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옛터9-장흥군의 첫 근대교육의 전당 장흥초등학교
■장흥의 옛터9-장흥군의 첫 근대교육의 전당 장흥초등학교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10.0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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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본지 논설위원. 장흥향토사연구회장. 시인. 수필가.「문림고을 장흥」「장흥의 민속」「천관산」「보림사」등 장흥군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먹고 자는 것이야 본능적이라 하지만, 스스로 인지력이 생겨 더 나은 삶을 위해 배워야했던 것이 글자가 아니였던가 한다. 그럼 당신이 맨 처음 글을 배우고 세상을 알가기 시작한 곳이 어디였던가?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은 1885년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한 배재학당(培材學堂)이 1896년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과 연희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가 1886년에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가 설립되면서 구교육에서 신교육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 황제는 1895년7월19일. 29개 조항으로 된 소학교령(小學校令)을 공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

“교육은 개화(開化)의 근본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강해지는 기술이 모두 학문으로부터 생기니, 나라의 문명(文明)은 학교의 성쇠에 달려 있다. 학생은 8세 이상 15세까지 더 모집하고 그 과정은 오륜행실(五倫行實)로부터 《소학(小學)》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국문, 산술, 그 외에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時宜)에 맞는 책을 일체 가르치면서 헛된 형식을 버리고 실용을 숭상하여 교육을 완전하게 하기에 힘써라.

대체로 다른 나라 학교의 규정을 생각건대, 아동이 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그 부형(父兄)에게 벌을 주는 예도 더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규정을 아직은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아동의 부형 되는 자는 아들이나 동생을 데리고 본 부에 와서 허입장(許入狀)을 받은 후 학교에 가서 학업을 힘써 닦게 하되, 혹 게을러서 중단하는 폐단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고종실록》 1895년 9월 28일

소학교령은 ‘학부(學部) 고시(告示) 제121호’라는 제목으로 〈내각 기록국 관보〉에 게재되었고, 8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이때부터 각 관찰부(觀察府) 소재지(지금의 도청 소재지)에 소학교 1개를 세울 수 있었다.

사립학교로 출발한 장흥의 근대학교 ― “명진학교(明進學校)”

장흥군의 최초 근대식 학교는 1905년 당시 일진회(一進會) 회원들이 장흥읍 기양리 민가(民家)에 설립한 “명진학교(明進學校)”로 지금의 장흥초등학교 전신이다. 이후 1910년도에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지금의 장흥서초등학교 교정에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한 “일본인회립소학교(日本人會立小學校)”가 설립되었고, 1918년도에 장평공립보통학교가 장평면 용강제(龍岡齋)에 들어섰다. 그 후 1929년에 이르러 보통학교를 1개면에 1개교의 설치계획이 발표되어 각 읍면에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명진학교(明進學校)”는 신분차별을 없앤 교육기회 개방, 학령 개념의 도입, 학기제 운영, 전문적 교원 양성 등의 근대적 형식을 갖춘 소학교 설립 계획을 발표한 학부(學部 ; 현 교육부) 규정에 따라 일진회원들이 1905년 9월8일 장흥읍 기양리에서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사립학교로 4년의 교육과정인 소학교로 출발하였다.

당시 학교를 설립한 일진회원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당시 학생들이 배운 교과목은 필수과목으로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였고, 선택과목으로 본국지리, 본국역사, 도화. 외국어 등 이었다. 교과용 도서 중에서 학부편찬도서는 수신, 독서, 작문을 위한 소학, 역사, 지리 등의 교과서였으며, 산술교과서는 일본 것을 번역한 곳을 수정하여 사용했다.

명진학교는 1909년 3월31일 첫 졸업생으로 8명의 남학생을 배출한 후,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지방장관(현 도지사)의 감독을 받는 사립학교로 인정받아 1909년 5월1일 “사립창명보통학교(私立彰明普通學校)”로 이름을 바꾸어 장흥읍 남외리 2번지선(9천여 평 ; 현 장흥군 문예회관 주차장 및 테니스장)으로 이전하였다.

