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古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天冠山記(8)’ - 신라 하대 천관산의 불교, “장보고와 해상왕국을 꿈꾸었다”
장흥의 古문학/산문2/정명국사 천인의 ‘天冠山記(8)’ - 신라 하대 천관산의 불교, “장보고와 해상왕국을 꿈꾸었다”
  • 김선욱
  • 승인 2022.04.06 1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대의 천관산 불교를 재현해 본다-
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위원
장보고와 함께 해상왕국을 꿈구었던 천관산 불교-사진은 천관사
보림사

<지난호에 이어>

장보고의 불교사상 기반은 천관사였다

◾“장보고의 불교사상 내지 불교신앙의 기반은 완도와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천관산 천관사였다”“신라 하대 천관사는 장보고의 선단과 연결돼 천관산 주변의 사찰을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천관산이 청해진의 본영이 자리했던 완도와 배후 지역이었던 강진만 주변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서‧남해를 오가는 해로상에 위치했던 천관산에는 당나라로부터 여러 사상적인 편린이 전해졌던 바, 도교 수련처인 곽동산, 불교 보살주처 신앙의 천관보살 상주처라는 모습이 반영됐다.것 이 때문에 천관산은 선도(仙道)와 불도를 닦으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명산으로 알려졌다”고 “신라와 당, 일본을 오가는 해성무역 활동에 종사했던 이들은 바다에서 풍량과 질병에 시달리며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잦았는데, 장보고는 이런 현실적 위험을 제거하고자 수련처로 알려진 천관산을 주목했다”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켜 신라 정부에 진압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찰기록도 멸실되거나 윤색됐을 것이다. 하지만 천관사로부터 비롯된 장보고의 불교사상과 신앙은 남해안 일대의 선종 사찰뿐 아니라 고려 초의 교종 및 선종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장일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천관사와 장보고 대사’/2013.09.27.-‘천관산 재조명 학술대회’

◾“천관산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천관사가 고대 장흥의 중심지였던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창건 기부터 재지(在地) 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 42대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837년 화를 피해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의탁했는데, 이때 홍진대사가 적극 조력했다. 이후 김우징이 45대 신무왕에 즉위하고 그 아들 문성왕과 헌안왕이 그 인연으로 천관사 불사를 일으켜 천관사 삼층석탑과 석등, 옥룡사지 석조여래좌상 등의 결과물로 남았다”

-최인선 교수(순천대 사학과)-‘천관사의 유적과 유물’/’/2013.09.27.-‘천관산 재조명 학술대회’

유리도가니 출토-당시 자방 세력과 연대성 커

2013년 8월 천관사 유적발굴 현장에서 8세기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 나한상, 전남지역에선 최초의 남북국시대 유물인 ‘유리 도가니’가 출토됐다.

특히 여러 유물 중 유리 도가니는 창건 당시 왕실을 비롯해 청해진 등과 연계되었던 천관사의 왕성했던 사세를 반영해주는 유물이라는 점, 또 경내에서 수습한 청자퇴화문말(馬) 역시 천관사가 천관산에서 거행했던 국가적 제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당대 천관사의 사세와 위상을 증언하고도 남았다.

이제 당대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자.

천관보살이 항상 머물러 설법하는 곳

당대 지제산에는 옛적부터 보살들이 상주하였다. 당시에도 천관보살이 그의 권속 1000보살과 함께 있으면서 법을 연설하고 있었다.

천관산에는 탑산사와 천관사가 9세기를 전후해 건립된다.

“통영화상이 탑의 동쪽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지금의 탑산사이다. 대사가 일찍이 꿈을 꾸니 북쪽 산허리에서 땅이 솟아올랐다. 가지고 있는 석장(錫杖)이 날아서 산봉우리를 지나 북쪽 산허리에 이르러 꽂히었다. 석장이 꽂혔던 곳이라고 어렴풋이 생각되는 곳에 덤불을 베어내고 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천관사가 그것이다.”

천관보살은 보살도와 보살행의 자기수행 및 중생 교화에 깊은 관심을 지닌 보살이다. 당대 신라에서는 전국적으로 천관보살 신앙을 유일하게 수용한 곳이 천관산이었다.

이러한 천관산의 불교 중흥은 천관산 일대의 세력이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천관산의 불교 중흥으로 일어난 불교세력들은 인근의 토호세력들과 연계되고 자연스럽게 장보고와 청해진의 배후지가 되면서 불교 세까지 합쳐진 지방 세력으로 큰 규모의 천관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말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권력 싸움에 밀려 천관사의 홍진대사와 장보고에게 몸을 위탁했던 일도 있었다.

또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거나 돌아오는 많은 스님들이 장보고 선단과 천관사의 덕을 보았다.

장보고 신앙의 기반은 천관산

불교를 크게 숭상했던 장보고는 중국 적산에 법화사라는 사찰을 세워 재당(在堂) 신라인들의 결속을 다지기도 했고 완도나 제주 등에도 법화사를 세웠는데 장보고가 세운 사찰들이 자연스럽게 국제교역의 통로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정체된 불교를 새롭게 개혁했던 선(禪)사상은 장보고의 눈에 띈 새로운 아이콘이었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 동리산문의 혜철, 가지산문의 체징, 사자산문의 도윤 등이 당에서 귀국하여 서남해안 일대에서 선문(禪門)을 열고 활동했던 것은 불교사상으로 정국토(淨國土) 실현을 추진하였던 장보고의 음으로 양으로 관련이 있었다.

