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장흥고문학-기록문학(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 김선욱
  • 승인 2022.07.2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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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후는 공예태후의 부친이었다(하)
정안임씨들 중앙의 정치 무대 기둥으로 뿌리내린 시발점 돼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지난 157호에 이어>

다시 맞이한 서경 천도의 광풍

인종 4년(1126), 딸이 왕비로 들어가고 이듬해에 예빈소경(禮賓少卿-외국에서 온 빈객賓客의 연향宴享을 맡아보는 예빈성禮賓省과 국왕의 빈객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종친 및 대신들에게 음식을 내릴 때 그 소임을 맡아보던 관아인 예빈시禮賓寺에 속해 있는 종4품 관직)이 된 임원후는 이때부터 승진 가도를 달려 12년(1134)에 평장사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7년간은 공교롭게도 묘청을 중심한 서경세력이 출현하여 몰락에 이르는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처럼 나라가 또 한 바탕 크게 요동치는 과정에서 임원후는 다시 그의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되자마자 조정에는 다시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으니, 그것은 묘청(妙淸,?~1135)의 등장(인종 5년)으로 불붙은 서경 천도 운동과 그에 기인한 반란 사건이었다.

묘청은 1135∼36년 고려 서경(西京-평양) 출신의 술승(術僧)으로, 국내가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여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이 횡행하였던 국내정세와 당시 유행하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 인종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특히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開城)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인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운동을 펼친다. 묘청은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 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묘청 일파의 지나친 세도와 농간이 폭로되면서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으며,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인종의 서경천도 중지 명령이 나오고, 이로 인해 묘청 등이 조정에 반기를 들면서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부르면서 난을 일으키니 바로 '묘청의 난'이었다.

묘청 배척 선봉장, 강직성 보여

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반란이 임원후에게는 또 하나의 시금석(試金石)이 되었다. 이지적이고 분별력이 뛰어나 묘청의 망설, 요언(妖言)을 일찍부터 간파하였던 임원후는 조정의 모든 관료들 모두가 묘청을 맹신·맹종하였던 와중에서도, 묘청을 그대로 놓아두면 장차 나라에 큰 환난을 가져올 것임을 미리 꿰뚫어 보고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묘청의 지지세가 등등하니 외로운 싸움이었고 섣불리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다.

갈수록 묘청의 권세가 높아지자, 사직의 앞날을 생각하여 더 이상 좌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임원후는 별러온 끝에 마침내 묘청 탄핵의 포문을 열었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는 인조 10년(1132) 8월에 왕에게 상소하여 묘청 등을 죽여 화의 싹을 자르고 국가 기강을 바로 잡기를 요청하였다. 묘청에 혹해있던 왕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의 상소가 도화선이 되어 견고하던 묘청의 성역은 점차 깨뜨려지고 묘청 반대 움직임은 마침내 터진 봇물의 세로 바뀌었다. 그 동안 묘청이 하는 일에 내심 거부감을 가졌던 뜻 있는 유신들이 대세에 밀려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다가 임원후가 선창하게 되자 줄줄이 상소가 이어졌던 것이다.

인종 11년 11월에 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 배제를 상소하였고 인종 12년에 임완(林完)이 묘청 주살(誅殺)을 상주(上奏)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김부식(金富軾,1075~1151년)이 서경 천도 반대 소(疏)를 올렸다. 이렇듯 임원후는 묘청 배척 공론화에 앞장서 불을 지핌으로써 역사의 물굽이를 크게 돌려놓았다. 잇따른 상소로 정론(廷論)이 반전(反轉)하여 묘청 등에게 불리하게 되자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조 13년(1135)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묘청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즉시 토벌군을 발동하고 임원후와 김부식을 각각 중군 원수(中軍元帥)로 임명하였다. 임원후는 후방에서 개경 보위의 임무를 맡았고 김부식이 일선을 맡아 정토(征討)에 나섰다. 김부식은 14년 2월 서경을 함락하고 난을 평정한 다음 4월에 개선하였다. 이렇게 두 원수가 전후방에서 힘을 합쳐 반란을 진압하고 왕실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묘청의 난 평정에 대개 전방을 맡은 김부식이 화려하게 부각된 반면 임원후는 그늘에 가려진 존재로 비쳐지나, 그도 같은 원수로 전시의 수도를 위수(衛戍)하여 안정시켰으니 그 공 또한 혁혁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직을 지킨 공신 즉 위사지신(衛社之臣)으로 일컬어진다. 묘청의 난이 평정 된 후 임원후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지고 벼슬길도 순항을 계속해 15년(1137)에 검교태보 수사도 판비서성사(檢校太保 守司徒 判秘書省事), 16년에 태부(太傅), 17년에 서경 유수사(留守使) 18년에 판상서병부사, 19년에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겸양과 공명 … 4차례 사퇴 상소