실무에 맞는 사람을 키우던 시절 ― “장흥공립보통학교”

대전6년 장흥 보통학교의 탈곡 실습장면
대전6년 장흥 보통학교의 탈곡 실습장면

학부가 1909년 8월27일 “보통학교령”을 발표하자 그해 9월6일자로 보통학교로 정식인가를 받게 되자 이날을 기념하여 개교기념일로 정하였다.

최초 명진학교로 개교할 당시의 교원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으나 당시 교원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자로 졸업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1910년도에 장흥향교에서 간행한 속칭 경술지(庚戌誌)로 알려진 장흥읍지를 보면, ‘교감(敎監:학교장)은 일본인으로 다가이노히로이(高野寬)와 지역인으로 부훈도(副訓導) 김두현(金斗鉉)과 한문교사 3인이며 학생은 194명이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후 “사립장흥창명보통학교”는 1911년 3월31일 제2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한 후. 그해 6월15일 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아 “공립장흥보통학교”라 하다가 11월1일부터는 “장흥공립보통학교”로 학교명을 바꾸었다.

당시 보통학교의 교과목은 읽기·쓰기·셈하기에 중점을 두었고, 수신·국어·일본어·한문·산수가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었다. 교육방침은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대한 예비교육은 아니었다. 곧 실무에 맞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었다.

당시 “장흥공립보통학교”는 1912년 3월31일에는 2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2년4월1일에는 여학생 4명을 처음 받아드렸다. 이에 따라 1916년도에 2명의 여학생이 졸업하게 되는가 하면, 1915년에는 2개의 교실과 교무실을 짓게 되었고 1916년에는 기숙사까지 신축하였다.

1917년4월17일부터 1920년 3월31까지는 “장흥공립보통학교”에 “장흥공립간이농업학교”가 부설운영 되었다. 이는 1911년 8월23일 칙령제229호로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한 것으로 수업연한을 1년으로 한 학제로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도록 학력에 제한을 두지 않았었다.

장흥보통학교
장흥보통학교

간이농업학교 교과서는 191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비료, 농산제조, 양잠, 측량, 작물, 삼림, 축산, 토양 및 농구 등을 편찬하여 각 학교에 배부하고, 간이농업학교 교장과 교사들에게 농업학과목에 대한 이론 강의와 표본제작법, 작물 양잠 축산 삼림(측량포함) 실습을 통하여 교사들의 교수능력을 제고하도록 하고, 학교별로 지역특성에 맞추어 학과목을 가감하여 가르쳤으나 일반적으로 국어, 작물, 양잠, 축산, 산림, 산술을 주로 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선교육령의 목적을 충량(忠良)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으로 하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직후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일본에 동조하도록 하기 위해 무단정치를 실시하는데 있어 그들이 의도에 맞는 인간을 길러내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어 보급을 위한 보통교육을 실시하고, 일본의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는 저급한 기술을 가진 노동자를 양성하는 실업교육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 법령의 적용대상은 한반도 안에 있는 조선인에 한정되었다.

격동의 시대 ― “장흥대화심상소학교”와 “장흥공립국민학교”

이후 “장흥공립보통학교”는 1920년 4월1일 5학년을 두었다가 1921년 2월2일에는 수업연한을 6년제로 인가 받았고, 그해 제12회 졸업생으로 4년제 학생4명과 6년제 학생25명의 졸업생을 비롯해 1937년 3월까지 28회의 졸업생 총 1,591명(남1,396. 여195)을 배출한 후 1937년10월18일부로 장흥읍 건산리 662번지(현부지) 일대에 10,218 평을 확보하고 교사와 실습답을 마련하여 학교를 옮기면서 당시 건산리 390번지에 위치하던 “부동공립보통학교(府東公立普通學校)”를 흡수 하였다.

장흥공립보통학교는 1938년3월3일 칙령제103호로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학교의 명칭을 “장흥대화심상소학교(長興大和尋常小學校)로 변경하였다.

제3차 조선교육령의 주요점은 교명을 일본인 학교와 같이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하고,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고등여학교라고 바꾸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국어를 필수 과목에서 선택과목(隨意科目)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폐지를 의미하였다.

