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장흥고문학-기록문학(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 김선욱
  • 승인 2022.06.1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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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任懿는 공예태후의 조부(祖父)다(하)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장흥임씨 선조들의 비석(정안사 소재 비석군)

 

 

 

 

 

 

 

 

 

 

 

 

▲임의 비문(탁본)

 

 

 

 

 

 

 

 

 

 

 

 

 

 

 

 

 

 

 

 

 

 

 

<지난 153호에 이어>

여진족 9성 환부문제와 임의, 정치적 파란

예종은 2년(1107년)에 윤관(尹瓘.?∼1111)을 원수, 오연총(吳延寵.1055∼1116)을 부장으로 정하고 17만의 대군으로 출전케 했던 것이다. 윤관은 수륙양면으로 여진족의 소굴인 함흥평야로 쳐들어가 촌락을 깨뜨리고 적병 5천을 베고 5천을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린다.

이어 새 점령지에 웅주, 영주, 복주, 길주, 함주를 비롯한 9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고려는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9성을 유지하는 일이 고려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진이 실지(失地)를 회복하려고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이같은 공방전이 계속되자, 고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를 눈치 챈 여진은 대대적인 공세로 고려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화친을 제의해 왔다. 여진은 북계의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동북 9성 환부 문제를 놓고 일대 논란을 벌였다. 대신들은 평장사 최홍사를 비롯한 28명의 9성 반환파, 즉 반(反) 윤관파와 예부낭중 박승중과 호부낭중 한상 등의 반환반대파간의 언쟁이 계속되었으나 대세는 반환파에 기울여져 있었다. 2년여 동안의 전쟁으로 백성들의 불안감이 확대되고 국가·민간경제도 적잖게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전쟁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고려조정은 여러 차례 논의 끝에 '9성은 너무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러 예종 4년(1109년)에 많은 희생을 치르고 되찾은 우리 땅을 여진족에게 내주게 되는 통한스러운 일을 치른다.

그동안 관직생활을 거쳤던 임의는 바로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파란을 겪게 된다. 예종 4년 7월 정사(丁巳)일에 임의는 권판동북면 병마사 겸 행영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使兼行營兵馬使)에 임명되어 9성 환부와 군인·주민 및 병장기 수습 등 뒷마무리를 맡게 된다. 부장은 우간의대부 김연(金緣)이었다. 임의는 7월 임술일에 출정하면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고하였다. 왕은 중광전(重光殿)에 나와 부월을 내리는 동시에 안마(鞍馬), 의복, 채단(綵緞)등 물품을 주며 격려하고, 측근자를 보내어 교외까지 전송하였다. 임의는 적을 무찌르는 신명난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확보한 9성을 적에게 환부하는 명예롭지 못한 일을 도맡게 된 것이다.

9성 환부 문제는 임의 핵임 하에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임의의 과실문제가 제기된다. 즉 《고려사》 열전 임의 편에 "…최홍정 등이 이미 9성의 군대와 주민이며 병기들을 걷어드린 후라 임의 등의 행동이 완만하여 때가 늦어진 탓으로 국경경계에 대한 조치는 하나도 볼만한 실적없이 공연히 통신기병들의 수고만 끼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일단락되지 않았다. 반윤관파에서 여진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의 패배로 많은 군사를 잃은 윤관과 오연총에 대한 패전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9성 환부문제에서 임의는 늘 반윤관파에 섰다. 그러나 왕은 마지못해 윤관의 관직과 공신호를 삭탈했지만 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당시 임의 등이 9성의 환부를 주장한데는 나름대로 고육지책이었고, 보다 대국적인 측면도 있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방 요나라와 대결·전쟁 상황으로 오랫동안 시달리다 겨우 화의를 맺고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문종대에 이르러 국력이 점차 쇠퇴해지고 조정은 문약에 젖어 국방력은 위축되어 있어 사실상 당시로는 날로 성장해 가는 여진족을 압도할 만한 무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더구나 예종 때의 여진족은 고려의 왕은(王恩)을 구걸하던 종전의 여진(소위 숙여진·熟女眞)이 아니고 불과 5,6년 후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여진(소위 생여진·生女眞)이었다. 그리고 9성의 환부를 요청할 때 그들은 이미 만주 대부분을 장악하여 고려보다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중구 대륙까지 넘보고 있었다. 당시 고려가 그들과 싸워 국지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확대된 전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9성 환부 문제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동북아의 정세와 피아간의 국력을 가늠하고, 국익을 위해서 9성 환부가 옳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임의의 경우, 아들 원후(元厚)가 윤관의 사위로 서로 사돈관계에 있어, 정대하지 못한 명분, 이를테면 윤관의 공을 시기한다든지 하는 소인배 같은 생각으로 9성환부를 주장할 처지는 아니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은 얼마 후 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해 고려는 부득이 사대의 예로서 국교를 맺게된 데서도 나타났다.