임원후는 국구 신분으로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사심 없이 국정에 임하고 바르게 처신하였으며 직위가 오를수록 더욱 삼가고 겸양하였다. 19년에 그가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네 번이나 왕에게 상소하여 최진(崔溱- 생몰 미상.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을 위해 그 자리를 사양하겠다고 간청하였다. 네 번의 사퇴 상소에 대한 왕의 불윤비답(不允批答) 내용을 보노라면 임원후의 사람 됨됨이를 소상히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면 상소에 대한 비답은 즉, "…임원후에게 알리노라. 두 번째 표를 올려 이유를 진술하여 모직에서 사면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모(某)를 천거해서 대체해 달라는 일은 살펴서 다 알았다. 나라의 안위가 재상에게 매였음을 생각하면 사람의 동지(動止)가 팔다리에 달린 것과 같으니 진실로 서로 돕는 친근한 사이가 아니면 어떻게 임금이 가만히 있어도 절로 되는 정치를 이룩하겠는가. 경은 혼후(渾厚)한 도량에 고명한 재주를 가졌다. 지벌(地閥)은 외척을 겸했고 직위는 재상의 요직을 차지했다. 허물을 고쳐줌으로써 짐의 마음을 열어주고 유학을 인용함으로써 나라의 정치에 협찬했다. 그 공로가 많았으니 그 갚음도 응당 커야겠다. 그러므로 승진하는 절차에 따라서 재상의 중임에 앉혔다. 천관(遷官)은 차례에 따른 것이요, 임명은 사정(私情)으로써가 아니다. 어째서 무능하다고 핑계하면서 도리어 동렬(同列)에게 미루는고. 한호(罕虎)가 자산(子産)에게 정권을 넘겨 준 것이 비록 옛일로서 전해오지만, 백익(伯益)이 웅비(熊 )에게 사양한다고 해서 어디 이미 내린 명이 철회되었던가. 겸손을 지킴을 고집하지 말고 알뜰히 기대하는 심회에 부합되게 할지어다" 였다.

또 세 번째 사면 상소에 대한 비답은, "…경이 진작 추부(樞府)로부터 아상(亞相)의 자리에 올라 한결같은 덕으로 만백성의 사표가 되었다. 부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공명(功名)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공명에 좌우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짐이 허심(虛心)으로 맡기려 함이요. 백성들이 모두 국정을 잡기를 바라고 있거늘, 경이 어찌 겸양을 고집하여 여러 번 추천을 받고도 사양만 하는가…"였다.

그래도 임원후가 사면상소를 올리자, 인종은 그에 대한 답으로 다시,"…경의 문(文)은 나라의 꽃이 되고 기국(器局)은 천작(天爵)을 쌓았다. 크고도 확고한 논의가 족히 국가의 계책을 정할 만하고 높은 덕망과 풍도(風度)는 넉넉히 당세(堂世)를 감복할 만하다. 추밀(樞密)의 요직을 맡겼더니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였다. 마땅히 수상의 높은 지위에 올리니 대신의 할 일을 다하라. 국내의 이의가 없고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터이다. 경이 응당 제 몸만 위하는 생각을 버리고 여망(與望)의 중함에 보답하리라 생각하더니 글을 여러 번 올려 뜻을 지킴이 더욱 굳고 물러가 사저(私邸)에 엎드려 오래 정무를 미루니 이는 짐이 경에게 기대하는 뜻과 매우 어긋나고 또한 경이 짐을 도와주는 정성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뭇 관리의 서정(庶政)조정, 민생문제, 외교정책 등을 해결해야 되는 중대한 시기여서 훌륭한 계획이 있어야 할 때임에랴. 혹시라도 그 사소한 근신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원대한 경륜을 넓히도록 힘쓰라. 속히 그 관직에 나아가 나의 뜻을 받들 일이다. 경이 올린 바, 그 직을 사면하는 네 번째 표는 이미 유보했으며 다시 상장함을 금한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무려 네 번이나 사퇴를 청원하는 소를 올려도 왕이 허락하지 않자 그는 부득이 취임하였다. 20년에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가 되어 관리들의 전주(銓注)를 매우 공평하게 집행하여 세인들이 이르기를, "옛날 산도(山濤)가 인재를 등용하는 행정을 잘했다지만 이보다 더 잘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고 칭송하였다.