일제는 이 기간 중의 교육을 완전히 전시 체제화하고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 등 3대 교육방침을 내세우며 한국인의 전시동원을 위한 동화정책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이는 1938년 3월에 총독 미나미(南次郞)가 발표한 교육방침으로 모든 교육내용에서 일본적인 것이 보다 강화되고 수업을 일본어로 할 것 등이 강요되어, 철저한 황국신민교육을 황국신민화 교육을 더욱 본격화하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1년, 그해 4월1일 “장흥대화심상소학교”를 “장흥대화공립국민학교(長興大和公立國民學校)”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는 칙령 제113호로 제4차 조선교육령은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에 의하여 철저한 전시교육체제로 바뀌게 하는 조치로 교육의 군사체제화를 위한 “학생동원체제정비에 관한 훈령” “학도동원본부의 설치” “학도근로령” “결전교육조치요강” 등의 각종 법령을 공포하여 학교 교육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만들었다. 이러한 계획아래 1941년 3월31자로 “국민학교령”을 발표하여 4월1일부터 보통학교였던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고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 국민학교는 대륙침략에 이용하는 병사의 준비와 관련해서 의무교육제의 준비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젊은 학도들은 이른바 학병으로 끌려 나갔으며, 각급 학교의 양상도 정규교육보다도 근로봉사 내지 군사훈련에 더 바쁜. 교육의 황무지시기로 일관하여 오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1950-60년대 장흥국민학교
1950-60년대 장흥국민학교

해방 이후 “장흥대화공립국민학교”는 왜색이 짙은 대화(大和)를 빼고 “장흥공립국민학교(長興公立國民學校)”로 1946년 8월31일자로 바꾸었다가 1950년 4월1일 “장흥국민학교(長興國民學校)”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한국동란으로 인해 잠시 폐교되면서 약 1개월가량 “인민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41년부터 불려오던 국민학교는 1995년까지 사용하다가 범정부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과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개명논의를 거쳐 1996년 3월1일 범정부적으로 초등학교로 개칭하기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장흥초등학교(長興初等學校)”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장흥초등학교

이렇게 1905년 9월8일 장흥읍 기양리에서 “명진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던 “장흥초등학교”는 113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학교는 지난 1918년 2월 현재 108회 졸업생 125명을 합하여 총 21,253명의 졸업생을 배출 하였고. 현재 734명(남 390, 여344)이 수업하고 있고, 지난 2000년3월1일 개원한 장흥초등학교 병설유치원도 2018년2월8일까지 18회 491명이 졸업생을 냈고, 금년 3월2일 58명이 입학하여 꿈을 키우고 있다.
현재 장흥초등학교는 초등학교 교실34실, 특별교실13실, 유치원생 교실3실, 유치원생 특별교실4실이 있으며 급식실과 보건실이 각1실과 관리실이 4실 그리고 기타 강당과 창고 등이 있으며, 학교와 유치원을 운영하는 교장, 교감, 원감 각1명과 초등교사 40명 병설유치원 교사 7명 행정요원, 복지사, 상담사, 조리사 등 24명을 비롯해 총74명이 운영 중이다.

현재의 장흥초등학교 전경.
현재의 장흥초등학교 전경.

고종황제께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강해지는 기술이 모두 학문으로부터 생기니, 나라의 문명(文明)은 학교의 성쇠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고 “오륜행실(五倫行實)로부터 《소학(小學)》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국문, 산술, 그 외에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 時宜)에 맞는 책을 일체 가르치면서 헛된 형식을 버리고 실용을 숭상하여 교육을 완전하게 하기를 . . . . .” 바랬던 오늘날. 지난 1952년4월29일 교육법시행령의 시행으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1977년부터 연차적으로 초등학교 재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시작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첫 배움의 터전으로 삼았던 학교. 또한 내일을 위한 무궁한 꿈을 꾸던 그곳. 당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어디 십니까? 며칠 후면 한글날입니다. ♣朝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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