕궁(王宮)을 포위하여 김균정을 죽이고 김제륭을 세우니, 이가 희강왕(僖康王)이다. 김명이 또 그를 죽이고 자신이 즉위하였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대사(淸海大使) 장보고(張保皐)와 복수(復讎)를 꾀하였는데, 김양도 군사를 모집하여 김명을 격살하고 김우징을 맞아 세우니 이가 신무왕(神武王)이다. 즉위하여 넉달 만에 훙하고 태자 김경응(金慶膺)이 즉위하니, 이가 문성왕(文聖王)이다. (《미수기언》

*제43대 임금 희강왕 3년(838) 1월에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게 하고 왕위에 오르자 동년 2월에 병사를 모집하여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있는 청해진(淸海鎭)으로 갔다. 제44대 임금 민애왕(閔哀王) 2년(839) 1월에 김우징, 장보고(張保皐)와 함께 출병하여 민애왕을 죽이고 동년 4월에 김우징을 제45대 임금 신무왕(神武王)으로 옹립하였다. 동년 7월에 신무왕이 죽은 뒤 제46대 임금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시중(侍中)과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하며 중용되었다. (《三國史記》)

*서기 846년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신무왕왕 김우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고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조정으로부터 나름의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 장보고의 딸을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신무왕의 속을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신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 본인의 딸과 혼인하겠다는, 다시 말해 사돈이 되겠다는 것을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버젓이 실려 있다)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삼국사기》)

*이 무렵 궁파(장보고)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유사》)

*염장은 무주(武州) 사람으로, 용맹한 군사로 세상에 이름이 난 사람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염장이 군사 하나 필요 없이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다며 자원하자 신라 조정에서 이를 허락한 것이다. (《三國史記》)

*서기 851년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이상은 당대 청해진의 장보고와 관련, 격동적인 저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나타난 장보고 관련 기록들이다.

당대 정치적 사건을 《삼국사기》 등의 기사를 참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28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는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을 지키게 되었다.

838년 2월, 김우징(민애왕)이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온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는데 청해진의 5천 군사가 서라벌로 상경, 반란을 일으키다. 청해진 세력은 이 반란에서 민애왕을 시해하고 우징을 신무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옹립된 신무왕은 1년도 못돼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장보고는 식읍 2,000호를 하사받는 등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 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신무왕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문성왕에게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846년, 문성왕이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자, 장보고는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왕에게 장보고를 살해하겠다고 보고하고 청해진을 찾아가, 연회장에서 술에 취한 장보고를 살해하고 만다.(《삼국사기》)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아예 완전히 없애버렸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을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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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설화는, 1992, ‘異蹟’, 支提誌, 장흥문화원, p60에서 발췌한 것이다.

2) 여기서 ‘84천 불탑이라는 비현실적 수량에 대해서는 상징성이 부여돼 있다. 인도인은 전체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84천을 즐겨 사용했다. 불경에도 ‘84천 겁’, ‘84천 법문法門’, ‘84천 번뇌등이 그렇다. 그러므로 여기서 84천은 방대한 양을 의미하지만, 잡아함경의 소경인 대본경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수명의 나이를 의미하며, 또한한 수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대정신수대장경123)

3)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882 천산사, ‘천관사의 역사와 성격 규명학수발표회 자료집, 2013.

4) 開成元年有星孛于東太白犯月王薨無嗣從祖弟均貞從祖弟之子悌隆爭立中原大尹金陽立均貞侍中金明圍王宮弑均貞立悌隆是爲僖康王明又弑之而自立均貞子祐徵收餘a098_191d與淸海大使張保皐謀復讎陽亦募兵擊殺明迎立祐徵是爲神武王立四月而薨太子慶膺立是爲文聖王(미수기언기언 제33/원집/외편/東事/新羅世家 )

5) 三國史記 卷44 金陽列傳

6) 《삼국사기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7) 삼국유사기이 神武大王 閻長 弓巴

8) 《三國史記11 新羅本紀11 文聖王

9) 《삼국사기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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