따라서 임의를 비롯한 9성환부 주장파들도 화의로서 나라도 지키고 백성을 전화의 도탄에서 구출한 셈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중기 이후 정안 임씨 중앙문벌귀족으로 성장

9성환부가 끝난 후 임의는 계속해서 본직인 중서시랑평장사로 재직하다 예종 5년에 수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상주국 훈위를 받고 치사(致仕:은퇴)한 뒤 또 좌리공신(佐理功臣)호도 더 받았다. 은퇴 후에 예종 12년(1117)에 별세하니, 향년 77세였다. 왕이 깊이 애도하여 조회를 파였다. 시호는 정경(貞敬). 뒤에 인종이 중서령을 추증하였다.

임의는 청렴 순정한 성품에 뛰어난 학문을 지니고 재상에 오른 사람으로 처신이 신중하고 겸허하였다. 이런 여러 장점 때문에 문·순·선·헌·숙·예(文順宣獻肅睿) 6조를 거치면서도 잦은 권력변동과 문벌 귀족들 틈바구니에서도 정치적인 좌절을 겪지 않고 70세까지 고위 관직을 누릴 수가 있었다. 특히 숙종이 헌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던 과정에서 숙종과 대립했던 평장사이자 외척 이자의(李資義) 편에 섰던 장군 택춘등 20여명이 죽음을 당했고, 대신 50여명이 유배되기도 했던 것이다.

임의가 거친 관직도 퍽 다채롭다. 삼성·육부·대간·중추원 등의 요직을 거친 다음 재상에 올랐

고, 사관(史館)·한림원(翰林院) 등 문한직(文翰職)도 거쳤다. 이러한 임의로 인해 정안임씨는 고려 중기 이후 중앙의 대문벌귀족으로 올라서는 요지부동의 주츳돌이 되었다.

임의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원숙(元淑)은 중서시랑동평장사, 2남 원후(元厚)는 문하시중, 3남 원준(元濬)은 평장사로 세 아들 모두가 재상 반열에 오르는 기록을 낳게 한다.

임의 묘지명 국역문

*찬자 : 황보한(皇甫翰) *서자‧각자 : 미상(未詳) *연대 : 1117년(예종 12년) * 유형 : 묘지명(墓誌銘)·묵서명(墨書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크기 : 세로 70.5cm, 가로 43cm, *글자크기 : 1cm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서체 : 해서(楷書) *지정사항 : 비지정문화재 * 저작권 및 이용범위(연구정보 저작권)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지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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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좌리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 수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형부사 상주국(佐理功臣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傅 守太尉 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刑部事 上柱國)을 〈지냈으며〉 치사(致仕)하고 돌아가신 정경공 임공(任公, 임의) 묘지명-문림랑 보문각교감 군기주부동정(文林郎 寶文閣校勘 軍器主簿同正) 황보한(皇甫翰) 지음.

공은 이름이 의(懿)이고 자는 충공(忠恭)이며 성은 임씨(任氏)로, 나주(羅州) 정안(定安) 사람이다. … 공은 진사(進仕)에 응시하여 함옹(咸雍) 6년(문종 24년, 1070)의 어시(御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郎)을 제수받았고, 국원공부전첨(國原公府典籖)으로 옮겨갔다. 태강(太康) 8년(문종 36년, 1082)에 관례[例]에 따라 〈외직으로〉 나가서 충주목서기(忠州牧書記)가 되었다. 선종(宣宗)께서 즉위하시자 〈그를〉 불러들여 신호위녹사참군 겸 직한림원(神虎衛錄事叅軍 兼 直翰林院)으고 삼으셨고, 〈그는〉 내시(內侍)에 들어 주문[奏]을 주관하였다. 3년이 되지 않아, 시합문지후(試閤門祗侯)가 되었고 여러 차례 옮겨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이 되어 비은어(緋銀魚)를 하사받았으며, 다시 〈옮겨가〉 우사원외랑(右司員外郎)이 되었다. 태안(太安) 10년(선종 11년, 1094) 이부낭중 어사잡단 지제고(吏部郎中 御史雜端 知制誥)로서 중추원 우부승선(中樞院 右副承宣)이 되어 복금자(服金紫)를 하사받았다.

