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의향 장흥 의병사〉에 기고된 -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에 대한 소고
■특별기고 〈의향 장흥 의병사〉에 기고된 -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에 대한 소고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7.2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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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存 魏聖/향토사학자, 방촌유물박물관 명예관장

장흥 의병사에서 정유재란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수군 재건 과정에서의 장흥 회령진과 해창 등 장흥부 역할과 장흥 의병활동 등이 중요하다. 그동안 전남도에서 이순신 ‘조선수군재건로 조성’사업에서 일부 학자들과 보성군 측이 주장한, “이순신 이동 거점지인 ‘군영구미’는 보성군 회천면 회령포였다”, “이순신 장군이 회령포(군학리)에서 향선으로 장흥 회진면 회령진으로 이동했다”는 주장 등에 편승, 회천면 군학리를 군영구미로 비정하고 여기에 ‘조선수군재건로 관광지화 사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장흥의 향토학자 등이 주장하는 ‘군영구미는 해창이다’ ‘회령포에서 회령진으로 향선 이동이 아닌 도보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등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최근 발간된 <의향 장흥 의병사>에는 “군영구미=회천면 군학리”, “이순신-회령포(군학리)에서 향선으로 이동” 등을 주장해 온 보성군 측과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내용의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의 재건과 장흥 회령포(회천면)’라는 논문이 실려 <의향장흥 의병사> 발간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이에 장흥향토사학자 위성 씨가 위 논문의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는 원고를 보내와 여기 그대로 전재한다. <편집자 주>

茶存 魏聖/향토사학자, 방촌유물박물관 명예관장

 

 

 

 

 

 

 

 

 

 

 

 

 

 

 

 

 

 

 

 

 

 

 

 

 

 

 

 

 

1.들어가는 말

장흥 의병의 역사를 한곳에 모아 정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장흥문화원에서 심열을 기울어 2022년 3월 30일에 〈의향 장흥 의병사〉(이하 〈장흥 의병사〉)를 펴냈다. 그동안 수고하심을 감사드린다.

조금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면, 의병사는 의병사만, 논고는 논고대로 따로 분리하였었다면 좋았을 것이고 굳이 이런 소견까지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 생각이 다르고 해석이 달라 제 주장을 할 수 있으나, 근거자료 및 지역의 의견과 다름을 지적하고 군의 이름으로 사업을 할 때는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거나 근거가 없는 것을 추정할 때는 조심을 더 해야 하고 그때는 기록을 우선시해야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반대로 시류에 편승해 지자체들이 나서서 서로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지역을 알리기에 혈안이 되는 것에, 학자들이 이에 편승해서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상도 나타나기도 하고 전문가라는 명예에 기대서 억지로 설득하려고 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저런 연유로 〈장흥 의병사>에 실린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의 재건과 장흥회령포’(이하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 재건’) 주장하는 논거의 부당성 몇 가지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2. 논문 내용을 살펴보고

첫 번 째 언급할 일은, 회령진에 모인 전선의 척수고 두 번 째는 어디 소속인가를 따져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회령진의 병선 척수 : 회령진(회진면)의 병선 척수를 언급한 자료(기록)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없다. ‘이순신 장군 충무공 전서’에 조카(姪)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 ‘회령진에 모인 전선의 척수가 10여 척’이라 하였다. 충무공의 유일한 기록이라면, 정유년 9월 7일 이후 기사에서,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과 함께할 것을 지시한 후의 답글에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이다.

또 다른 기록은 조선 조정에서 명나라 수군 제독에게 보고한 문서에 ‘전선 13척, 조탐선 32척’의 기록이다.

이와 달리, 조정의 감군 격으로 칠천량 전쟁에 참전한 선전관 김식은 패전 상황을 보고하면서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과 옥포, 안골포 만호가 전선을 이끌고 전장에서 탈출하였다”고 보고 하였고, 도원수 권율(權慄)이 서장을 올려 “경상 우수사, 옥포, 영등, 안골포 만호 등 및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탈출하는 것을 보았다”는 보고 기록이 있었다.

