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下)
장흥고문학-기록문학(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下)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5.1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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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태후 길조 4회 기록, 태후의 숙덕·인품, 당대 민심 반영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지난호에 이어>

공예태후 외가(外家)-고려 유수 문벌인 수주이씨

공예태후는 장흥임씨 일문을 고려의 명문 벌족(閥族)으로 찬란하게 꽃피어낸 문하시랑 평장사 출신의 임원후(任元厚)의 딸이다. 임원후는 부인을 3번 맞았는데, 초취는 여진족 정벌과 동북 9성으로 유명한 문하시중 펴평 윤관(坡平 尹瓘, ?∼1111)의 딸이었으며, 재취 역시 문하시중 수주 이위(樹州 李瑋,1049∼1133)의 딸이요, 삼취는 참지정사 경원 이식(慶源 李軾)의 딸이었다.

공예태후는 임원후의 세 부인 중 이위의 딸이었다. 이위의 부친은 시중 이정공(李靖恭, ?∼1099)으로, 시호가 문충(文忠)이었다. 이정공은 수주(樹州) 이씨로 개국공신 희목(希穆)의 후손이었는데, 문종(文宗) 조에 문과에 급제한 뒤 1059년(문종 13) 시예부외랑(試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 《삼례도(三禮圖)》54판, 《손경자서(孫卿子書》〉92판을 신조(新彫)하여 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82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국사를 편찬하였던 고려조 문신이었다(86년 문하시중·상서이부판사로 치사하였다).

이정공의 이들이었던 이위 역시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 되었을 때 선종이 각읍 수령들의 비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윤관(尹瓘)·최사열(崔思悅)과 함께 각 도에 파견하고 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이때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가 예종 때 복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1110년(예종 5) 문하시랑평장사가 되고 좌리(佐理)공신에 책록되었던 명신이었다. 예종 16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을 거쳐 태부(太傅)가 되어 계양백(桂陽伯)의 작호(爵號)를 받고 치사(致仕)했으며, 22년(인종 즉위) 계양공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후에 외손녀인 공예태후가 인종의 비(妃)가 되자 중서령을 더하고 또 진정(鎭定)공신의 호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공예태후의 외가가 되는 수주이 씨 역시 고려 유수의 문벌이었다.

따라서 공예태후가 왕비로 책봉될 무렵(당시 임원후는 조정 안에서 부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이전으로 그의 관직 또한 전중내급사 종6품직에 불과했다)에는 이정공‧이위로 이어지는 수주이 씨가 임의‧임원후로 이어지는 장흥임 씨보다 문벌의 명성이나 권위 면에서 월등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서였을까. 아니면 공예태후가 외가에서 태어나서였을까. 태후에 관한 태몽조차 친가인 임원후 쪽이 아닌 외조부의 꿈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다.

굳이 장흥임 씨와 수주이 씨의 우열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태후의 외가 역시 장흥임씨 못지 않는 문벌이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태어난 태후였기에 훗날 왕비로 책봉되는 영예를 입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연극 ‘공예태후’ 포스터

국모 태후, 《고려사》 길조 4회 기록

일국의 국모, 특히 훗날 칭송받는 국모가 될 사람은 태생부터가 그러했지만, 태어나면서 그리고 자라면서 여느 사람과 다른 신비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사》 열전에는 태후 외조부의 태몽 외에도 국모와 관련된 꿈 이야기가 3번이나 더 나온다. 태후가 김인규(金仁揆) 아들 지효(之孝)와의 파혼 이후, 점장이로부터 들은, 장차 국모가 될 것이라는 병점과 임원후가 개성부사로 강등되었을 때 판관의 대들보와 황룡의 꿈, 인종이 들깨 5되와 황규 3되를 얻은 꿈 등이 그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연이은 꿈 이야기에서 훗날 꾸며진 듯한 작위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 것은, 신비스러운 하늘의 의지나 뜻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후마다 이처럼 상서로운 꿈 이야기들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님은 《고려사》열전 후비(后妃) 편을 다 뒤집어 봐도 금방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이지만, 훗날 꿈 이야기를 조작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굳이 공예태후에게만 이러한 길조(吉兆)가 있었음을 누누이 강조하려고 애썼던 것일까.

