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長興府) 탄생
장흥고문학-기록문학(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長興府) 탄생
  • 김선욱
  • 승인 2022.04.2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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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고려조, 훈요10조로 호남인 관직 진출 막아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전라도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 받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부터였다. 신라가 백제의 유민(流民)을 푸대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백제 고토(古土)에 대한 소외는 신라에 이어 고려로 이어지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고려 창건 왕 왕건은 백제의 옛 영화를 회복하고자 일어선 후백제 견훤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진주(武珍州)를 평정하고, 이곳에 대한 회유책을 쓰면서 영암 출신으로 통일신라 후기 승려인 도선(道詵,827∼898)을 국사로 받아들여 국정을 자문받기도 했지만, 이곳 사람들의 저항정신이 끝내 맘에 걸렸는지 죽기 전에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직접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렸다. 태조가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그 유명한 '훈요10조(訓要十條)'라는 유훈(遺訓)을 통해 전라도민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게 된다.

즉 “전라도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서 왕가나 왕의 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권세를 잡으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거나 백제 통합의 원망을 품고서 임금을 범하기도 하고 난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또 왕가에 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어지럽혀서 재앙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양민일지라도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정사(政事)를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훈요였다.

태조의 사상배경과 정책의 요체가 집약된 이 훈요십조는 왕실 가전(家傳)의 심법(心法)으로서 태조가 그의 후손에게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공개될 유훈은 아니었지만, 그 내용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에 널리 알려져 후일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특히 풍수를 이용하여 지금의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에 사는 사람들의 벼슬길을 막으려는 훈요십조로 인해, 적어도 고려 중기 중앙집권적인 관료체계가 흔들리기 전까지 이 유훈이 제대로 지켜졌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고려중기 이후 장흥임씨 중앙무대 본격 진출

이처럼 전라도가 중앙 정부로부터 철저히 소외 받던 시대이기에 '전라도는 인물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때, 전라도에서도 최남단 장흥 고을(당시 장흥 지역에는 정안현 등 4개의 현이 있었다)에서 전라도 제일가는 명문(名門)이 탄생, 태조의 훈요10조를 무색하게 만든다. 장흥 임씨(長興 任氏) 곧 정안 임씨(定安任氏)가 바로 그 명문의 주역이다.

정안임씨는 당시 ‘경벌(慶閥 : 축복 받은 가문)’로 칭송 받았고, 세간에서조차 소위 ‘잠영세족(簪纓世族 : 높은 벼슬아치들의 세족)’으로 불리우며 고려 중기부터 왕비 1인과 시중(侍中 : 지금의 수상)을 비롯하여 판서·평장사 등 2품직 이상의 재상(宰相)만 10명 이상 배출한 귀족가문으로, 전라도에서도 첫째가는 명문으로 그 위명을 떨쳤다. 고려시대의 전라도 인맥 중에서 한낱 변방의 한 토반(土班)에 지나지 않았을 장흥임씨가 배출한 인물군은 한 마디로 ‘거대한 벌열(閥閱)’이라 할 만큼 가히 휘황한 성좌처럼 우뚝 솟아있을 정도였다.

충선왕(忠宣王:1275∼1325,고려 제26대 왕)은 즉위년(1308년) 11월 신미일(辛未日)에 교서를 내리면서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누대 공신(累代功臣)·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15가문을 열거하면서 정안임씨를 세 번째 가문으로 열거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만약 종친이 동성과 혼인하는 경우 성지(聖旨)를 위반한 것으로 죄를 논할 것이니 마땅히 대대로 재상을 지낸 가문의 딸과 혼인하여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종실의 딸과 혼인하라. 만약 가세(家勢)가 비루하고 한미(寒微)하다면 이 제한 규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라왕손 김혼(金琿)의 가문(경주김씨)으로 순경태후(順敬太后)와 큰 집, 작은 집 가문이며, 언양 김 씨(彦陽 金氏) 일족, 정안 임태후(定安 任太后) 일족, 경원 이태후(慶源 李太后 : 원종의 비로 충렬왕의 모친)와 안산 김태후(安山 金太后), 철원최 씨(鐵原崔氏), 해주 최 씨(海州崔氏), 공암허 씨(孔岩許氏), 평강채 씨(平康蔡氏), 청주이 씨(淸州 李氏), 당성홍 씨(唐城洪氏), 황려민 씨(黃驪閔氏), 횡천조 씨(橫川趙氏), 파평윤 씨(坡平尹氏), 평양조 씨(平壤 趙氏)는 모두 누대의 공신과 재상 가문이니 대대로 혼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종실의 딸과 혼인하고 여자는 종실의 아내가 될 수 있다. 문무양반(文武兩班) 가문은 동성과 혼인할 수 없으며, 외가(外家) 사촌에게는 구혼하는 것을 허락하노라.”

