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고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기’(8) BC 200년경, 아육왕탑이 왜 천관산에 조성되었을까?
장흥 고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기’(8) BC 200년경, 아육왕탑이 왜 천관산에 조성되었을까?
  • 김선욱
  • 승인 2022.03.1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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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 일대 고인돌 857기 분포 - 한반도 남해안 일대서 최고 분포지
강력한 부족들 웅거, 인구 밀도 높아 - “선사시대 삶의 경쟁력 가장 우월”
영산(靈山) 천관산도 한몫… ‘불교 정법(正法) 전파 최적지’로 판단‘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김선욱/시인 . 본지 편집인
천관산의 아육왕탑
의상지의 석등

 

 

 

 

 

 

 

 

 

 

 

지금의 탑산사
관산읍 방촌리 고인돌군

<지난호에 이어>

청동기 시대-

천관산 일대 고인돌 고인돌 857기

한반도에 고대 인류의 출현은 기원 전 4만년에서 3만년 사이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산악지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현재까지 약 90여 군데가 발굴되었다. 보통은 노천의 집단거주 유적이 큰 강가나 물줄기 언저리를 중심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강가에 살았고, 물고기를 잡고 협동적으로 사냥을 하였다고 추측된다.

장흥군에서도 장동 신북리 유적에서 구석기 후기의 유물이 3만여 점이 대거 발굴, 장흥 땅에서도 구석기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구석기 다음의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약 1만(중석기 포함)~8000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신석기 다음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의 시기에 해당된다.

청동기 때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한반도에도 산재, 지금까지도 현존해 오고 있다.

고인돌(지석묘; 支石墓)은 고인의 시신을 넣은 관을 묻되 크고 평평한 바위를 몇 개의 바위로 괴어 놓은 고대의 거석 구조물이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6만기 정도가 분포하며, 숫자상으로 한국에 남·북한을 합쳐 4만기 정도로 가장 많다.

고인돌은 계급 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부족장 등 경제력이 있거나 해당지역에서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고인돌은 서해 및 남해 연안지역과 큰 하천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전라남도와 황해도 지역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전라남도에서는 250여 곳에서 무려 2만기가 분포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단일면적에 밀집도가 가장 높다.

전라도 2만여 기의 분포지 중 장흥군 일대의 고인돌 분포수가 2,251기로 확인되어, 단일지역(기초자치단체) 중 장흥군의 고인돌 분포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멀리까지 운반하여야 하므로, 많은 인력이 동원될 수 있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의 경우, 당시 세력이 큰 부족들이 많이 운집되어 고인돌 조성도 쉽게 이루어졌다고 봤을 때, 고인돌 분포 수는 곧 당시 선사인들의 삶의 경쟁력과 결코 무관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장흥 고인돌의 경우, 천관산 일대의 고인돌 분포수가 가장 많다. 관산읍의 경우, 남송리 홍기마을 96기, 방촌리 내동마을 94기, 방촌리 호산마을 100기, 방촌리 신기마을 60기 등 총 634기이고, 대덕읍의 경우 209기 등 모두 천관산을 중심으로 관산‧대덕읍에만 857기가 분포한다.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 단일 지역에 이같은 고인돌 분포 수는 천관산 일대가 유일하다.

이는 곧 이는 곧 청동기 시대에 천관산 일대에 가장 많은 부족들이 여기저기 떼지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당시 청동기 시대 천관산 일대의 청동기인들의 삶의 경쟁력이 가장 우월했음을 나타내주는 증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육왕, 불교를 최초 세계로 전파한 주역

아육왕(아쇼카)은 석가모니(기원전 624~544년) 열반 이후 240여 년 후인 기원전 300여년 전에 태어난 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황제이다. 마우리아 제국의 최 전성기를 이끌어, 인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하나로서 곧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모델로 인용되는 인도 역사상 실존 인물이다.