숙종(肅宗)께서 즉위하시고 반란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 어지러웠고, 조정에서는 모두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寒懼重足]. 이때는 공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우승선(右承宣)이 되어 금중(禁中)을 드나들었는데, 말과 얼굴빛이 침착하고 태연하였다. 사람들 중에 오래된 원한[宿憾]을 가지고 공을 무고하여 해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 숙종께서는 공이 순진하고 정직하여 다른 마음이 없음을 올바르게 판단하시고 〈무고하는 말을〉 듣지 않으셨다. 〈숙종께서〉 마침내 공에게 명령하여 왕위 계승의 일[嗣事]을 북요(北遼)에 알리도록 하였고, 공이 돌아오자 조산대부 형부시랑 충사관수찬(朝散大夫 刑部侍郎 充史館修撰)으로 임명하셨다. 수창(壽昌) 2년(숙종 원년, 1096)에 섭사재경(攝司宰卿)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전주목사(全州牧使)가 되었고, 다스림에 명성이 있었으며 〈다시〉 들어와서는 태복경 간의대부(大僕卿 諫議大夫)가 되었다.

〈수창〉 6년(숙종 5년, 1100)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중국에 〈갔다〉. 공이 부사[副]가 된 것을 〈사람들은〉 재물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모독하였으나, 공은 그들을 비웃으며 바라보았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공의〉 행동거지[擧止]가 법도에 알맞으니 송나라 사람들은 그를 보고서 공경했다. 〈그가〉 돌아오자 임금께서는 그 씩씩한 모습[麃]을 아름답게 여기어 어사대부(御史大夫)의 벼슬을 내리셨고, 〈공은〉 예·병 2부의 상서(尙書)와 태자첨사(大子詹事)를 지냈다. 건통(乾統) 4년(숙종 9년, 1104)에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추밀〉원사 이부상서 겸 태자빈객 판삼사사(院使 吏部尙書 兼 大子賓客 判三司事)로 옮겼다. 지금의 임금[今上, 예종]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자, 검교사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추밀원사(檢校司徒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樞密院事)로 임명되었으며, 〈건통〉 6년(예종 원년, 1106)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이전에 장옥(場屋)에서 〈과거〉 문제가 출제되자 헐뜯는 바가 많아서, 논의가 시끄럽고 주사(主司)를 움직여 시험을 다시 치르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공이 출제하자 이치가 시사(時事)에 적절하였으며 말은 새로우나 근거가 있었고, 뽑힌 자들 또한 한 시대의 이름난 선비들이었기에 학자들은 〈이를〉 미담으로 여겼다.

…(중략) 〈건통〉 9년(예종 4년, 1109) 7월에 공에게 절월(節鉞)을 주고, 지금의 상국(相國)인 김연(金緣)註 001을 그의 부사로 하여, 가서 여진을 타이르고 빼앗은 땅을 돌려주게 하였다. 여러 장수가 밖에 있으면서 힘겨운 싸움을 한 것이 오래되었으므로, 병사를 거두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듣자 곧 기장(器仗)을 뒤섞어서 불태워버렸고, 성을 버리고 나와서 돌아가려고 하였다. 공이 도달하여 그것을 그치라고 명령하며 이르기를, “오랑캐가 비록 승세를 탔지만 우리를 헤아리지 못하므로, 지금 〈우리가〉 만약 〈군사를〉 거두어들이기를 도모하고, 강함을 보여줌으로써 타이르지 않는다면 훗날 반드시 근심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은〉 오랑캐 추장을 불러 거스르면 화가 미치고 따르면 복이 온다[逆順禍福]는 말로써 타일렀으니, 몹시 조리가 있었다. 오랑캐가 모두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맹세하여 이르기를, “다시 옛 땅을 얻을 것으로 만족하니, 어찌 감히 그릇된 마음이 들겠습니까, 바라건대 대대로 침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군사를 내어 싸움을 단속하고 군량[資糧]을 갖추고, 성을 비우고 그것을 부수고 허물었다. 이후에 그 땅을 오랑캐에게 돌려주고, 노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옴에 이르렀는데, 감히 〈그들을〉 침탈하는 자가 없었으며, 지금에 이르러 나라가 〈이에〉 힘입어 평안하게 되었다.

