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흥 사인정 바로알기
(특별기고) 장흥 사인정 바로알기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5.2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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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전남도 문화관광해설사, 前부산면장)

 

 

 

 

 

 

 

 

 

 

 

 

○ 소재지: 전남 장흥읍 진흥로 891(송암리 산359번지)

○ 문화재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5호

○ 연혁

장흥 사인정은 장흥읍에서 강진 군동면으로 가는 국도 2호선 경계지점 산기슭에 있는 암벽 사인암을 배경으로 탐진강을 바라보고 자리한다.

김필(1426~1470)선생은 조선시대 단종 임금을 수양대군(훗날 세조임금)이 왕위를 빼앗는 등 국가가 혼란하고 어지러워지자 세상을 한탄하며, 1453년 28세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장흥 부산면 내동마을로 내려와 지내다가 수양대군이 세조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1455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생활을 하다 45세 나이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김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사인정’이라 했다.

현재 건물은 1944년 4월 중수했으며 전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자는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을 주초로 사용했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공포는 초익공의 홑처마 집으로 단층 목조 팔작지붕 형태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사방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판자 마루를 돌렸다.

처마의 곡선은 중앙에서 밋밋하게 이어지다가 귀로 빠지면서 퍼덕이는 새의 날개인 듯 경쾌한 느낌을 주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정자 내부에는 「사인정 상량문」을 포함하여 20여개 편액이 걸려있다.

○ 사인정은 언제 창정되었을까?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예양조대기(釣臺記,1491년)>와 문덕구(1667~1718)의 <예양구곡가 중 에양2곡(曲)>에도 사인암(岩)이고 사인정(亭)은 아니었다.

김필 선생 후손 김방조(1680~1752)의 <과(過) 사인암(岩) 유감(有感)>의 작품집에 ‘사인정(亭)’ 기록은 없고, “설암 조부께서 사인(舍人)벼슬을 지내다가 이곳에서 소요했기에 후인들이 사인암(岩) 이라 칭했다. ...

(중락) ...사인암(岩)아래 김필 선생의 5대손 김여준(金汝俊:1583~1654)의 ‘금호정사’ 옛 터가 있었으며... (하략) ...라고 했다.”

후손 김몽룡(金夢龍:1708~1788)의 <사인정 상량문, 1786년)>과 심환지(1730~1802)의 <설암 선생 정각기(亭閣記),1799년>를 살펴보면 사인정을 어느 시기에 건립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 설암 김필 선생

부산면 내안리 흥룡동은 조선조 초기에 평강현감(平康縣監)을 지낸 김필선생의 어버지 김경의(金敬義)와 형님 김찬(金瓚:1401~1449)이 입촌하여 터를 잡고 후손들이 번손하여 현재는 영광김씨 집성촌으로 형성되었다.

영광김씨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의 3세손으로 영광군(靈光君)에 훈봉된 김심언(金審言: ? ~1018)이다.

영광김씨 장흥파 파조(派祖)는 고려 1014년(현종 5년)에 내사시랑, 평장사와 서경유후를 지낸 문경(文敬) 김태용(金台用)이다.

김필(1426~1470)선생의 자(字)는 화보(和甫)또는 필옥(筆玉)이며 호(號)는 설암(雪巖)이며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부(父)는 김경의(金敬義), 조부(祖父)는 김시(金時), 증조부(曾祖父)는 장흥파 파조(派祖) 문경(文敬) 김태용(金台用)이다.

배(配)는 광주이씨 찰방(察訪:정6품) 이숙강(李淑剛)의 딸이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김괴(金塊;1450~1482, 문과급제 사간원 헌납벼슬 역임), 차남은 김몰(문과급제 홍문관 전한 벼슬 역임), 3남은 김극, 2녀는 경주이씨와 상주김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김필 선생은 1447년(세종 29년) 22세의 나이에 과거시험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입격하고 그해 1447년 과서시험 식년시(式年試) 대과(大科)에 을과(乙科) 2위(전체 33명 합격자)로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정7품)관직 부터 시작했으며, 1453년 이조좌랑(정5~6품), 의정부 사인(舍人), 1455년(세조 1년)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부정(副正), 1457년(세조 3년) 32세 때 조정에서 10년에 한 번씩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치러 당상관 정3품직을 수여하는 시험인 중시(重試)에서 2위로 합격했다.