젊은 시절엔 2대 왕 빈두사라의 자식 101명 중 한 명으로 왕위 계승 다툼에서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동생 99명을 모두 죽이고, 자신을 반대하는 500명의 신하들, 선왕인 빈두사라의 후궁들까지 숙청한 뒤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이기도 했다. 이후 타국과도 무수한 정복 전쟁을 벌여 엄청난 피로 땅을 적셨지만 후에 불교에 귀의, ‘정법 왕’으로 불린다.

불교 귀의한 뒤 불교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은 물론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나아가 페르시아와 그리스, 이집트 등 헬레니즘 세계로까지 포교관을 보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 이전까지 인도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지방 종교였던 불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세계 종교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소카 시대 마우리아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으로는 미소레 주까지 세력을 넓혀 인도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또 불교에 귀의한 뒤,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아소카는 "다르마(dharma 法)에 의한 정복"을 표방하며 불교 기반의 통치를 시행하였다. 즉, 다르마에 기초를 둔 불교 이념을 통치 정책에 반영하면서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쇼카왕을 불교계에서 불법(佛法) 곧 정법(正法)의 공인된 보호자로서 ‘정법의 왕으로 부르게 된 계기는 붓다의 반열반 이후 마가다 지역에 세워졌던 8개의 석가모니 붓다의 사리탑들 중에 7개의 사리탑을 해체하고 불탑에 안치된 사리를 꺼내 이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인도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8만 4000의 탑을 조성하여 그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리를 보관하는 불탑은 아소카 치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아쇼까왕에 대한 실증적인 역사적 근거는 바위나 석주에 새겨진 ‘다르마 칙령(法勅 dhaṃma-lipi)’들에서 나타난다.

아소카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동굴이나 석주에 규정들을 세긴 이른바 아소카 칙령을 선포한 후 이의 표석(비문)을 전국에 세웠다.

이 칙령들은 대부분 ’마가다 프라크리트어‘(동부 인도 아리아어군 계열 언어의 전신으로 자이나교의 경전이 이 언어로 기록로 쓰여졌다) 그리스어, 아람어(크리스트 시대의 팔레스티나 말)로도 쓰인 것들도 있는데, 이 칙령은 캄보디아인. 간다라인(인도의 서북부,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일대의 넓은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들을 제국의 국경 지대에 사는 사람들로 언급하고 있으며, 아소카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디아도코이 통치자들(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에게 불교 선교사들과 외교 사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언급도 담겨있다.

또, 당시 마우리아 제국과 그리스 세계 사이의 거리(약 4,000 마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이 아소카 석주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석주인 ’사르나트의 4사자 석주‘는 오늘날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석주에 새겨진 법륜 문양인 아소카차크라(아소카 칙령에 주로 묘사되는 24개의 바퀴살을 지닌 법륜. 오늘날 인도 국기의 흰색 배경 중앙에 감색으로 된 아소카차크라가 그려져 있다)는 오늘날 인도 국기의 정중앙에도 볼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수많은 불교 승원과 기념탑을 세우고 불자들을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몸소 석가모니 부처의 유적을 찾아 참배하고,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게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스리랑카를 비롯한 외국 각지의 전법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윌듀란트(Will Durant)는 아소카 왕이 불교 선교사들을 인도의 모든 지역과 스리랑카,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이스까지 보냈다고 기술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케네스 스콧 라두렛(Kenneth Scott Latourette)도 예수가 태어난 시기에 “불교는 이미 인도, 실론(스리랑카), 중앙 아시아, 중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동방으로 불탑 전파 … 금강산과 천관산

아소카 왕은 이처럼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견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리고 인도는 물론 전 세계에 사리를 봉안할 8만 4천탑을 조성했다. 그 탑이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었으니 금강산과 천관산이었다.

“…야사존자(耶舍尊者)에게 명하여 손가락을 펼쳐 8만 4천 개의 줄기에 광명의 빛을 발광케 하고 날랜 귀신을 시켜 한 광명의 빛줄기를 쫓아가서 그 빛이 다다르는 땅에 한날 한시에 탑을 세우게 하니 …너희들은 가서 준비만 옳게 하고 있으면 내가 아수라(阿修羅)를 시켜 월식(月食)을 일으키고 사천하(四天下)가 다 함께 북을 칠 것이니 그때 맞추어 세우도록 하여라 하시여, 그 귀신들이 월식을 할 때 8만 4천 개의 탑을 모두 다 함께 세웠던 것이다 ….

