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장흥고문학-기록문학(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6.0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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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任懿는 공예태후의 조부(祖父)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지난 152호에 이어>

김선욱 시인

임의(任懿)는 정안현(定安縣) 사람이며, 어려서 힘써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종(宣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潛邸]에 그의 명성을 듣고 주문(奏文)을 올려서 전첨(典籤)이 되었는데, 〈선종이〉 즉위하자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우승선(右承宣)이 되었다. 숙종(肅宗) 즉위 초에 나인(內人)이 묵은 감정을 가지고 여러 번 그를 참소하였다. 왕이 평소 그가 순하고 바르며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참소하는 말이 끝내 쓰이지 않았다. 〈이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옮겼다.
송(宋) 철종(哲宗)이 붕어(崩御)하자 임의는 시랑(侍郞) 백가신(白可臣)과 함께 사명을 받들고 〈송에 가서〉 조문하였다. 사신 일행이 모두 재물의 이익에 더러워졌지만, 임의만은 홀로 청렴하고 조심하여 송인(宋人)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황제가 하사한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을 가지고 오니 왕이 이르기를, “이 〈책의〉 처방은 세상을 구제하는 중요한 의술이니 이를 가져온 신(使)·부사(副使)·보좌관[僚佐]들에게 마땅히 관작과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었으며, 예부상서(禮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이부상서(吏部尙書)·상서좌복야(左僕射尙書)·참지정사(叅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임의는〉 예종(睿宗) 초에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 上柱國)으로 승진하고 곧이어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가 되었다. 후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권동북면병마사 겸행영병마사(權東北面兵馬事 兼行營兵馬使)가 되었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김연(金緣)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임의 등이 하직하니 왕이 중광전(重光殿)에 가서 친히 부월(鈇鉞)을 주고 안장달린 말[鞍馬]·의복·채색 비단[彩段]을 하사하였으며, 근신(近臣)을 보내어 교외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돌아올 때도 〈왕이〉 중광전에서 그들을 접견하였다. 당시 최홍정(崔弘正) 등이 이미 9성(城)의 군민(軍民)과 병장기를 거두어들였고, 임의 등은 행군이 지체되어 국경에 관한 일은 하나도 조치하지 못하였다. 공연히 전기(傳騎)만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다. 후에 수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守太尉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上柱國)을 더하고 이어서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예종〉 12년(1117)에 죽으니 77세였다. 시호를 정경(貞敬)이라 하였으며, 인종(仁宗)은 중서령(中書令)을 추증하였다. 아들은 임원후(任元厚)·임원준(任元濬)이다. 임원준은 평장사를 지냈다.
任懿, 定安縣人, 少力學登第. 宣宗在藩邸, 聞其名, 奏爲典籤, 及卽位, 累遷右承宣. 肅宗初立, 內人挾宿憾, 屢譖之. 王雅知其純正無他, 讒言卒不行. 遷諫議大夫.
宋哲宗崩, 懿與侍郞白可臣奉使弔慰. 一行人皆黷貨利, 懿獨廉謹, 宋人稱之. 賚帝所賜神醫普救方來, 王曰, “此方, 濟世要術, 其賚來使·副·僚佐, 宜並加爵賞.” 未幾, 拜御史大夫, 歷禮·兵·吏部尙書·左僕射·叅知政事.
睿宗初, 進開府儀同三司·上柱國, 尋判尙書刑部事. 後以中書侍郞平章事, 權判東北面兵馬事兼行營兵馬使, 右諫議大夫金緣副之. 懿等辭, 王御重光殿, 親授鈇鉞, 賜鞍馬·衣服·彩段, 遣近臣, 餞于郊. 及還, 引見重光殿. 時崔弘正等, 已收入九城軍民兵仗, 懿等行緩, 疆場之事, 一無措置. 徒煩傳騎, 時人譏之. 後加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 仍令致仕, 賜佐理功臣號. 十二年, 卒, 年七十七. 謚貞敬, 仁宗, 贈中書令. 子元厚·元濬. 元濬, 平章事.

장흥 출신으로 《고려사》 열전에 첫 번째로 등재된 인물이다.
임의(任懿)가 누구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장흥임씨의 세가 내용부터 고찰해봐야 한다.

