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수상 -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다
■장흥수상 -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6.1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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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 수필가

모든 것이 허공을 향해있을 때 / 연약한 가지하나를 붙들고 흠모하는 모습에서 / 흠칫 놀라운 사실하나가 돋았다 / 떠오르는 것은 두근거렸던 망상 / 폐허된 것, 변색된 것들에게 도드라지게 색을 입힌다// 그때서야 이유를 알았다/ 한 옥타브 올라온 기억에 / 더 농밀해진 사실은 풀어지고 / 터무니없는 변명에 갇혀둔 것들이 쏟아지고서야 / 납작 엎드린 어리석음이 빠져 나간다 // 귀를 쫑긋거렸다 / 빈틈을 채우는 빛의 소리를 보았다 / 아슬아슬하게 오고 있는 그림자도 보았다 / 구름에 미끌려 오듯 들어오는 희미한 모습도 보았다/ 어둠이 채워가듯 조금씩 채웠다/ 허공을 채웠다 /그림자가 지나갔을 뿐이다

〈 졸시, ‘그림자가 지나갔을 뿐이다’ 중에서〉

바람이 나뭇가지로 쫓겨 가는 유월의 산길은 자연의 외경심이 풍족합니다. 금창초와 산딸나무가 핀 유월 숲에는 비릿한 풀냄새와 봄의 마지막 꽃, 밤꽃 냄새가 질펀합니다. 밤꽃은 마지막 오월을 알리는 꽃입니다. 밤꽃이 필 때면 비가 내리고, 그 빗물이 실개천을 깨우고 여름을 마중합니다.

며칠 전, 익숙하지 않은 곳에 내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지 않아도 괜찮을 곳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누군가는 눈부시게 빛나는 자리일지 모르겠습니다. 무성한 요란과 정제되지 않는 곳을 벗어나 오랜만에 푸르청청한 숲길을 걷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리, 아무도 경쟁하지 않는 산길에서 살 오른 어린나무와 가지 끝에 힘을 주고 서 있는 늙은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며 너덜거리는 마음을 내려놓고 숲과 하나 되어 걷습니다.

소리가 멈춘 숲에서 거침없이 외치는 자유로운 시간입니다. 질식된 과학 문명에도 노마드적 삶을 갈구하고픈 하루입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에 술렁이는 기쁨마저 잠재우며 낮은 자리를 찾아갑니다.

숲을 점령한 새소리는 내게 청량감을 줍니다. 모든 생명체 삶의 소리입니다. 이런 요란 속에 꽃바람이 가득했을 오월의 단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새들이 오고 가는 익숙함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새들의 구역을 첨벙거리듯 점령했습니다. 한 걸음 내 디딜 때마다 새들의 절박한 소리를 듣습니다. 낯선 자의 침입을 알리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그들은 긴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자연계의 생명적 파동입니다. 이 소리는 청량감이 있어 복잡해진 머리가 사뿐해집니다. 이것이 자연입니다. 풍요로운 자연의 소리입니다. 새소리와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에 닫힌 오감이 조금씩 열립니다. 호흡은 낮아지고 들뜬 마음이 가라앉으며 자연과 숨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오늘은 세로토닌이라는 행복 물질보다는 옥시토신이라는 사랑의 물질이 더 많이 분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낯선 곳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치열함을 바라본 내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관계를 풀어가는 사랑의 물질인 옥시토신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너덜거리는 마음에 힐링이 필요합니다. 나무는 제 몸의 전부를 내게 주고 서 있습니다. 그것이 숲이 내게 주는 절정의 배품으로 받아들입니다.

국립공원의 아버지, 숲의 성자, 자연 보호의 선구자 등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환경 운동가인 존 뮤어(John Muir,1838 ~ 1914)는 숲을 걸을 때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침묵 속에서 홀로 걸어야 진정으로 야생의 심장 안에 들어설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미국의 삼림 보호를 처음으로 주장하여 캘리포니아주의 요세미티와 세코이아 국립공원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우주로 가는 가장 선명한 길은 야생의 숲을 지나는 길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숲에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숲에서는 생각을 버리고 언어를 내려놓아야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숲에서는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숲이 주는 단순함과 조용한 위대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여름, 힘들게 지리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불편함을 즐기며 고통스러움이 익숙해지고서야 생경하고 가슴 뿌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리산 반야봉 아래 법의 자리인 묘향암 마루에 앉아 아침 해가 숲을 깨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집고 나온 숲의 바람이 내게 왔습니다. 맑고 생동감 있는 새벽바람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순간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자연이 내게 베푸는 은혜로움임을 알았습니다.

야생화는 경이롭습니다. 그리고 눈 맞춤했을 땐 반갑고 정겹습니다. 나도 모르게 코끝을 세워 진한 향기를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숲에 핀 꽃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야생이 처절하기에 화려한 곁가지는 버리고 소담하고 고고하게 핍니다. 지리산에 피는 붉은 동자꽃은 살아남기 위해 눈에 잘 띄는 곳 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주치곤 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보일 듯 말 듯 한 언덕배기에 줄기 하나 뻗어 핀 인동초와 눈 맞춤을 합니다. 흐드러지게 뒤덮은 인동초 무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매년 풀베기로 인동초가 군락을 이룰 수 없습니다. 딱 한줄기가 뻗어 나와 피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꽃입니다.

몇 년간 산길 풀베기 작업으로 여름, 가을 야생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야생화가 지천입니다. 자신을 만지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졌다는 키 큰 엉겅퀴가 꽃대를 살랑이며 반겨줍니다. 하얀 꽃불을 밝히고 있는 산딸나무와 눈썹 하나를 뽑아주고 따 먹었던 뱀딸기가 탐스럽게 붉습니다. 새콤달콤한 산딸기 하나를 입에 넣고 일상의 소음과 분주함을 잊고 쉬엄쉬엄 걷는 산길이 참 좋습니다.

산바람이 우듬지 사이를 비집을 때면 새들은 소리로 숲을 채웁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어 행복합니다. 무거운 침묵이 지그시 누르는 유월의 숲속에 뻐꾸기 울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어슬렁거리며 듣습니다. 잔잔한 소리입니다. 곰삭은 듯한 자연의 소리에 묻혀 노마드적 삶을 꿈꾸는 이 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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