길조 등은 태후의 숙덕·인품, 당대 민심 반영

우리는 여기서 당대의 정치현실을 먼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 16대 예종(1079∼1122. 재위 1105∼1122)의 뒤를 이어 맏아들 해(楷)가 외조부인 권신 이자겸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인종이다. 이자겸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 봉해졌던 권신이었다. 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그는 연소한 태자(太子 : 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만들어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中書令西京留守)가 되고 부(府)를 설치하여 요속(僚屬)을 두게 되었지만, 그의 권력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종에게 강요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여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고 26년(인종 4)에는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어 왕의 노여움을 샀고, 그를 반대하는 거사를 일으킨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을 모두 살해한 후부터는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다 실패하여 척준경(拓俊京) 등에 의해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였던 인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자겸의 선대로 올라가면, 이자겸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의 중혼으로 한 겹겹의 세도외척이었다. 즉 그의 증조가 되는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제 11대 문종(1019∼1083,재위 1046∼1083)의 비였으며, 자겸의 부친 호(顥)의 딸(자겸의 누이)은 제 12대 순종(1047∼1083,재위 1083.7∼1083.10. 재위 3개월)의 비였고, 이자겸의 차녀는 예종의 비였고, 예종의 비가 낳은 아들이 인종이니, 자겸은 인종에게는 외조부가 되었는데도, 자겸의 욕심은 끝간 데를 몰라 셋째·넷째 딸까지 인종의 비로 들였던 것이다.

결국 두 딸을 외손부로 삼은 것이다. 당시 인종은 14세의 어린 소년, 그러니 인종은 완전히 꼭두각시였고, 이자겸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었는데도 그것도 부족하였는지 외손자이자 겹사위인 인종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왕위찬탈까지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KBS드라마 ‘무인시대’에서 공예태후로 분한 김윤경

후덕한 요조숙녀 태후, 천복 타고나

이자겸의 왕위 찬탈 난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래 200년 동안 유지된 사직이 하마터면 다른 성씨에게 빼앗길 뻔한 일대 위기였다. 그러므로 이자겸 난의 실패와 그의 따른 그의 가문의 몰락은 당시에서는 천벌이나 다름없었던 민심의 승리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겸의 딸들이 하루아침에 반역의 딸이 되어 폐출당하고, 대신 장흥임 씨인 태후가 간택된 데 대해 민심이 크게 환영하고도 남았을 것임에는 불문가지다.

또 인종의 왕비로 간택된 태후의 임씨 집안은 재상 집안으로서는 후덕하고, 왕후 자신이 숙덕으로 칭송되었을 만큼 높은 교양을 지니고 행실이 아름다운 문자 그대로 요조숙녀였다. 태후 임씨의 행실과 인품이 어찌했는지는 태후가 아들을 낳았을 때, 왕비 책봉 때 2회에 걸쳐 내린 인종의 조서(詔書)와 뒷날 태후의 죽음을 당해 명종이 보인 효행의 태도나 금주(金主)의 조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가 낳은 소생 중에서 세 아들이 왕이 되는 복도 많고 특이한 왕후였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폐출당한 이자겸의 3·4녀 폐비 이씨들에게는 소생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인종은 공예태후 외에도 병부상서 김선의 딸을 차비(次妃)로 간택해 입궁시켰는데, 그녀에게도 소생이 없었다. 인종이 4명의 비를 맞아들였는데도 기이하게도 임씨 왕비에게만 5남 4녀가 있었다는 사실도 어찌 보면 태후의 복이라면 복일 것이고, 그 복에는 천복이 함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후에 사가들이 작위로 태후에 대한 태몽 등의 꿈 이야기를 꾸몄다고 한다면, 태후가 바로 그처럼 천복을 받고 태어난 왕비요 왕후였기에 하늘이 마치 왕비로 예정했다는 식으로 그러한 꿈 이야기나 길조 등을 각색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후의 예지와 두 아들의 비운

태후는 구중심처의 여인이었지만, 예지의 면에서도 인종보다 못지않았던 듯싶다. 그녀는 숙덕했을 뿐더러 총명하고 사려 깊고 과단성도 있었던 듯싶다. 인종이 장남을 일단 태자로 책립하였으나, 태후는 자신의 같은 아들인데도 왕의 자질에서는 장자가 차자보다 못하다고 여겨 왕에게 태자를 폐하고 둘째인 대령후로 대신하자고 늘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고려사》열전에서 전하는, 태후의 하늘을 향한 기도와 갑자기 내린 소나기, 궁중기둥에 벼락이 내리고 왕이 태후의 옷자락 아래로 엎디어 들어간, 하늘이 왕을 경계한 듯한 믿기 어려운 이적의 일화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반증하고 있다.

1146년 2월 장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태후의 장자인 현(睍)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제 18대왕 의종이었으며, 그의 나이 20세였다.

의종조 실록을 보면, 태후가 그를 왕의 자질에 의심을 품었음직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의종은 한 마디로 환락주의자였고, 의종 조에 이른바 '환관정치'라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이루어질 만큼 무력한 정치를 펴, 끝내는 정중부의 난을 야기하기에 이르렀고, 정중부에 의해 왕위를 아우였던 익양공 호(顥)에세 물려주면서 이때부터 1백년 간의 무신정권 시대를 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왕이 의종이었다.