그 탑(아육왕탑)이 진단국(震旦國(발해, 삼국)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 전라도의 천관산(天冠山)과 강원도의 금강산(金剛山)에 이 탑이 있으며 신령하여 영험(靈驗)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아육왕이 이탑을 세운 해는 려王(려왕) 46년 무진(무辰年)으로서 기원전 83년이었다.

-《석보상절》권 24 中

KRI 공식기록 : 최초 불교, 부처님 사리가 들어온 곳

*기록보유자 : 탑산사 *인증일 : 2007-09-03 *장소 : 전남 장흥군 탑산사 *기록명 : 최초 불교 도래지

전남 장흥군에 위치한 탑산사는 아래 문헌적 근거로 볼 때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와 부처님 진신사리가 들어온 곳이다.

문헌적 근거: 아육왕(阿育王)은 아도세왕(阿闍世王)이 세운 탑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다 내어 84,000개의 금은, 유리, 파려(波瓈)로 84,000개의 통과 병을 만들어 불탑을 세웠으니 중국에는 열아홉이고 우리나라에는 전라도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이 탑이 있어 영험한 일이 있었다. 아육왕이 탑을 세운 것이 려왕(厲王) 마흔 여섯 째 해인 무진년(BC833년/약2100년 전)이었다. (천관산기, 동선문과 대한민국 보물 제523호 釋譜詳節 廿三․四권 내용 중 요약발췌)

-한국공식기록원(http://www.ikri.kr/cms/dk_record/kri_view.php?ht_id=kri_01&no=240)

기원 전 3세기 경은 한반도의 격변의 시기였다.

한반도 북부에는 고조선의 후기로, 고조선 후기인 BC195년~BC188년에 위만 왕조(위만조선)가 들어섰으므로 그 위만조선 때로부터 1세기 전이고, 기원 전 108년에 한나라로부터 고조선의 위만왕조가 멸망했으므로, 위만왕조(고조선) 멸망 때부터 2세기 전이었다.

기원전 100여 년 무렵 북부에는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랴오둥 반도와 한반도 북부 지방에 한사군(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을 설치했으며, 남부에는 진한(辰韓), 변한, 마한의 삼한으로 정립되는 시기였다. 그 삼한이 정립되기 이전 남부에는 국가 혹은 국가 연맹체로서 진국(辰國)이 있었다. 진국은 기원전 4세기 경에서 기원전 107년 무렵까지 청동기 및 초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중남부, 특히 충청남도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국이 존치하던 때인 기원전 200년 경에 한반도 최남단인 천관산에 아육왕탑이 세워지며 부처의 사리가 그곳에 안치된 것이다.

왜 하필 천관산이었을까.

천관산은 아육탑 조성의 최적지였다

오늘날에야 농지정리며, 마을 등 취락의 입지 등으로 적잖은 고인돌이 유실되거나 하였을 것임에도 오늘날 천관산 일대에 고인돌 857기가 분포돼 있는데, 거의 유실이 없었을 당대엔 아마 천관산 일대 고인돌은 1000여 기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최남단으로 기온이 온화한 땅이었고 남해가 천관산 자락에 넘실거린 땅이었다.

무엇보다 남해안 연안에서 가장 많은 부족들, 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살고 있었다. 이른바 당대에도 삶의 경쟁력이 가장 우월했던 땅이 천관산 일대였다.

또 남해에 연한 천관산은 신비스러운 영산(靈山)으로 비쳤을 것이다.

‘정법(正法)의 왕’으로서 그 정법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며 마케도니아까지 서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던 아육왕이었다. 그러한 아육왕이 서역으로 불교 전파만 고집했을 리가 없다.

필히 동방으로도 눈을 돌렸을 것이고, 동방의 한 곳이 바로 한반도였으며, 한반도에서도 중북부의 금강산과 남부에서는 천관산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대 한반도 남부에는 인도 마우리 왕조의 강력한 통일왕국에 비하면 확실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미개국(未開國) 같은 처지였다. 그런데도 최남단 천관산 일대에는 강력한 부족들이 웅거하며 융성해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 즉 인구밀도가 높았던 곳이었다.