관직을 양보하고 관리에 대한 인사관리를 공정히 처리한 그 미덕을 국구와 재상의 처지를 감안할 때 후세 공직자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그는 20년 12월에 감수국사(監修國史)를 겸하고 23년(1145)에 수태보판서경유수사의 관직을 더 받았다.

묘청의 난 평정 후 한 동안 나라는 태평하였다. 24년(1146)정월에 왕이 병석에 누웠다. 병세가 악화되자 임원후는 2월 을묘일에 백관들과 함께 선경전(宣慶殿)에 모여 옥황상제에게 왕의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정묘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재위 24년 만에 파란의 일생을 마쳤다. 사위인 젊은 왕을 잃은 임원후는 정신적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임원후-끝없는 영화, 겸허근신으로 절제

인종의 뒤를 이어 장남 현()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의종(毅宗)이다. 외손자인 의종이 즉위하면서 임원후를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정안후(定安後)로 봉하였으며 특별 대우로 조회 때 전상(殿上)에 올라 배려하는 특전을 주었다. 간관들이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다고 논박했을 만큼 융숭한 대우였다. 의종 2(1148)에는 선충안사좌리동덕공신(宣忠安社佐理同德功臣)호와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衛)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받고 또 정안공(定安公)이라는 최고의 작호(爵號)를 받았다. 그리고 왕은 그에게 식읍(食邑) 2천호에 실 식읍 6백호를 주고 부()를 설치하여 수령부(壽寧府)라 칭하고 속료(屬僚)를 배치하였다.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관직과 작위를 모두 겸했다. 훗날의 일이지만 명종(明宗), 신종(神宗) 두 왕도 그의 외손자이므로 외손자 3명을 왕으로 배출한 셈이니 유례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래도 그는 끝없는 영화를 겸허와 근신으로 조용히 누려 세인의 빈축을 산 일이 추호도 없었다. 일찍이 인종은 그를, "관후하여 장자의 풍도가 있고 동정(動靜)은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의종 10(1156)에 화려한 생애를 마치니 향년 68세였다. 한 가지 애석한 일은 의종의 외조부로서 제일 국로(國老)의 자리에 있으면서 노경에 접어든 탓이었는지 왕의 방종과 망국적인 난정(亂政)에 대해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되풀이하거니와 임원후는 경사(經史)에 통달한 학자로서 왕실의 외척이요, 최고의 관직과 훈작을 누린 신분이지만 끝까지 근검·청렴·겸허의 미덕으로 일관하여 상하의 존경을 받았다. 또 판이부사로서 관리 전형을 공정히 하고 두 번 지공거를 맡아 과거 관리를 적절하게 잘해 칭송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고려조를 빛낸 한줄기 빛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임원후의 연보>

*예종 때 과거 급제.

*인종 초년 전중내급사, 합주(陜州)원을 거쳐 개경부로 전임.

*인종 4년(1126) 6월 딸이 왕비가 되다.

*인종 5년(1127) 8월 예빈소경어사잡단.

*인종 8년(1130) 12월 추밀원부사.

*인종 9년(1131) 9월 동지추밀원사, 12월 좌산기상시.

*인종 10년(1132) 8월 묘청 탄핵 상소.

*인종 11년(1133) 4월 참지정사 판한림원사,12월 판공부사.