…중략)…

공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언행을 삼갔고, 세 조정의 〈임금을〉 대대로 섬기면서 험난한 곳과 쉬운 곳에 드나들면서, 작은 과실조차 없었다. 더욱이 선종[宣廟]께서 총애[寵遇]하셨는데도 영예로움과 귀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서서 논의할 때는, 일의 낌새를 나서서 헤아렸으며, 〈그의 주장이〉 당시에 혹 다 쓰이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차례차례 그것이 증험되니 과연 공의 말과 같았다. 집에 거처할 때는 재산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비록 아이나 부녀자와 함께 말하더라도 업신여기고 속이지 않았고, 손님을 모실 때는 담백한 듯하였으며 〈사귐이〉 오래되어도 더욱 친하였다. 늙어서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함에 이르러 오직 방약(方藥)을 점검하고, 불서를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일찍이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 백 년을 사는 것을 하룻밤의 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질병과 고통이 없었고, 문득 눈을 감은 것 같았는데, 마침내 돌아가셨다. 아아, 독실하게 행하는 군자라 할 만 하구나.

공은 위위시경(衛尉寺卿)으로 추증된 이제정(李齊頲)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부인은〉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으로 봉해졌다. 아들은 둘인데 장남 임원숙(任元淑)은 합문지후(閤門祗侯)이고, 막내 임원애(任元敳)는 국자감주부(國子監主簿)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좌사낭중(左司郎中) 진가유(陳嘉猷)와 혼인하였고, 둘째는 비서소감 어서검토관(秘書少監 御書檢討官) 이향(李珦)과 혼인하였다. 공을 장사지낼 때, 그의 아들 임원애는 편지로써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사양하지 못할 뿐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이른다.

(하략)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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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世家 卷第十三>睿宗 4>7정사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임의(任懿)를 권판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事 兼 行營兵馬使),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김연(金緣)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였다. 丁巳 以中書侍郞平章事任懿權判東北面兵馬事兼行營兵馬使, 右諫議大夫金緣副之.

2) 고려사世家 卷第十三>睿宗 4>11재상 최홍사(崔弘嗣이오(李䫨임의(任懿) 등이 대간과 함께 다시 윤관(尹瓘) 등의 문책을 주청하였다. 戊辰 宰相崔弘嗣·李䫨·任懿等與臺諫, 復請尹瓘等罪

3) 《고려사卷九十六>列傳卷第九>諸臣>윤관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김경용(金景庸)과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왕을 뵙고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에게 패배한 죄를 물을 것을 극론(極論)하니 平章事崔弘嗣·金景庸·叅知政事任懿·樞密院使李瑋, 入對宣政殿, 極論瓘·延寵敗軍之罪,

4) 고려사>世家 卷第十四>睿宗 12>5(1117525-- 임자壬子) 임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의(任懿)가 사망하였다.

5) 고려사절요8>예종 문효대왕2 5월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임의(任懿)가 졸하였다. 임의는 젊어서 힘써 공부하여 과거에 뽑혔는데, 선종(宣宗)이 태자로 있으면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왕께 아뢰어 전첨(典籤)을 삼았으며, 즉위한 후로는 여러 번 승진하여 우승선에까지 이르렀다. 숙종조 초에 나인(內人)이 묵은 감정을 가지고 여러 번 참소하였으나, 숙종이 임의의 순정하고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참소의 말이 끝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五月門下侍郞平章事致仕任懿少力學擢弟宣宗在藩邸素聞其名奏爲典籤及卽位累遷右承宣肅宗初內人以宿憾屢譖之肅宗雅知懿純正無他讒言卒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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