이로써 정안임 씨 곧 장흥임 씨는 경주김 씨, 언양김 씨와 함께 고려중기 이후에 굴지의 3대 명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훈요 10조’가 고수되어왔던 고려시대에 전라도 최남단이며 최변방인 장흥지역에서 이처럼 한 가문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로 받아들여진다.

장흥임 씨의 중앙무대 진출은 고려 중기 문·순·선·헌·숙·예종 등 6조에 걸친 명신으로 평장사를 지낸 임의(任懿,1041∼1117)로부터 시작, 임의의 아들로 모두 재상반열에 오른 임원숙(任元淑)·임원후(任元厚)·임원준(任元濬) 그리고 장흥임씨 중앙 진출의 최고봉이 된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任氏), 임원후의 아들로 평장사를 지낸 임유(任濡), 임유의 아들로 모두 현달한 임경숙(任景肅)·임경겸(任景謙)·임효순(任孝順)·임경순(任景恂), 임유의 손자이자 임경겸의 아들로 찬성사에 오른 임익(任翊) 등 한결같이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 고려중기 이후 장흥임씨를 대명문으로서 반석을 굳히게 했다.

정안사 사당 : 장흥임씨(長興任氏)의 시조 임호(任顥), 그의 아들 정경공 임의(任懿), 손자 문숙공 임원숙(任元淑), 문충공 임원후(任元厚), 문헌공 임원준(任元濬) 등 고려조에 공헌한 장흥임씨 선조들의 위패가 봉안된 사우.

‘장흥부'의 탄생- 공예태후 임씨로 비롯돼

유사 이래의 장흥의 역사는 삼한의 마한(馬韓)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장흥지역은 마한 54국 중에서 강진지역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계국(拘溪國-이병도 설)에 속해 있었거나, 또는 건마국(乾馬國-천관우 설)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흥 지역은 삼국시대 백제령에 속하면서 지역의 명칭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다.

즉 장흥 일대의 지명은 계천(季川-장평·장동면과 유치 동북부 일대)·마사량(馬斯良-지금의 보성군 회천면과 안양면 일대)·고마미지(古馬彌知-장흥읍과 유치 남부 일대, 용산·안양·강진군 군동면 일대)·오차현(烏次縣-관산읍, 대덕읍 용산면 일부와 회진 일대) 등 4현으로 나오는데, 장흥지역을 사분(四分)하던 이들 네 현은 모두 지금의 장성지역에 있었던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통일신라 때 오차현은 오아현(烏兒縣), 고마미지현은 마읍현(馬邑懸)으로, 계천현은 계수현(季水懸)으로, 마사량현은 대노현(代勞縣)으로 바뀌면서 복홀군(伏忽郡)이었다가 지금의 보성군(寶城郡)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장흥지방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적시되는 않지만, 교종(敎宗)의 요람이었던 천관산 일대의 사찰들과 선종(禪宗)의 개창지인 보림사 등의 창건 과정에서 나타나듯, 당시 장흥지방에는 상당한 세력의 호족이나 토호족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려에 오면, 다시 오아현은 정안현(定安縣), 마읍현은 수령현(遂寧縣)으로 바뀌면서 영암군에 속하게 되고, 계수현은 장택현(長澤縣)으로 개칭되고 대노현은 회령현(會寧縣)으로 바뀌면서 보성군에 속하게 된다. 그러니까, 장흥지역은 지금의 장평·장동·유치면, 그리고 안양면 일부와 보성군의 회령면은 보성군으로 그리고 관산·대덕읍, 용산면과 장흥읍, 부산면 등은 영암군으로 속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983년(성종2년)에는 현재의 관산읍 지역에 있었던 정안현은 ‘정주(定州)’와 ‘관산(冠山)’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짐작컨대, 정주는 정안현에서 관산(冠山)은 천관산(天冠山)에서 따온 말로 유추된다.

지금의 '장흥(長興)'이라는 지명이 ‘관산’에 이어 역사에 기록된 것은 그로부터 150여년 만인 인종 때부터이다. 정안현이 장흥으로 개칭되어 부(府)로 승격되면서 영암군과 보성군에서 떨어져 나와 수령현(遂寧縣, 지금의 안양·부산면과 장흥읍)과 탐진현(耽津懸, 지금의 강진군 일원) 그리고 회령현(會寧縣, 지금의 보성군 회령면), 장택현(長澤縣, 지금의 장동·장평·유치면)을 속현으로 두게 된다. 한 마디로 이때야 비로소 장흥군의 개군(開郡)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도 군(郡)보다 한 단계 상위 행정단위인 부(府)라는 다소 파격적인 ‘장흥부(長興府)’가 탄생된 것이다.