 장흥임씨의 연원과 성장

장흥임씨 선조들의 비석(정안사 소재 비석군)
장흥임씨 선조들의 비석(정안사 소재 비석군)

문헌에 나타난 임씨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144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동국만성통보(東國萬姓譜)〉에는 장흥(長興)·풍천(豊川)·곡성(谷城)·과천(果川)·아선(牙善)·회덕(懷德)·진주(晉州)·함풍(咸豊) 등 8개의 본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장흥임씨와 풍천임씨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임씨 중에서도 대표적인 명문으로 손꼽히는 장흥임씨는 고려조 후기에 많은 인물과 명재상들을 배출하였고, 풍천임씨는 장흥임씨와는 달리 조선조 특히 조선 후기에 많은 명신과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그 동안 풍천임씨의 시조 온(溫)은 본디 중국 소흥부(紹興府)의 자계현(慈溪縣)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그의 5대 손인 임주(林澍 1250∼1300)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풍천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생존 연대, 경상도 추동 안찰사(秋冬按察使)를 지낸 연대, 지석(誌石) 등을 검토할 때 와전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임주의 선대는 그 이전에도 국내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최근 들어 임씨(풍천·장흥임씨) 일각에서도 풍천임씨 시조 온은 장흥임씨 3세손인 임원준(任元濬)의 아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이 문제에 관련, 양 종문에서 계속 연구 검토해야 할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흥임씨의 시조는 호(顥)이다. 그 역시 중국 송대(宋代)의 소흥부(紹興府) 출신으로, 한반도로 건너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임씨 세계표(世系表)에 따르면, 중국임씨의 시조는 황제의 여덟번 째 아들로 우양(偶陽)이고, 이 분으로부터 107세손에 해당하는 분이 약(鑰)으로 소흥부 시조이고, 약(鑰)의 손자가 호(顥)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장흥임씨 족보의 시조도 호(顥)이다. 송나라 소흥부의 호(顥)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전(銓)이고 막내아들(季子)은 관(瓘)으로, 계자 관이 '귀하남불명('歸河南不明 : 황하강 남쪽으로 돌아가 생사를 모른다)'으로 중국의 임씨 세계표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시조 호(顥)가 종통을 이을 장자는 중국에 남겨두고 계자인 관(瓘)을 데리고 고려국으로 왔으며, 고려에 입국하면서 관(瓘)이 의(懿)로 개명되었다고 일각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임의(任懿)는 서기 1095년에 처음으로 이름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임억(任億)이란 사람에 대한 기록도 1016년에 나오고 있으며, 임술광(任述光)이라는 사람의 기록도 1017년에 나오고 있다. 이처럼 임의(任懿) 이전 고려국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어, 한편에서는 이런 점에서 임의(任懿) 이상의 임씨(任氏) 가계에 대한 연구 검증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장흥임씨 연원(淵源)과 시조 임호공

