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취재 - 장흥 용화사에 10∼12세기 사찰 터 확인 “장흥 용화사 10∼12세기에 건립됐다”
■현장 취재 - 장흥 용화사에 10∼12세기 사찰 터 확인 “장흥 용화사 10∼12세기에 건립됐다”
  • 김선욱
  • 승인 2022.06.2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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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용화사에서 현장설명회 개최
석조약사여래좌상 서남쪽 - 고려 때 조성된 건물 터 기초부 확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 “석조여래석불상-체계적인 복원‧정비 필요”
미술사학계 거물 정영호 박사 - “ 용화사 석불 국보급 이상” 찬탄

■현장 취재

 

김선욱 시인 본지편집인
▲장흥 용화사 약사전 앞 발굴 모습. 이곳에서 10~12세기 사찰 건물지가 발굴됐다.

 

 

 

 

 

 

 

 

 

 

 

 

약사여래좌상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은석)은 장흥 용화사 내 석조약사여래좌상 앞쪽 서남편에서 고려 시대에 조성된 건물터 기초부가 일부 확인되어 531일 오전 11시 장흥 용화사(주지 경호스님)에서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하면, 올해 4월부터 사찰 경내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하였고, 이결과 석조약사여래좌상 앞쪽 서남편에서 고려 시대에 조성된 건물터 기초부가 일부 확인되었다.

이 건물 터는 주춧돌 하부의 적심석(돌을 쌓을 때 안쪽에 쌓는 돌)4개소, 전면 석축기단 9m, 후면 석축기단이 약 3m가 남아 있었고, 기단 앞쪽으로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이는 작은 연못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건물지 내부에서는 통일신라 말고려 시대 기와 조각과 11세기대 고급 청자 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 밖에도 아궁이시설과 돌로 만든 경계(석렬, 石烈)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최소 3차례 이상 건물의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시기적으로는 1012세기 중심의 유물로 건물지의 연대를 유추할 수 있다. 현재 3×1칸 건물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으나 약사여래좌상을 모신 건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용화사 전경
▲고(故정영호 박사-우측에서 두 번째-가 석불 복원, 국보지정을 주창하고 있다.(사진-안중헌)

 

 

 

 

 

 

 

 

 

 

 

 

 

 

 

 

 

 

 

 

 

 

 

 

 

 

 

 

 

 

 

 

 

 

 

 

 

 

 

 

 

 

 

 

 

 

 

 

 

장흥 용화사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전남유형문화재)이 모셔져 있고, 18세기부터 불자사터(拂子寺址)라고 알려져 있던 곳이다. 사찰과 약 500m 거리의 석교마을에는 사찰에서 사용된 대형의 석조유구가 남아 있다. 2021년 이 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 앞마당에서 통일신라 소형금동불상과 납, 수정으로 만든 구슬이 발견되어 올해 4월부터 사찰 경내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최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 위해 용화사 경내 유물 발굴조사 결과, 석조약사여래좌상 앞쪽 서남편에서 고려 시대에 조성된 건물터 기초부가 일부 확인되었다.

■ ‘○風寺’ 기와편 발견-사찰 명칭 연구 필요

이 건물 터는 주춧돌 하부의 적심석(돌을 쌓을 때 안쪽에 쌓는 돌)이 4개소, 전면 석축기단( 기단 : 건물의 터를 평평하게 한 후, 단을 높게 올리고 그 내부에 주춧돌을 올리는 건물기초시설. 보통 바깥면을 돌로 쌓는 석축방식이며, 기와로 쌓는 와적방식 등도 있다) 9m, 후면 석축기단이 약 3m가 남아 있었고, 기단 앞쪽으로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이는 작은 연못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또 건물지 내부에서는 통일신라 말∼고려 시대 기와 조각과 11세기때 고급 청자 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 밖에도 아궁이시설과 돌로 만든 경계(석렬, 石烈) 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최소 3차례 이상 건물의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시기적으로는 10∼12세기 중심의 유물로 건물지의 연대를 유추할 수 있다. 현재 3×1칸 건물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으나 약사여래좌상을 모신 건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 이번 발굴에서 ‘○風寺(○풍사)’라고 추정되는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사찰 명칭에 대한 추가 연구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의 용화사 주변에서 상감청자와 조선 시대 분청사기, 백자 편 등도 수습되어 꽤 오랜 기간 법통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석조여래좌상-체계적인 정비 필요

현재 사찰 입구의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오른팔과 허리 아래 부분이 결실되었지만, 부드럽고 통통한 얼굴에 미소를 살짝 머금고 있는 형상이다. 약함(藥函)이 있었다고 전하는 왼손은 주름과 손톱까지 묘사하는 등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두터운 법의(法衣 : 승려가 입는 가사나 장삼))와 왼쪽어깨의 가사장식인 띠 매듭 표현은 경주 남산 삼릉계 입구의 석조여래좌상,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과 매우 유사하다. 광배에는 크고 굵직함이 느껴지는 연꽃문양이 조각되었는데 경주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 막새기와 문양과 흡사하다.