이런 연유로, 당대 아육왕의 사절들(승려)도 천관산을 중심으로 한 천관산 일대를 ‘정법(正法)을 전파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땅’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육왕탑을 조성하고 그 탑 안에 부처의 사리를 안치했을 것이다.

탑산사의 역사…여전히 침묵이다

기원 후 800년(신라 애장왕1), 통령(通靈)이 탑산사를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절의 북서쪽에 있던 아육왕탑(阿育王塔)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탑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 당대, 아육왕탑이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무너져 있었을 것이다. 하여 통영대사는 무너진 아육왕탑터 아래쪽에 탑산사를 개창했을 것이다.(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전만 해도 7칸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4칸의 시왕전(十王殿), 서쪽에 7칸의 공수청(公需廳) 및 향적각(香寂閣)이 있었으며, 그밖에 정방(正房) 3칸 등 크고 작은 방들을 갖춘 큰 절이었다. 또한 800근에 이르는 대종(大鐘) 등 수많은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침입하여 대종을 녹여 총포를 만들었는데, 그 기록은 작은 종의 용두(龍頭)에 새겨져 있다.

그 뒤 1745년(영조 22)·1747년·1748년의 세 차례에 걸친 화재로 거의 소실되어 작은 암자로 존립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이 암자마저 불탔으며, 보관하고 있던 종은 해남 대흥사(大興寺)로 옮겼으며, 1925년 소규모의 절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이 절에 있다가 대흥사로 옮겨진 종은 높이 79㎝, 입지름 43㎝인 고려 말의 작품으로, 현재 보물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관산의 불교 전성기 때 천관산에는 89 암자가 있었다. 탑산사는 89 암자를 이끌었던 으뜸 사찰이었다. 과거의 그 위용은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암자 터에 주춧돌이 여러 곳에 괴여 있고 주변에는 기왓 조각들도 널려 있다. 또 아육왕탑으로 알려진 바위와 의상대사 등 고승들이 수양한 터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산사는 갈수록 쇠락해가고 있다.

불국토였던 천관산의 위용이 제대로 드러날 날이 올 수 있을까?

한국기록원이 탑산사에 ‘부처의 사리가 최초로 전해진 곳’이라는 기록을 공식 인정했음에도 여전히 무관심이고 침묵이다.

역사의 침묵은 곧 사장(死藏)으로 이어진다. 하여 결국 설화로만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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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흥군 문화유적, 목포대학교 박물관, 1989.

2)석가모니의 생몰년도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주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불교에서는 부처의 탄생과 반열반을 기원전 624~ 544년으로 보고 있는데, 불교에서 사용하는 달력 체계인 불기가 석가모니가 탄생한 해가 아니라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든 해부터 계산하기 때문이다.

3)생몰 연대 불분명. 황제 재위 기간도 기원전 265~기원전 238년 재위설, 또는 기원전 273~기원전 232년 재위설도 있다.

4)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p.44

5)Will Durant, The Story of Civilization: Our Oriental Heritage, Part On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35), vol. 1, p.449

6)Latourette, Kenneth Scott (1975). A History of Christianity. p. 274

7)“아육왕이 탑을 세운 것이 려왕(厲王) 마흔 여섯 째 해인 무진년(BC833/2100년 전)이었다.”는 오식으로 판단된다. 아육왕에 대한 생몰연대는 기원전 304기원전 232, 3대황제 재위는 기원전 273~기원전 232년으로 추측되므로, 아육왕탑 건립은 아육왕의 생존 시기여야 함으로 기원 전 200여 년 전후로 추축된다.

8)당대 진국(辰國)에 대해 전문가들은, 삼한(三韓)의 각 부족 연맹체가 발생하기 이전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던 소국가 연맹체로 보거나 또는 어떤 하나의 뚜렷한 실체가 있는 국가가 아닌 관념의 영역으로, 또는 부족 연맹체로 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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