아무튼, 장흥임씨 족보 등 가계기록에 의하면, 장흥 임씨의 시조는 임호(任顥)이다.
임호 공은 고려 송(宋)나라 소흥부 출신으로 인종 때, 즉 고려 제10대 정종(靖宗, 재위1035∼46년) 초에 정세가 혼란하자 난을 피해 한반도 남해안 장안현(定安縣)의 임씨도(任氏島)로 석가(石 ; 돌로된 큰 배)를 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임씨문중은 중원대륙에서 중국의 고대왕조 때인 은(殷∼BC1100) 나라 때부터 기원했고, 임씨 문중의 연원은 황제 직계로부터 시작됐으며 또한 중원에서도 그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주(周 : BC1122∼BC256?) 나라 문왕(文王)의 모친 임씨는 지극히 어질고 현명하였음이 경서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문왕은 주 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名君)으로 훗날 유가(儒家)로부터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서 숭앙을 받았던 왕이었다. 그러한 임씨의 계보였던 임씨의 109세손에서 분적한 소흥 임씨의 3세손인 임호 공이 한반도 즉 고려국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임호 공은 전라도 정안현의 임씨도에 정박하였다가, 근처 지금의 옥당리 당동마을에 정착한 후 본관이 ‘장흥임씨(長興任氏)’라는 씨족을 일으켜 세웠다. 물론 당초에는 정착한 곳이 정안현(定安縣)에 속했으므로 본관도 '정안임씨(定安任氏)였으나,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본관을 ‘장흥’으로 불리어 오게 되었다.
장흥임씨 시조인 임호(任顥) 공은 고려조에서 벼슬이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郞)에 이르렀다.
상소공부(尙書工部)는 고려 초에는 공관(工官)이라 하다가 995년(성종 14)에 상서공부로 이름으로 고쳐 불렀던 중앙 관청인 6부의 하나였다. 이 부서는 산림천택(山林川澤)·공장(工匠 : 수공업 종사 장인)·영조(營造 : 규모가 큰 토목·건축공사)의 일을 맡아보았고, 관원으로는 판사(判事) 1명, 상서(尙書 : 정3품) 1명, 지부사(知部事 : 종3품) 1명, 시랑(侍郞 : 정4품) 1명, 낭중(郞中 : 정5품) 2명, 원외랑(員外郞 : 정6품) 2명을 두었고,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2명, 영사(令史) 4명, 서령사(書令史) 4명, 기관(記官) 8명, 전서서자(篆書書者) 2명을 두었다. 임호 공은 바로 이 상서 6부(尙書六部)의 정6품 관직인 원외랑을 맡은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건너와 전라도 변방인 정안현에 임씨 가계를 일으켜 세웠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중앙정부의 주요 관청인 상서 6부에서까지 나아가 정6품직인 원외랑에 올랐다는 것은 당시 임호 공의 학문적인 기반이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호족으로 짧은 기간에 크게 성세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것이다.
임호 공의 아들이 바로 임의(任懿)이다.
장흥출신으로 《고려사》 열전의 장흥출신 인물로 첫 번째로 소개된 인물이다.
기실 임호공이야말로 고려국 조정에서 장흥임씨 가문을 명문거족으로 기반을 닦은 분이다. 백과사전 등에서는 임의 공을 장흥임씨의 시조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임의 공은 장흥임씨의 탄탄한 기반을 닦았고, 그 이후부터 장흥임씨는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가 망할 때까지 대대세손 명문으로 일취월장하게 된다.
임의(1041∼1117)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는 중서시랑동평장사인 원숙(元淑), 둘째는 문하시중인 원후(元厚), 셋째는 평장사인 원준(元濬)으로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명문으로서 장흥임씨의 본격적인 계보의 시작이 된다. 평장사공(平章事公) 원숙의 계보는 오늘날 운곡(雲谷)·청계(淸溪)·예락(曳洛)·지석(支石)·두륜봉(斗輪峰)·초평(草坪)·학산(康津鶴山)파 등으로 분파 된다. 문충공 원후의 계보는 봉황동(鳳凰洞)·효자(孝子公)·진주(晉州)·원주-양주(原州-楊州)·제천(堤川)·보령(保零)·여주(驪州) 파로 분파된다. 가장 많은 분파를 이룬 문헌공(文獻公) 원준은 충순위공(忠順衛公)·절제공(節制公)·의곡(蟻谷)·첨정공(僉正公)·사창(社倉)·화동공(花洞公)·삼동공(三島公)·운수동(雲水洞)·남치(藍峙)·난실공(蘭室公)·대치(大峙)·평촌(坪村)·성자동(聖子洞)·진도맹진(珍島孟津)·진도고성(珍島古城)·진도세방(珍島細芳) 파 등으로 분파된다.


열전 내용을 중심으로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사들을 모아 임의의 일대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려시대 관료출신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을 소개한 〈고려사 권 92〉편은 '열전 제8' 마지막에서 두 번 째로 임의(任懿)의 전기를 기록해 놓고 있다. 여기 임의 전기에는 임의 외에도 임극충(任克忠), 임극정(任克正), 임부(任溥), 임유(任濡), 임익(任翊), 임항(任沆)의 전기도 부기해 놓고 있다.