왜 태후가 장자이고, 이미 태자로 책립된 맏아들을 불신하고, 대령후 경(大寧候暻)을 태자로 옹립해 줄 것을 주장했는지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태후가 장자보다 차자를 더 사랑했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래서 의종은 그런 모후를 별로 좋아 하지 않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령후 경을 몹시 경계하게 된다. 대령후 경은 끝내 역모로 몰려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유배지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물론 사서 등에서는 대령후 왕경의 자질이나 능력 등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명한 태후가 편애할 정도였으니, 분명히 장자인 의종보다는 나았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선 기록이어서, 그는 역모자로 줄곧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연대도 기록되지 않는 채 불운한 생을 마치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의 도입은 무모한 짓이기는 하지만, 만일 왕경이 왕위에 올랐다면, 어떠하였을까. 최소한 의종 조의 무능한 정치형태는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무튼 태후에게는 지아비인 인종의 죽음에 이어 자신이 지극히 사랑했던 왕경의 유배는 큰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비운 속의 말년, 국모 체통 잃지 않아

그러나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태후는 의종과의 극한 대립은 없었다. 대신, 자식 잃은 일은 두고두고 가슴 깊이 한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명종 12(1182)에 넷째왕자인 원경국사 충희가 죽자, 명종은 태후가 놀라고 비통해할까 봐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며, 몇 달 후에야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후는 여러 장군들이나, 명종이 무신들과 결탁하여 충희를 죽인 것으로 알고 분이 치밀어 기어코 병을 얻고 만다. 이것 역시 무신 득세 시대였던 당시 구중심처에 있던 태후 처지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 때마침 다섯째 왕자 평량후(平涼侯, 후에 신종)가 치질로 오랫동안 태후에게 문안을 못했는데, 태후는 그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줄로 알고 병세가 더 악화되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이것이 태후 이전에 한 인간이고, 54년를 둔 어머니였던 장흥임씨의 말년이었다.

그러나 무신집권의 혼란기에서도 국모로서 품위를 그녀는 결코 잃지 않았다. 한이 많아 분에 못이겨 병을 얻었을망정, 투기하거나 사심을 품지는 않았다. 비운의 말년이었지만, 그녀는 명종이 그토록 비통해 할 정도로 자녀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인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한 생을 마감했다.

전라도 변방의 정안현에서 태어났던 공예태후 임씨, 그녀의 가문은 물론 훌륭하지만 국초 이래 단 한 번도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였던 가문의 딸이었다. 그간의 왕비 가문이었던 인주 이씨나 충주 유씨 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태후는 인주 이씨가 독식하던 당대 그 왕비 자리에 새로운 인물로 간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54녀의 자식을 낳았으며, 이 중 세 명이 왕이 되었고, 그녀는 태후가 되었다. 왕비 책봉문에 의하면 그녀는 덕망 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모든 행동에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고 되어 있다. 그녀 역시 당대가 요구하던 도덕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맞아 금나라가 조문사절에 보낸 조문의 일절은 그러한 태후의 삶은 단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생각하건대 영가(靈駕:돌아가신 분)는 일찌기 명문의 딸로서 왕실로 시집와서 초년에는 부녀의 도리로서 남편을 내조하였으며, 만년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그 자손들을 보살피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습니다.

태후는 사후 순릉(純陵)에 안장되었고, 시호를 공예태후라고 하였다. 1184년 금나라에서 조문을 보내어 추모하였다.

 

공예태후의 생몰연대

출생 : 1109102(음력 97)-전라남조 정안현

사망 : 1183122(음력 1122)(74)-고려 개성부

 

공예태후의 왕자들

1남 의종(懿宗,1127-1173)-18대 국왕

3남 명종(明宗,1131-1202)-19대 국왕

5남 신종(神宗,1144-1204)-20대 국왕

2남 대령후(大寧侯,1130-?), 4남 원경국사(元敬國師,충희冲曦, ?-1183)

 

공예태후의 왕녀들

첫째 승경궁주(承慶宮主,생몰년 미상)-배우자 공화후(恭化侯) 왕영(王瑛)

둘째 덕녕궁주(德寧宮主,?-1192) -배우자 강양공(江陽公) 왕감(王瑊)

셋째 창락궁주(昌樂宮主, ?-1216)-신안후(信安侯) 왕성(王珹)]

넷째 영화궁주(永和宮主,1141-1208)-소성후(邵城侯) 왕공(王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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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仁州李氏는 고려 귀족사회의 최고의 門閥이자 대표적인 왕실 외척으로서 권력의 최정상에 있었다. 특히 1390(공양왕 2) 인주(인천)‘7대어향(七代御鄕)’이라 부르며 경원부(慶源府)’로 고쳤는데, 7대어향이란 고려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7대가 계속되는 동안 이곳 仁州李氏 가문에서 다섯 왕비가 나와, 인주가 곧 왕의 외가이고 왕비의 고향이었다는 의미는 담고 있을 만큼, 당대 왕실에서도 인주이씨의 성세는 대단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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