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장흥일기(6) 선정비를 통해 읽어 보는 향촌사회사(하)
김희태의 장흥일기(6) 선정비를 통해 읽어 보는 향촌사회사(하)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4.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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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예양리 석대 모퉁이 암각 선정비(명)
김희태/전 전라남도문화재 전문위원
김희태/전 전라남도문화재 전문위원

<지난 호에서 계속>

장흥 부사 황간과 위백규 「봉사(封事)」의 조운(漕運)

이때의 장흥 세선(稅船)의 고의 파손에 대한 사건은 그 뒤로도 사례로 여겼던 것 같다. 8년이 지난 1776년(정조 즉위년) 12월 21일(무오) 임금이 하직하는 수령을 존현각(尊賢閣)에서 소견하였는데 장흥 부사 황간(黃榦, 1713~?)에게는 특별히 “장흥은 세선(稅船)이 고을의 가장 큰 폐단이 되고 있다고 하니, 내려간 뒤에 유념하여 정비하도록 하라.”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황간은 1776년 12월에 장흥부사로 도임하여 1778년 12월까지 재임했다. 황부사는 재임하면서 조운을 포함하여 제도의 개혁안에 대해 의견을 수렴했던 것 같다. 존재 위백규의 『존재집』제3권에 「봉사(封事)」가 실려 있다. ‘대사간 황간을 대신하여 지음(代黃司諫榦])이라는 주가 있다. 황간 부사의 요청에 따라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봉사(封事)」는 위백규의 사회개선책으로 잘 알려진 「만언봉사(萬言封事)」와는 다른 글이다.

위존재는 「봉사(封事)」에서 열 번째 폐단으로 조운(漕運)을 든다. 우리나라 해상운송로는 바람이나 조류의 저항을 받는 항구나 험난한 나루가 있기는 하지만 난파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근래 절반가까이 난파되었다고 보고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짐을 실을 때 감관이나 색리에게, 도착하여 참고담당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야 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난파로 보고하고 빼돌린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고혈(膏血) 같은 곡식을 탈탈 털어서 바칠 수밖에 없다. 파선미(破船米)ㆍ갱용미(更舂米)ㆍ축미(縮米)ㆍ가미(加米)를 다시 여름 6월 보릿고개의 참혹한 때 급하게 독촉하니 대민(大民)은 집안의 전장(田莊)을 전당 잡히거나 팔고, 소민(小民)은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으로 집안과 이웃의 재산까지 다 탕진한다는 것이다. 경강 뱃사람은 짐을 실을 때 아주 큰 말(斗子)로 되질을 하면서, 섬마다 쌀 한 말을 훔쳐 내고 물을 한 말 부어 넣는다. 이 때문에 고의로 난파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고의로 난파시킨 이유가 열 조목이나 있고, 거듭 징수하는 이유가 여섯 조목이나 있다고 하였다. 이미 『정현신보』에서 말한바 있는 폐단이다. 고의 파손 몇 가지를 들어 보자.

뱃사람(船人)은 지방 수령이 사사로이 물건을 싣는 일과 창병목(槍柄木)ㆍ청대죽(靑大竹) 등의 물품을 더 싣는 일을 피하고자 향소(鄕所)와 선대장(船代將)에게 뇌물로 격군의 식량을 소비한다. 출항한 뒤에 포장한 세미(稅米)를 훔쳐 먹고, 술을 빚어 마시고, 생선을 잡아 먹으면서 소비한다. 10여 일이 지나 상납할 세미의 양이 부족하니 남아 있는 쌀을 훔쳐 나누어 가지고 빈 가마니만 배에 실어 놓은 채 고의로 파선시킨다.

경강(京江) 뱃사람들은 모두 권세가의 서찰로써 바닷가 고을의 관장(官長)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여 세미를 경쟁적으로 싣는다. 그러나 이미 배가 출항한 뒤에 혹 다른 도(道)에 가지고 가서 팔기도 하고 혹 도중에 훔쳐 갖기도 하고서, 파선되었다고 보고한 뒤에 또 권세가에 의지하여 죄를 모면할 수 있으니, 고의로 파선시킨다 등등.

전라도 관찰사 홍낙인 불망비

관찰사 홍락인(1729~1777))은 1767년(영조 43년) 6월 5일(정유)에 전라감사로 제수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1768년(영조 44년) 4월 9일(병인)에 홍낙인이 전라도관찰사를 해임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체차를 허락하였다. 6월 13일(기사)에 우부승지가 된다. 1767년 6월부터 1768년 6월까지 열달 정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의 관찰사는 재임 하면서 군현 순시를 하게 되는데, 장흥도호부에도 들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몇몇 사료를 뒤적여도 장흥과 연관되는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홍락인의 문집 『안와유고(安窩遺稿)』에는 전라도 관찰사 재임 때의 지은 글로 「청파 호남대선 겸 부 사간소(請罷湖南隊船兼附私懇疏」, 「전주 패서문 기(全州沛西門記)」「전주 풍남문 상량문(全州豐南門上樑文)」이 보인다.