*인종 12년(1134) 4월 중서시랑평장사, 5월 지공거.

*인종 13년(1135) 1월 묘청 반란, 중군원수로 수도 위수(衛戍), 12월 판형부사.

*인종 15년(1137) 3월 검교태보 수사도 판비서성사.

*인종 16년(1138) 12월 검교태부.

*인종 17년(1139) 12월 서경유수사.

*인종 18년(1140) 4월 판상서병부사.

*인종 19년(1141) 12월 문하시랑평장사.

*인종 20년(1142) 4월 판상서이부사, 12월 감수국사.

*인종 21년(1143) 윤 4월 태자비를 맞이하고 밀전(密殿)에서 베푼 연회 참석.

*인종 23년(1145) 5월 지공거, 12월 수태보 판서경유수사.

*인종 24년(1146) 정월 왕 발병, 2월 백관과 함께 선경전(宣慶殿)에서 옥황상제에게 쾌유를 빌다.

*인종 즉위년(1146) 4월 문하시중, 정안후에 봉해지다.

*의종 2년(1148) 12월 선충안사좌리동덕공신(宣忠安社佐理同德功臣)호와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太衛)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받고 정안공에 봉해지다.

*의종 10년(1156) 9월에 졸하다, 향년 6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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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사강목8>임자년 인종 10>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원애(任元敳)가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묘청과 백수한 등은 그 간사한 꾀를 마음대로 부려서 괴이한 말로써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속여서 미혹시키는데도, 한둘의 대신과 시종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깊이 믿고서 위로 임금의 청문(聽聞)을 미혹시켰으니, 신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묘청 등을 시장에서 주륙(誅戮)하여 화란의 발단을 근절시키소서.”

2)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10>인종(仁宗)>10고려(高麗)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임원애(任元敳)가 상언(上言)하기를,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 등은 간사한 꾀를 함부로 행사하여, 괴이하고 허탄한 말로 대중의 마음을 기만하고 미혹시키고 있는데, 한두 사람의 대신과 근시(近侍)들이 그들의 말을 깊게 믿어 위로 성상의 귀를 미혹시키니, 신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청컨대 묘청 등을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어 화의 싹을 근절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3) 고려사96>열전 권제9>제신(諸臣)>윤관>윤언이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조서를 내려 김부식(金富軾임원애(任元敱)를 원수(元帥)로 삼고 윤언이(尹彦頤)를 보좌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妙淸叛, 詔以金富軾·任元敱爲帥, 彦頤爲佐討之

4)《고려사127>열전 권제40>반역(叛逆)>묘청 (묘청이 풍수설에 의거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서경 천도에 대해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여러 관리들에게 서명할 것을 두루 요청하였으나 평장사(平章事) 김부식(金富軾),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원애(任元敱), 승선(承宣) 이지저(李之氐)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乃歷請諸官署名, 平章事金富軾·叅知政事任元敱·承宣李之氐獨不署.

5) 동인지문사륙6>교서敎書>賜任元厚授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임원후(任元厚)에게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제수하다[賜任元厚授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하늘이 내린 관작(官爵)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니, 어진 사람과는 더불어 같이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사사로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은 관대하고 후덕하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고, 동정(動靜)은 대신(大臣)의 체통이 있었다. 등용되어 일을 행하던 때로부터 조정에 앉아서 정사를 논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적이 있어서 탁월한 종장(宗匠)이 되었다. 그러므로나는 특별한 은혜를 거듭 내려서 장래의 공효(功效)를 보려 한다. 이것은 안팎으로 진신(搢紳)의 공론을 따른 것이지, ()이 그대에게 사사로이 주는 것이 아니로다.賜任元厚授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天官天爵, 天下之公器, 可以與賢者共之, 不可私於人也. 卿寬厚有長者之風, 而動靜得大臣之體. 自作而行事之時, 至坐而論道之日, 厥有成績, 卓爲宗工. 予其申錫異恩, 以觀來效. 玆所以採搢紳中外之公論, 非朕私於卿也.