장흥이 이렇게 현(縣)에서 부(府)로 격상되면서 새로운 이름인 '장흥(長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인종의 비(妃)인 공예태후(恭睿太后,1109∼1183)로 말미암은 것이다.

장흥의 관산 옥당마을 출신의 임씨가 인종의 비로 간택되어 인종의 왕비가 되어 5형제(5형제 중 3형제가 차례로 제18대 의종, 제19대 명종, 제20대 신종으로 왕위에 올랐다)와 4공주를 낳았는데, 조정에서는 그러한 태후의 덕을 흠모하여 공예태후 고향을 '장흥'이라고 명명하고 현에서 부로 승격한 것이다.

그 후 인종 21년 1143년에는 고흥군의 두원현(豆原縣)이 장흥부에 편입되고, 고려 말인 1265년(원종6년)에는 장흥부와 종전의 속현들을 관장하는 부의 상위 지방관청인 목(牧)으로 승격되어 회주목(懷州牧)이 되면서 나주·광주와 함께 45년간 목(牧)으로 지속되다가 다시 1310년(충선왕3년) 때 장흥부로 격하된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 왜구 침입 등으로 한두 번의 부침은 거듭했지만, 1120년 전후에 부로 승격된 이래 1895년 지방관제의 개정으로 장흥군이 되기 전까지 장흥부는 770년간을 전라도 남부권의 중심적인 행정을 도맡으며 완도·강진의 일부와 보성군의 웅치‧회령면 등을 관활했다.

지정학적으로 장흥부 독립‧승격- "파격적"

이처럼 당초 당시 대군(大郡)으로 성장한 영암군과 보성군에 속해 있었던 장흥지역은 고려 인종 때 부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장흥지역과 보성군 지역의 웅치(熊峙)‧천포현(泉布縣), 탐진강·남해안에 연해있는 강진 남부의 탐진현(耽津縣) 그리고 내덕도(來德島)‧산일도(山日島)‧평일도(平日島)‧금당도(金塘島) 등 완도군 일부를 거느린 서남부의 중추고을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장흥임씨의 급성장과 임씨의 왕비 책봉, 장흥부의 승격은 우리 장흥군으로서는 몇 가지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사건들이라 할 수 있었다.

12세기 초, 고려 중기 당시의 한반도 정세를 보면, 영산강 유역의 영암·나주와 서해안 연안의 영광지방, 보성군이 급성장한다. 이는 영산강·보성강‧서남해안을 낀 고대 해로(海路)의 중요성이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 과정에서 중요시되었던 탓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 중기에 장흥부 못지않게 대군으로 성장한 보성군의 경우, 장흥 지역의 회령·장택현을 포함, 보성강 유역의 9개의 현(장동복·복성·조양·남양·태강·두원·옥과현)을 거느린 대군(大郡)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보성군의 성장세는 보성간·득량만·남해안으로 연결되는 해로의 지정학적인 위치의 장점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상황에서 결국 장흥지역은 지금의 보성·고흥·화순 지역을 관활하던 보성군과 강진·해남·영암지역을 관할하던 영암군에 각각 분속되어 있었으며, 아울러 동북부 지역에는 다섯 개의 군과 11개 현을 거느린 전남지방의 주목(主牧)인 나주목과 인접해 있었다.

이러한 지방 세력권의 분할 형성은 철저한 지정학적인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고려 조정의 장흥군의 부(府)의 승격은 아주 인위적이고 파격적인 조치였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떤 큰 외침이나 전국적인 행정개편으로 인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라도 남부에서 대군으로 성장한 영암군이나 보성군보다 세가 큰 지사부(知司府)로 승격된 새로운 장흥부가 하루아침에 생겨났던 것이다.

고려 때 전라도에서 남부권역에는 장흥부가 동부권역에는 순천부가 있었는데, 순천부도 장흥부보다 150여 년 뒤늦은 1309년(충선왕 1년)에야 이전 승평군에서 승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310년에 순천부로 강등되어 부사고을로서 조선조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대에 장흥부 승격은 파격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장흥부 승격은 장흥임씨의 성세(盛勢)를 배경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때 장흥군이 영암·보성군으로부터 독립되어 ‘장흥부’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면 지금도 아마 장흥지역은 여전히 양분된 채 영암군과 보성군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당시 장흥군의 영암과 보성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부의 승격은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사》 열전과 장흥 사람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의 대표적인 사서이다.

고려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관찬사서인 《고려사》는 총 139권 75책으로 편찬된 사서이고, 《고려사》의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는 총 35권 35책으로 편찬돼 있다.