「청파 호남대선 겸 부 사간소」는 조운선을 편대(編隊)로 만든 폐단을 아뢰면서 옛사례[舊例]에 따를 것을 청한 것으로, 작대법(作隊法)의 현황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호남 지방의 세(稅)와 대동미(大同米)를 한꺼번에 조운(漕運)하지 말고 종전대로 환원할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당초 뱃사람들의 부정과 고의적인 선박 파괴 등을 막기 위해 선혜청에서 그에 대한 제도를 만들었으나 선가(船價)와 잡비 등의 부담으로 그 지방 백성들의 피해가 심하다고 지적, 이와 같이 건의한 것이다.

글 가운데 전라도 연해 33읍[本道沿海三十三邑]이라 하여 전라도 56관 가운데 바다를 끼고 있는 연해 33관에 해당하는 조운의 피해에 대한 개선을 건의하고 있다. 연해 고을인 장흥도호부도 해당된다. 조운선 편대에 대한 개선책이다. 바로 뒤이어 장흥 세선의 고의 파손 사건이 일어났다. 그만큼 세선-조운은 당시 사회에서 개선해야할 급선무였던 것이다.

「전주 패서문 기」는 소실된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1768년에 복원하고 ‘패서(沛西)’와 ‘풍남(豐南)’으로 개호(改號)한 내력을 기록한 글이다. 그리고 풍남문의 상량문도 짓는다.

홍낙인(洪樂仁)의 자는 대유(大囿), 호는 안와(安窩)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홍봉한(洪鳳漢)의 아들이다.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인 헌경왕후(獻敬王后, 惠慶宮)의 오빠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도승지, 지돈녕부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1985년에 조사한 석대모퉁이의 관찰사 불망비, 부사와 찰방의 암각 선정비를 3기를 다시 살펴보면서 자료를 엮어 보았다. 이동태부사 선정비는 비를 세울만한 '선정'의 행적 기록은 아직까지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선(稅船)의 고의 파손과 관련하여 찬배를 당하는데 현지에는 석대모퉁이에 암각 선정비(명)를 새긴다. 관찰사 홍낙인은 장흥 관련 행적을 아직은 확인할 수 없지만 순찰시 장흥을 들렸을 것이다. 불망비라 하여 새긴다. 홍낙인은 전주 풍남문을 새로 세운다. 호남 연해읍의 조운에 대한 폐단을 건의 하는 글을 짓기도 한다. 벽사역 찰방 김세위에 대해서는 자료를 더 찾아야 할 것 같다.

장흥에는 조선~대한제국기 선정비가 장흥읍 교촌리 장흥 향교 앞에 19기, 원도리 옛 교도소 앞에 16기. 남산공원 영회당 곁에 2기, 예양리 석대모퉁이에 3기(암각)이 있다.

*장흥향교 앞 : 부사 - 李壽昌(1651), 金憙(1628), 沈槽(1728), 黃幹(1783), 李亨在(1841), 申在翼(1841), 朴顯圭(1848), 趙然照(1852), 金箕哲(1852), 李鶴來(1882), 宋綺老(1885), 閔泳稷(1888), 李容泰(1893), 李壁

*군수 - 金豈圭, 李熹翼(1902), 李熹翼(1904), 李熹翼(1904), 姜永瑞(1902),

원도리 옛 교도소앞

*관찰사 - 李鎬俊(1871) 순찰사 - 元斗杓(1642)

*부사 - 尹守黙(1788), 崔來吉, 韓致肇(1871)

*찰방 - 李英望(1677), 尹大Ο, 李寅述(1871), 成宗鎬(1871), 權有善(壬午), 韓五章, 李明倫, 元在城(1951)

*첨사 - 周贊佑(1892) 오위장 - 房炯載(庚午), 석대모퉁이(암각)

*관찰사 - 洪樂仁(1768) 부사 - 李東泰(1769) 찰방 - 金世諱, 영회당 곁

*군수 - 金宅圭(1899) 찰방 - 金日遠(1901)

선정비- 지역민이 지방관 칭송하는 비

선정비는 주로 지방관의 선정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청덕비(淸德碑), 불망비(不忘碑), 거사비(去思碑)라고도 하였다. 지방관이라면 누구든 수령칠사(守令七事) 지키고 선정을 하는 것이 임무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지역민들은 지방관을 칭송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세우는 목적은 부역(賦役)과 조세(租稅)를 줄여주거나 흥학(興學), 재해 방지, 농지 확보 등 특정한 업적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선정비 금지령이나 철거령이 내려지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선정비를 세울 때에는 유림과 각 면(面) 약정(約正)들이 논의하여 감관(監官)이나 도정(都監)을 뽑는다. 그리고 경비[立碑錢] 마련, 석수 선정, 비문 내용 등을 정한다. 향임과 지방관들이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선정비는 지방관이나 찰방 등에 대한 행적도 알 수 있지만 제반 준비과정에 대한 자료가 확보된다면 제도사와 향촌사회사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역대 장흥부의 지방관이나 벽사역의 찰방에 대한 더 많은 자료가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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