진실하고 학문 탁월 - 선종이 총애

임의는 ‘열전’의 기록처럼,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학문 정진에 힘썼다. 임의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文宗.1019∼1083) 24년(1070) 때였다. 그는 이때 과거에 급제한 후 첫 관직으로 비교성(秘書省 : 축문과 경적·경적經籍을 맡아본 관청)의 교서랑(校書郞 : 비서성전교사秘書省典校寺에 두었던 정9품 관직)이 되었다.
사람됨이 바르고 진실한 데다 학문이 뛰어나서 선종(宣宗.1049∼1094)의 특별한 지지와 대우를 받았다. 문종 36년에 충주목 서기가 되었던 그를 선종은 즉위 후 여러 관직을 거치게 한 뒤 우승선(承宣)으로 올렸다.
11대 문종 다음의 12대 왕은 문종의 장자였던 순종(順宗.1047∼1083)이었으나 1083년에 문종 왕이 죽자 그의 장자로 왕태자였던 순종(順宗.1047∼1083)이 제 12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그 해에 순종도 죽어 제 13대 왕으로 즉위한 이가 선종이었다.
선종도 즉위한 지 11년 만에 병사, 헌종(獻宗.1084∼1097)이 1094년에 제 14대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헌종도 신병으로 인해 재위 1년 5개월 만인 1095년 10월에 숙부였던 계림공(鷄林公) 희(熙 : 숙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후궁에서 지내다가 14세에 요절하였다.
제 15대 왕인 숙종은 문종의 3남이고 순종의 아우로 조카인 헌종이 형식적으로는 지병이 악화되어 선위를 해주었지만, 실제로는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 데다 병약하여 실세가 없어 숙종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었다. 이처럼 숙종의 즉위는 조카로부터 왕권이 옮겨간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이어서 당시 고려의 상국이었던 요(遼)나라의 인준을 받는데 말썽의 소지가 있었다.
숙종 즉위 후, 형부시랑이었던 임의는 왕위 교체를 알리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요에 사신으로 가서 이 까다로운 외교현안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돌아왔다.《고려사》세가 권제11>숙종(肅宗) 즉위년>10월 : …신미 요(遼)에 좌사낭중(左司郞中) 윤관(尹瓘)과 형부시랑(刑部侍郞) 임의(任懿)를 보냈다. 전왕(前王) 헌종(獻宗)의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 辛未 遣左司郞中尹瓘, 刑部侍郞任懿如遼. 前王表曰,,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정치적인 모함이었다. 이것은 전부터 그에게 유감을 품어 온 환관들의 여러 번에 걸친 참소였다. 그는 실각위기를 당하였지만, 다행히 명철하였던 숙종이 임의가 순정하고 충직하여 다른 잘못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소를 물리쳤으며, 숙종 4년(1099)에는 좌의간대부로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임의는 본디 청렴 강직하여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기 때문에 환관들을 엄정하게 다루어 그들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송에서 의서 〈신의보구방〉 들여 와

임의는 숙종 5년(1100)에 상서로 시랑 백가신과 함께 송나라 철종(哲宗)의 조문사절로 임명되어 송나라로 간 일이 있었다. 《고려사절요》제6권>숙종 명효대왕 1(肅宗明孝大王一) …6월에 상서 임의(任懿)ㆍ시랑 백가신(白可臣)을 송 나라에 보내어 조위하였다. 六月,遣尙書任懿,侍郞白可臣,如宋,弔慰
 이때 사신 일행 모두는 화리(貨利)에 눈이 어두워 물화교역에 정신이 없었으나 임의만은 이러한 재리(財利)는 외면하고 염결(廉潔)과 근신으로 일관, 송인들의 경탄과 칭찬을 받았다. 《고려사절요》제6권>숙종 명효대왕1 …임의(任懿)ㆍ백가신(白可臣)이 송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 의서(醫書)의 일종)》을 하사하므로 왕이 선정전에서 조서를 받았다. 일행 사람이 모두 재리(財利)를 탐내었으나 임예는 홀로 청렴하고 삼가니 송 나라 사람이 칭찬하였다. 任懿,白可臣,還自宋,帝,賜神醫普救方,王,受詔於宣政殿,一行人,皆貪冒貨利,懿,獨廉謹,宋人,稱之。
 당시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사적인 물물교환으로 큰 이득을 챙기는 것은 하나의 통례 같은 것이었다. 임의는 다만 송왕이 준〈신의보구방(新醫普救方)〉이라는 의서 한 권만 가지고 왔다. 《고려사》>世家 第11권>肅宗 6年>5월 …갑신 송(宋)에서 임의(任懿)와 백가신(白可臣) 등이 돌아왔는데, 송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하사하였다.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송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았다. 甲申 任懿·白可臣等還自宋, 帝賜神醫補救方. 王受詔於宣政殿.
 
송왕은 고려의 전왕인 헌종이 병으로 인해 일찍 퇴위해 병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의서를 준 것이었다. 임의의 충직하고 엄정한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었다. 《동사강목》제7하>6월 …사신을 송(宋)에 보내어 조위(吊慰)하였다. 이보다 앞서 송나라 명주(明州)에서 철종(哲宗)이 붕(崩)하고 휘종(徽宗)이 즉위하였다고 첩보(牒報)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상서(尙書) 임의(任懿) 등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조위하도록 하였고, 또 왕하(王嘏)를 보내어 등극을 하례한 것이다. 이때 사신의 일행이 거의 탐욕을 부렸으나, 임의(任懿)는 홀로 청렴하고 조심스러웠으므로 송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왕하(王嘏) 등이 돌아올 때 제(帝-휘종)는 《태평어람(太平御覽)》 1천 권을 하사하였으며, 또 임의(任懿)는 임의 등이 귀국할 때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하사하였다.