고려시대 역사 연구의 기본 자료인 《고려사》는 왕조 즉 세가 중심의 기록 외에 제신(諸臣)들의 일대기 및 업적 등 이른바 제신의 전기(傳記)를 다룬 열전(列傳) 50권이 있다. 이 열전 편에는 후비(后妃), 왕실, 제신(諸臣) 등 고려의 인물 4백여 명의 인물들이 등재돼 있다. 이중 제신은 모두 339명이고, 이중 장흥 출신 제신은 모두 10여 명에 이른다. 후비(后妃) 편의 공예태후 열전까지 포함하면 고려사 열전에 소개된 장흥인 전기물은 11편에 이른다.

열전 후비(后妃) 편의 ‘인종 후비 공예태후 임씨’와 임의(任懿), 임원후(任元厚), 임극충(任克忠), 임극정(任克正), 임보(任溥), 임유(任濡), 임익(任翊), 임항(任沆)과, 《동문선》에 출전되는 임원준(任元濬)과 임경숙(任景肅) 등 11명 그리고 장흥위 씨의 대표적인 인물 위계정(魏繼廷) 그리고 정세운(鄭世雲) 등 13명이 그 주인공들이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이들의 전기 내용은 순수문학으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만큼 현달한 인물들이고, 이들의 소개가 사서(史書)로서 기록이 아닌 일종의 전기물이어서 이들을 ‘장흥 고문학’의 ‘기록문학’ 편으로 분류해 소개하고자 한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장흥인 12명 중 위계정, 정세운을 제외하면 모두 장흥임씨 인물들이다.

이들 열전의 장흥임씨 인물의 중심 축은 공예태후이다.

공예태후를 기점으로 웃대에 태후의 조부인 임의(任懿), 부친인 임원후(任元厚), 태후 당숙으로 《동문선》에 출전되는 임원준(任元濬), 임원후의 장남‧차남‧삼남인 임극충(任克忠)‧임극정(任克正)‧임유(任濡), 임원후의 5남 임항(任沆) 등 7명이 공예태후와 조부, 부친, 당숙, 자매간이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당대 조정에서 현달한 인물들도 부지기수다.

①태후 당숙으로 고려 예종(睿宗) 때 예부상서(禮部尙書)·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등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던 임원숙(任元淑) ② 태후와 자매간으로 시전중감(試殿中監), 전중감(殿重監) 3품직에 올랐던 임충빈(任忠贇) ③ 태후의 동생으로 명종 때 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고 이부상서·한림학사(吏部尙書翰林學士)에 추증(追贈)되었던 임박(任薄) ④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 벼슬) 임유(任濡)의 아들로, 1227년 수찬관(修撰官)으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244년 좌복야(左僕射; 尙書省의 正二品 벼슬)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대학사·판이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로 치사(致仕)되었던 임경숙(任景肅) ⑤ 공부상서(工部尙書) 임극정(任克正)의 손자로 1189년 황려(黃驪; 驪州)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병역(病疫)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救濟)했으며 후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겸삼사사(兼三司使)에 올랐던 임익순(任益淳) 등이 장흥임 씨를 빛내는 인물들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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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高麗史(세가>권제2>太祖 26>4), 동사강목6: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公州)의 금강(錦江) 바깥쪽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배역(背逆)으로 뻗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州郡)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王侯)나 외척(外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사를 잡게 되면,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 일찍이 관청[官寺]에 예속된 노비(奴婢)와 진()()의 잡척(雜尺)이 권세가에게 투탁(投託)하여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나 궁원(宮院)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良民)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癸卯 二十六年 夏四月 御內殿, 召大匡朴述希, 親授訓要,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㗸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2) 고려사(33>世家 卷 第33>忠宣王 復位年 11-1308- : 自今, 若宗親娶同姓者, 以違背聖旨論, 宜娶累世宰相之女爲室, 宰相之男, 可聽娶宗世之女. 若家世卑微, 不在此限. 新羅王孫金琿一家, 亦爲順敬太后叔伯之宗, 彦陽金氏一宗, 定安任太后一宗, 慶源李太后·安山金太后·鐵原崔氏·海州崔氏·孔岩許氏·平康蔡氏·淸州李氏·唐城洪氏·黃驪閔氏·橫川趙氏·坡平尹氏·平壤趙氏並累代功臣宰相之宗, 可世爲婚媾, 男尙宗女, 女爲宗妃. 文武兩班之家, 不得娶同姓, 外家四寸, 亦聽求婚.

3) 高麗史(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37>장흥도호부) 고려 때에 정안(定安)으로 영암군(靈巖郡)에 예속시켰고, 인종(仁宗) 때에 공예태후(恭睿太后 인종 왕비)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로 승격시켰다. 高麗改定安屬靈巖郡仁宗以恭睿太后任氏之鄕改今名陞爲府

4) 12명의 제신(諸臣) 중 위계정과 정세운은 각각 시문학과 산문문학 편에 그 열전이 소개됐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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