이 불상은 남아 있는 높이가 2.5m에 이르는 대형으로, 광배를 포함하면 5m 정도의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서 찾은 광배 파편 2개의 원 위치도 이번에 새롭게 확인하였다.

그러나 1954년에 넘어져 방치된 불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불신의 아래쪽과 뒤쪽을 철근과 시멘트를 발라 지지해 놓았는데 현재 철근이 노출되어 있어 불상의 보호와 관리를 위한 체계적인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다.

장흥 용화사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비슷한 규모는 경주 남산의 상선암 마애여래좌상(5,2m, 9세기)이 있다.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측은 “이 시기 경주지역 불상 등 관련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면 원형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석불 참배객들 전국서 찾아들어

주지하다시피, 용화사(龍華寺 주지 경호스님)는 장동면 북교리 산 43번지(장동면 석교상방이길 89-114)에 위치한 신라 말 고려초기의 석조약사여래불을 모신 사찰이다.

아직은 사찰로서 번듯한 대웅전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영험하다고 잘 알려진 천년된 석불 약사여래가 있어 장흥에서는 유일하게 전국 각처에서 참배 불자들의 기도행이 줄을 잇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지난 2020년 용화사 진입도로가 개설된 이후 대형 관광버스를 동원한 단체 기도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용화사의 시원은 사료 등에 의하면 ‘불자사(佛者寺)’이다.

<장흥읍지>(1747년 간행 정묘지) 장동방 불우조(佛宇條)에 “불자사는 배산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佛子寺 在盃山西 今有遺止”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위치한 용화사가 예전의 불자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1953년경 모인(某人)이 폐사지 방죽에 넘어져 있던 약사여래좌상을 일으켜 세우고 석불 주위로 작은 움막 같은 보호각을 지었으니, 이 석불과 작은 움막 같은 보호각으로부터 용화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03년 현재의 주지 경호 스님이 용화사 주지로 부임해오며, 용화사는 일대 변혁기를 맞이한다. 경호 스님은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안치된 허름한 보호각을 개축한 데 이어, 설선당, 심검당, 다향각, 화장실 등을 복원하며 어느만큼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특히 석붕 여래불을 참배하기 위해 사찰을 찾는 참배객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 경호 스님- “약사여래불에 큰 감화”

경호 스님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용화사로 이적하게 된 계기로 “당시 움막 같은 곳에 갇혀 있던 석불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저의 게으른 선수행을 질타하는 듯 활짝 열어젖힌 눈매며 기상이 넘치는 듯 우뚝 솟은 콧날, 자애가 넘치는 듯한 도톰한 입술...저는 이런 천년고불인 약사여래불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하룻밤을 유하는데 부처님이 현몽하기도 했고, 새벽에 몸이 그렇게 가뿐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용화사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약사여래불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용화사로 온 이후 경호 스님은 첫째로 콘크리트 좌대 위에 앉아 있고 상당히 훼손 되어 있는 석불을 복원하는 불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2003년 매미 태풍 때 약사여래불 보호각이 무너지는 참변을 당했고, 이후 군의 긴급 복구사업으로 보호각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경호 스님은, 스스로 수십 번 체험하기도 했지만, 약사불을 참배한 수많은 불자들로부터 약사여래부처님의 영험함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 미술사학의 거목인 정용호 박사가 용화사를 다년간 2016년 이후, 약사불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거듭 확인하고는 약사여래불의 복원사업과 국가지정 문화재인 국보, 보물 지정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용화사의 약사여래좌상은 1974년 9월 24일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바 있다)

경호스님은, 석불의 복원에 이은 또 한 가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당우에 약사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대웅전 불사를 추진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불사의 꿈은 2016년 8월 2일, 전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으로 한국 고고미술사학계 거목인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방문하고 나서였다.

고(故) 정영호 박사-“석불 국보급 이상”

고(故)정영호 박사는 1950년대부터 수백여 점의 유적 및 유물 발굴에 앞장섰던 국내 최고의 미술 사학계의 거봉이었다. 그가 발굴한 단양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발굴 등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양양군 진전사지의 6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부도(보물 제439호)와 석탑(국보 제122호) 발굴 등으로 국내 첫 폐사지 복원의 역사를 일궈내는 큰 기여를 했으며, 1977년 이후 2016까지 200여 회에 걸쳐 일본 대마도를 방문, 왕인 박사를 비롯한 선현들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 정영호 박사가 지난 2016년 용화사를 방문한 것이다. 이때 동행한 분들이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인 안장헌 씨, 박기선 박사(정영호 박사 제자), 순천대 사학과 교수 최인선 씨(순천대학교 박물관장) 등이었다.