6) 동인지문사륙6>敎書>宰臣<‘任元厚가 재차 사면(辭免)을 요청하나 윤허하지 않다[宰臣任元厚再乞辭免不允]. 재신(宰臣) 임원후(任元厚)가 재차 사면(辭免)을 요청하나 윤허하지 않다[宰臣任元厚再乞辭免不允]. 최유청(崔惟淸) 임원후에게 교()하노라. 거듭 올린 표()를 살펴보고서 모직(某職)에서 사면시켜 주기를 요청하고, 아울러 모()를 천거해서 일을 대신 맡겨 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생각하건대 나라의 안위가 재상에게 달렸음은 사람의 행동거지가 팔다리에 말미암은 것과 같으니, 진실로 서로 함께하는 지극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될 수 있겠는가.001 ()은 혼후(渾厚)한 도량에 고명한 재주가 빼어났고, 문지(門地)는 현명한 외척의 고귀함을 겸했으며 지위는 재상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 허물을 가려주어 안으로 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유학(儒學)으로 힘쓰게 함으로써 밖으로 나라의 정치를 도왔다. 그 공로가 많았으니 그 보답도 마땅히 풍성해야한다. 그러므로 승진하는 율문(律文)에 따라서 재상의 책임[秉鈞之任]에 앉힌 것이다. 벼슬을 옮기는 것은 차례에 말미암아서요, 등용은 사사로운 정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능하다고 핑계 대며 물러나면서, 도리어 동렬(同列)에게 크게 미루는가. 한호(罕虎)가 자산(子産)에게 ()국정(國政)을 넘겨 준 것이 비록 옛일로서 간혹 전해 오기는 하지만, 백익(伯益)이 웅비(熊羆)에게 사양한다고 해서 어찌 ()임금이이미 내린 명을 바꾸었던가. 겸손하고 무욕(無慾)을 지킴을 고집하지 말고, 돌보아 살펴주는 내 마음에 부합되게끔 하라. 宰臣任元厚再乞辭免不允 崔惟淸 敎任元厚, 省再上表, 陳乞辭免某職, 幷擧某自代事, 具悉. 惟國之安危, 繫宰相, 猶人之動止, 由股肱, 苟非相與之至驩, 孰得無爲而自化. 卿以渾厚之量, 挺高明之才, 地兼賢戚之崇, 位據公台之重. 彌縫其闕, 內以沃朕心, 緣飭以儒, 外以贊邦理. 厥功惟茂, 其報宜豐. 肆循進律之文, 以正秉鈞之任. 遷之由次, 用匪以私. 奈何退託於不能, 而以盛推於同列. 罕虎授于子産, 雖古事之或傳, 伯益讓于熊羆, 豈成命之容改. 毌固謙沖之守, 以符眷注之懷.

7) 산도(山濤, 205~283) : 중국 남북조시대 진나라의 문신.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출사(出仕)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었을 때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다고 한다.

8) 고려사절요11>毅宗莊孝大王>毅宗 十年>9(1156)>임원후의 졸기 9월 정안공(定安公) 임원후(任元厚)가 사망하였다. 임원후의 처음 이름[初名]은 원애(元敱)로 재능과 도량[器宇]이 넓고 깊고 풍채(風彩)가 엄중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재상이 되어서는 근검하고 청렴결백하였다. 재상[宰執]들이 모두 묘청(妙淸)을 전적으로 믿었으나[傾信], 임원후는 홀로 묘청을배척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복종하였다. 판이부(判吏部)가 되어서는 전주(銓注)를 함에 매우 공정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옛날의 산도(山濤)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즉위하자 태후(太后)의 아버지라 하여 조회(朝會)할 때 전(殿)에 올라 예를 행하게 하였는데, 간관(諫官)이 논박(論駁)하자 마침내 정안공(定安公)으로 봉하였다. 이로부터 한가하게 거하며 정신을 수양하였다[頤養]. 九月. 定安公任元厚卒. 元厚初名元敱, 器宇宏深, 風彩嚴重, 博通經史. 爲宰相, 勤儉淸白. 宰執皆傾信妙淸, 元厚獨擯而不從, 人服其明. 及判吏部, 銓注甚公, 人稱之曰, “古之山濤.” 及王卽位, 以太后父, 令朝會上殿行禮, 諫官論駁, 遂封定安公. 自是, 居閑頤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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