또 신무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청해진의 장보고와 천관사의 홍진대사에게 몸을 의탁한 일이 있을 만큼 천관사는 신라 왕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강진 백련사의 제2세주 정명국사 천인(靜明國師 天因,1205~1248)은 ‘천관산기(天冠山記)(1240)에서 다음과 같은 신비스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느날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몸을 숨겼다. 그와 밀접하게 지내던 화엄 홍진대사(洪震大師)도 급하게 천관사에 달려왔다. 홍진은 밤낮으로 예를 다하여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러 신중이 감동하여 절의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다. 지금의 신중암(神衆巖)이 그것이다.”

화엄신중으로 표현된 신중암은 정상의 기암괴석을 지칭한 것이다.

금강역사와 용신(龍神)이다. 그렇다면 홍진이 감복시킨 화엄신중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바로 천관사를 구심점으로 한 천관산일대의 세력이었다.

천관사 화엄신중-가담한 천관산 세력

836 12월 흥덕왕의 사후에 벌어진 왕위계승 쟁탈전에서 김우징의 부친 균정이 패배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우징은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민애왕의 찬탈 소식을 들은 우징은 만약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때 장보고는 천관산 세력을 포함한 군사 5천 명을 동원하여 민애왕을 축출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하였다. 신하들은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데 반대하였다. 장보고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염장을 보내어 장보고를 암살하였다.(문성왕 3년, 841)

장보고를 살해한 공으로 염장은 제6관등인 아찬을 거쳐 무주의 차관직인 별가에 임명되었다. 천인이 신비롭게 묘사했던 천관사의 화엄신중은 곧 장보고에 편입된 장흥의 해상세력이었다. 홍진대사는 위기에 빠진 김우징을 위하여 장보고의 천관사 세력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의 암살과 청해진의 혁파로 천관산의 해상왕국의 꿈도 무너지고 말았다.

장보고 암살로 천관산 세력 와해되다.

장보고 암살은 장흥지역, 천관산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장보고에 협력하여 신무왕의 즉위에 기여했던 천관사 세력의 타격은 더욱 컸다. 장보고를 살해한 염장은 무주의 차관직에 임명되어 청해진의 잔여세력을 샅샅이 색출하였다. 장보고 잔존세력이 일본에 망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본에까지 부하를 파견하기도 했다. 가혹한 탄압과 끈질긴 저항이 1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년)에 기어이 청해진이 폐지되고, 청해진 잔여 세력 역시 벽골군(현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고 말았다.

이후 신라 조정의 당면과제는 장흥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고 천관사를 대체할 신앙의 구심점을 다시 찾는 일이었다.

이때 신라 조정이 주목한 곳은 장흥 내륙의 가지산이었다. 가지산에는 청해진이 폐지된 지 8년이 지난 759년(경덕왕 9년)에 원표(元表)스님이 지은 법당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원표스님은 인도로 가서 공부하던 인도의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중국에 들어와서 인도의 가지산과 형태가 닮은 산에다 절을 세워 역시 ‘가지산 보림사’로 명명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삼한의 먼 곳으로부터 신비한 기운이 비쳐와 그 기운 따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그 기운이 태동한 곳에 머물고 보니 그 산이 인도, 중국의 가지산과 형상이 같아 이곳에 절터를 마련하고 100칸에 이르는 법당을 지었다. 이때가 759년(경덕왕 18년)이었다.

보림사 9산 선문의 중심도량 돼

원표는 당시 경덕왕의 개혁정치를 지원했고, 이에 경덕왕은 왕명을 내려 사찰의 구역을 확정해주고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주는 장생표주(長栍標柱)를 세우게 했다.

원표는 ‘화엄경 80권’을 짊어지고 곽동산의 천관보살을 예배드릴 정도로 화엄신앙 숭배자였으며, 천관보살신앙을 수입한 승려로서 지제산 천관보살 신앙 유포와 깊은 인연이 있어 당시 가지산의 법당 개창은 화엄종 사찰이었다.

원표로부터 1세기가 지난 859년(현안왕 3년),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이 왕명에 의해 가지산사로 옮겨 가지산문을 개산하면서 비로소 가지산문은 화엄종 사찰에서 가지산 선문의 중심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 조정에 적극 협조적이었던 원표가 세운 당시의 가지산사는 천관산의 천관사 등을 충분히 대체할 만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신라 조정은 도의선사의 법통을 잇고 무주에서 선풍(禪風)을 날리던 선종의 체징(體澄, 804~880)을 가지산사에 주석시키며, 가지산사를 9산 선문으로 열게 한다는 방침으로 대규모 중창불사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주 장사현의 부수 김언경은 철 2,500근을 희사하여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였다. 진골 귀족들도 덩달아 엄청난 재물 등을 헌납하였다. 장보고의 해상 세력, 천관산 세력과 대립했던 무주 세력과 진골 귀족들이 대거 가지산사 중창 불사에 가담한 것이다. 870년(경문왕 10년)에는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남탑과 북탑이 건립되면서 가비산문은 왕실의 원찰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선종산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은 이렇게 태동된 것이다.

880년(헌강왕 6년)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국왕은 시호를 보조(寶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가지산사는 보림사로 개명되며 9산 선문의 효시가 되는 가시산문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 보림사 경내 보조선사 창성탑이 당시 건립된 체징의 부도(浮屠)이다. 부도는 높이가 446cm에 달하는 팔각원당형 양식으로 9세기 신라조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체징의 위상과 보림사의 위세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편 보림사는 19세기 때는 지속적인 불사로 건물 59개소가 등잘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고, 6.25때는 국보 240호였던 대웅전을 비롯하여 건물 대부분과 암자 10여 동이 불타버렸으며 이후 대웅보존, 대적광전 등 많은 부분을 복원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