특히 안장헌 사진작가의 경우, 국내의 불상 사진만 수십만 점을 보유할 정도로 불상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용화사 석불과도 인연도 있었던 불상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안장헌 씨는 지난 2002년 3월 5일, 처음으로 용화사를 찾아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용화사는 석불의 보호각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변변한 요사채마저 없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용화사의 석불은 광배(光背)와 불신(佛身)을 커다란 하나의 돌에 새겨놓은 좌불상이었다. …석불이 오른손은 잃었으나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었을 여래좌상이 분명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호는 그윽한 자비의 미소를 듬뿍 머금은 부드럽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비록 손상되고 결실되기는 하였으나 입체감이 매우 좋은 당당한 몸매에서 원숙한 조각가의 불심을 읽을 수 있었으며 배 모양의 광배에는 조식이 화려하고 양감도 좋아 부처의 몸에서 발산되는 광채를 표현하였는데 둘레가 많이 결실되어 아쉬움이 컸다”(네이버 블러그-‘안장헌의 문화유산과 사진 이야기’)

그리고 안장헌 씨는 2003년 2월, <석불-돌에 세긴 정토의 꿈>(한길아트 발간)이라는 불상 사진집을 펴냈는데 여기서도 용화사 석불을 소개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응 스님과 인연이 되었고, 이후에도 3회(2004년 10월, 2005년 7월, 2016년 8)에 걸쳐 용화사를 더 찾았으며, 2016년 8월 2일 정영호 박사가 용화사를 찾았을 때도 용화사를 다시 방문했던 것이다.

■“용화사 석불-복원, 국가지정 문화재 추진할 터”

경호 스님은 “2016년 8월, 용화사 석불을 일견한 정영호 박사는 수많은 불상을 봐 왔지만 이처럼 대단히 훌륭해 뵈는 불상은 처음이다. 국보급 이상이다. 내 생애에서(당시 80세) 마지막으로 진선사 복원(예전 진선사지 발굴을 주도했다)과 함께 이 불상 복원도 추진해 보고 싶다, 더불어 이 석불의 국보급 지정 운동도 함께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정 박사와 함께 방문했던 안장헌 씨도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석불을 참배하고 우러러 보면 불상이 주는 아우라(Aura:예술 작품 등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고유한 분위기나 기운)가 너무 강렬했다, 수십만 장의 국내 불상 사진을 찍은 내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용화사의 약사여래불의 복원과 국보급 지정 운동은 정영호 박사를 위시해서 본격 추진되는 듯했으나, 그 이듬해인 2017년 4월 27일 정영호 박사가 갑자기 별세, 용화사의 약사여래좌상의 복원과 국보급 지정 운동은 이후 정체되고 말았다.

용화사(龍華寺)라는 절 이름은 미래의 불국정토가 실현된다는 용화(龍華)세계에서 따온 사찰 이름이다. 그런데 이 용화사에서 본존불은 미륵불도 아니고 약사여래불, 즉 약사여래좌상이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불자에게 무상보리(無上菩提)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는 부처이다. 그러므로 장동 북교리의 용화사는 이상(理想)으로 불국토를 지향하지만 현실(現實)에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해주는 사찰인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지만 이상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사찰이 장동 북교리의 용화사인 것이다.

■ 약사불을 본존불로 모신 대웅전 불사도 추진

경호스님은 이번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용화사 유물 발굴 및 석불 상태 점검 조사 발표를 계기로 약사여래 복원 불사에 대한 발원의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연중 전국에서 찾아오는 참배객들이 5백여 명에 이르는데, 아직도 보호각이 비좁아 겨우 10여명 밖에 못 들어가는 실정입니다. 천년고불을 모신 법당치고는 너무 초라합니다. 그것도 절 입구 길에 떡 버텨있어 바람 불면 먼지가 법당으로 들어와 1년 내내 문도 못 열어 놓고 있습니다. 또 70~80년대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좌대가 부식되어 석불이 기울어가고 있고, 시멘트 독으로 석불이 백화현상으로 부식되고 있습니다. …하여 약사여래불을 제대로 복원도 하고, 제자리에 모시는 정비 사업을 추진하려는 것입니다. 그동안 약사여래불에 대한 문화재적, 불교 미술사적인 가치에 대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극찬하고, 심지어는 국보급으로 지정되고도 남는다며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측에서도 이 석불과 동시대에 축조된 경주지역의 불상 등 관련 자료를 토대로 심층연구를 진행하면 원형 복원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유물 발굴 조사를 계기로, 전남도나 장흥군 등 관계 당국에서는 약사여래불 복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련 예산을 확보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용화사 경호스님의 비원의 목소리였다.

경호스님은 또 약사여래불 복원‧정비와 함께 또 한 가지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새로운 당우에 약사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대웅전 불사를 추진하는 일이다. 이 꿈 역시 오래전부터 가져온 바램으로, 나름대로 대웅전 불사 불사에 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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