임의는 숙종 9년(1104년) 6월에 왕의 남경행차를 수행하고, 8월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중신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 추밀원사 이부상서가 되었다. 숙종에 이어 16대 왕위에 오른 이는 예종(睿宗.1079∼1122)이었다. 임의는 예종 즉위년에 상서, 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고, 12월에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 上柱國)의 훈위를 받았다. 예종 2년에 판상서형부사, 얼마 후에는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이 무렵 동북 변경에는 여진족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숙종조부터 급속도로 성장한 여진이 예종 시대에 이르러 더욱 강대해지면서 중국대륙은 전운에 휩싸이고, 이런 여파는 고려의 변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종은 성장하는 여진의 남하를 막는 동시에 거란에게 잃었던 압록강변을 되찾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예종 초기에 여진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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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장사공(平章事公) 원숙의 계보는 오늘날 운곡(雲谷청계(淸溪예락(曳洛지석(支石두륜봉(斗輪峰초평(草坪학산(康津鶴山)파 등으로 분파 된다. 문충공 원후의 계보는 봉황동(鳳凰洞효자(孝子公진주(晉州원주-양주(原州-楊州제천(堤川보령(保零여주(驪州) 파로 분파된다. 가장 많은 분파를 이룬 문헌공(文獻公) 원준은 충순위공(忠順衛公절제공(節制公의곡(蟻谷첨정공(僉正公사창(社倉화동공(花洞公삼동공(三島公운수동(雲水洞남치(藍峙난실공(蘭室公대치(大峙평촌(坪村성자동(聖子洞진도맹진(珍島孟津진도고성(珍島古城진도세방(珍島細芳) 파 등으로 분파된다.

2) 고려사세가 권제11>숙종(肅宗) 즉위년>10: 신미 요()에 좌사낭중(左司郞中) 윤관(尹瓘)과 형부시랑(刑部侍郞) 임의(任懿)를 보냈다. 전왕(前王) 헌종(獻宗)의 표문(表文)에서 말하기를辛未 遣左司郞中尹瓘, 刑部侍郞任懿如遼. 前王表曰,,

3) 고려사절요6>숙종 명효대왕 1(肅宗明孝大王一) 6월에 상서 임의(任懿)ㆍ시랑 백가신(白可臣)을 송 나라에 보내어 조위하였다. 六月遣尙書任懿侍郞白可臣如宋弔慰

4) 《고려사절요6>숙종 명효대왕1 임의(任懿)ㆍ백가신(白可臣)이 송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 의서(醫書)의 일종)을 하사하므로 왕이 선정전에서 조서를 받았다. 일행 사람이 모두 재리(財利)를 탐내었으나 임예는 홀로 청렴하고 삼가니 송 나라 사람이 칭찬하였다. 任懿白可臣還自宋賜神醫普救方受詔於宣政殿一行人皆貪冒貨利獨廉謹宋人稱之

5) 《고려사>世家 第11>肅宗 6>5갑신 송()에서 임의(任懿)와 백가신(白可臣) 등이 돌아왔는데, 송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하사하였다.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송 황제의조서(詔書)를 받았다. 甲申 任懿·白可臣等還自宋, 帝賜神醫補救方. 王受詔於宣政殿.

6) 동사강목7>6사신을 송()에 보내어 조위(吊慰)하였다. 이보다 앞서 송나라 명주(明州)에서 철종(哲宗)이 붕()하고 휘종(徽宗)이 즉위하였다고 첩보(牒報)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상서(尙書) 임의(任懿) 등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조위하도록 하였고, 또 왕하(王嘏)를 보내어 등극을 하례한 것이다. 이때 사신의 일행이 거의 탐욕을 부렸으나, 임의(任懿)는 홀로 청렴하고 조심스러웠으므로 송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왕하(王嘏) 등이 돌아올 때 제(-휘종)태평어람(太平御覽)1천 권을 하사하였으며, 또 임의(任懿)는 임의 등이 귀국할 때 황제가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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