1458년 사헌부 집의(종3품), 1464년 호조 참의, 1465년 이조 참의(정3품), 1466년 경기도 관찰사, 1468년 경상 감사(종2품), 1469년 44세에 중추부 동지사(종2품) 재임 때 예종 임금이 승하하자 국장 장례위원회의 총책임자인 국장도감(國葬都監)제조를 맡았다. 그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1470년 가선대부 충청도 관찰사 겸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족질(足疾:당뇨 합병증)이 발병되어 사임하고 장흥으로 내려와 지내다가 1470년 6월에 4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제일강산(第一江山)’ 글씨는 김구 선생 친필일까?

장흥 사인정을 소개하고 있는 장흥군지(장흥군,1990년), 문림고을 장흥(장흥문화원, 2010년). 문림의 향기Ⅰ(장흥군, 2016년), 예양강(현 탐진강) 칠십리 길(강신대. 2022년) 책자에 “정자좌측에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3.1운동직후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는 길에 이곳 사인정에서 1박하면서 남긴 글씨이다.” 라 잘못 홍보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글씨는 중국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 사신으로 1606년에 와서 강릉 경포대를 둘러보고 ‘第一江山’

이라 써준 글씨를 사진과 같이 경포대에 현판했다. 그 이후 장흥 부춘정과 창랑정 등 전국 정자마다 주지번 사신이 써주었던 ‘第一江山’ 글씨체가 편액되어 걸려있다.

주지번의 ‘제일강산(第一江山)’글씨체가 유행된지 290여년이 지난 1898년 김구 선생이 인천감옥에서 탈옥해 도망자로 쫒기면서 사인정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글씨를 써서 누구에게 주었을까?

만약에 김구 선생이 사인정에서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글씨를 써주었다면 전국적으로 정자마다 걸려있는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체 ‘제일강산(第一江山)’ 와 다르게 왜? 써주었을까? 필자는 이해되지 않는다.

○ 상해임시정부 망명길에 사인정에서 1박했을까?

김창수(안동김씨. 훗날 ‘김구’라는 이름으로 개명)는 1896년 2월 21세 때 황해도 해주 치하포 주막에서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쪼스케(土田讓亮)중위를 만났고,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당으로 알고 그 일본인을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1년 8개월 수감된 이후 1898년 3월 9일 밤에 감옥을 탈출했다. 이후 도망자로 함평, 목포, 완도, 강진을 숨어 다니다가 강진 내동마을 김창묵(안동김씨, 1867~1938) 집에 잠시 머물렀는데 김창묵은 자기 집은 은신처로 적합한 곳이 아니여서 안동김씨 집성촌인 보성 득량면 쇠실마을 김승묵(1864~1937)에게 소개해 김구 선생은 강진에서 보성으로 가는 길목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장흥 사인정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잠시 머물렀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그 이유는 1948년 전국 총선거 유세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장흥초등학교에서 “나는 장흥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중국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는 길에 장흥 사인정에서 1박했다 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김구 선생은 1919년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던 방향은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단동에서 이륭 양행으로 가는 배를 4일 동안 타고 상해 푸동나루에 1919년 4월 13일 도착했기 때문이다.

○ 세종대왕 지은 시 문구는 금색이다.

사인정 온돌방 문밖 양쪽 나무기둥에 세종대왕 임금의 문구와 김필선생의 글귀가 주련(柱聯)으로 걸려있다.

세종대왕의 문구는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

“時雨半晴半人醉(시우반청반인취: 비가 내렸으나 반만 개였으니 민심도 그러한가)”

김필 선생의 문구는 검정색이다.

“暮雲初捲月初生(모운초권월초생: 날이 저물어 구름이 일어나지만 달이 뜨니 근심할게 없다.)”

이 현판의 내용은 농사에 필요한 비가 때 맞쳐 충분히 내린 다음에 반쯤 개이니, 시름을 잊은 임금과 신하가 어울렸고, 마침 저녁구름이 막 걷히고 달이 막 솟아올라 밤의 정취를 더해주는 흥겨운 분위기를 묘사했다.

○김필 선생이 축조했던 어인보

김필 선생은 계유정란 이후 장흥 부산면 내안마을 흥룡동에 2년간 머무르면서 임금에게 건의해 허가받아 ‘어인보(御印洑)’를 축조했다.

당시 농민들이 어렵게 농사짓는 모습을 지켜보고 안타깝게 여겨서 현재 부신면 용반마을로 흐르는 예양강(현재 탐진강)물줄기를 막아 농사철에 이용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주민들을 설득하고 주지(周知)와 광대(光大)를 책임자로 하여 보를 막아 수리시설을 개설했다. 현재 부산면 18개 마을 가운데 10개 마을이 어인보 몽리민이다.

속담에 부산면장을 할 것이냐 어인보 유사를 할 것이냐고 물으면 어인보 유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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