가리포 첨사 이응표도 전선을 이끌고 탈출하였는데, 이응표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를 구출하지 못해 주홍글씨를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적고 있다. 또 일본군의 포로가 된 김완은 일본에서의 행적 조사 공초에 답한 초시(初始)에서, “칠천량 해전 당일에 남도포 만호 강응표, 회령포 만호 민정붕, 조라포 만호 정공청, 해남 대장, 강진대장, 사도첨사 김익귀가 먼 바다로 도주하였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병혁 씨(문학박사)는 “정유년 여름의 기억”에서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12척을 당시의 소속 군영별로 정리하면서 “경상우수영의 선박으로 배설의 본영선 1척, 옥포 만호선 1척, 영등포 만호선 1척, 안골포 만호선 1척, 거제선 1척, 조라포 만호선 1척 등 6척이고 전라좌수영 소속의 전선으로 녹도선 1척, 사도선 1척 등 2척이고, 전라우수영 소속의 전선으로 남도포 1척, 해남선 1척, 강진선 1척, 회령포 만호선 1척 등 4척으로 12척 모두의 소속을 알아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언급할 부분은 그러므로 문제의 논문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재건’에서 언급한 배설의 소속 부대 12척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령포에 운집한 전선은 10여척이 맞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일본 수군을 피해서 회령포(회천면) 만호 안내로 회령포로 왔고 강진선, 해남선은 더 서쪽이고 안전한 본인들의 본영으로 가서 대기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학계나 이 논문을 쓴 제장명 교수도, 이순신 통제사의 지시로 배설이 회령포에 갔다고 하며 전남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노기욱의 논거대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의 장계를 보성 8월 14일 열선루에서 올렸다”고 하는데, 이 또한 난중일기, 이충무공 전서에는 다른 언급이 있을 뿐이다.

즉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 중, 정유년 7월 20일, 안위가 찾아와서 만나고 다음날 아침 배설이 도망갔다 돌아와서 원균의 이야기를 하고 갔다. 이때 이순신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었다. (같은 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교서와 유지를 받고, 도통사 권률과 의논하며 남쪽으로 잠행하며 수군을 모아 보겠다고 하니 권율이 기뻐했다고 난중일기에 적고 있다).

이순신은 곡성 옥과 구례를 거쳐 순천에서 날랜 군사 60명을 얻고 보성 조양창을 거쳐 보성에서 머물렀던 정유년 8월 13일 기사에서 “수사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회령포(회천면) 집결 명령’도 틀렸다.

2)〈장흥 의병사〉 418p 하단 : “이순신이 8월 11일 보성에 도착했을 무렵 전선 척수 12척의 확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말 역시 앞서가도 한참 앞섰다. 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의 8월 14일 열선루 장계의 설에 동의한 것으로 보이나, 이 부분도 재고되어야 한다.

조선 정조 때 만들어지고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 조카 이분이 기록한 행록을 보면, 이 기사 이전의 기사는 날짜를 기입 하다가 정유년 9월 7일 이후 날자 없이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순신이 잠행 후 회령진(회진면)에서 8월 19일 교서에 숙배하고 취임했으니, 그 이후에야 비로소 전선 및 상황을 보고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조정에서 수군 폐지도 언급하고 이를 하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9월 7일 이후에 날짜를 언급하였다.

3)〈장흥 의병사〉 420p 중간 부분 : “순천과 보성을 거치면서 모집한 군사는 물론 군량과 군기류들을 회령포(회천면)에 집결시켜 8월 18일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 등 12척에 탑재하였다. 회령포는 원래 병선이 머물러 정박하던 곳으로 여기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 두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군선(無軍船)이 아울러 하번 군선이 집결하는 장소이었으며 평상시에는 해상작전을 하는 병선의 기항지인 동시에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전남의 옛 진(鎭)영(營)〉(<사>향토진흥원, 1995)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순신이 모은 군사는 120여 명 정도였다. 또 군량은 잘 보관하여 조양창, 해창(군영구미)의 창고에 군사를 배치해 지키게 하고 무거운 포는 땅에 묻고 표시를 잘해 두고 군기류들은 보성에서 말 4필에 나눠 싣고 군영구미를 거쳐 회령진에 도착한 일정이다.

8월 18일에 이순신 장군은 배설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 다음날 교서에 숙배도 하지 않아서 이방을 데려다 곤장 20대를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여기에서 회령포(회천면)를 설명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보성 회천면 회령포와 장흥 회진면 회령진을 구분하여 기록해야 하고 그 역할도 다르다. 보성 회천면 회령포와 장흥 회진면 회령진을 섞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기 좋은 글을 쓰는 소위 전문가들의 수법에 당하지 않아야 한다.

회령포(보성 회천면)와 회령진(장흥 회진면)

⓵세종 4년 11월 22일 (1422년) 전라도 수군 도안무처사가 본영의 병선 두척과 좌, 우도의 병선 각 1척씩 요해지(일본인이 양민 부부를 참살) 회령포(현 보성군 회천면)에 비변책을 세우다.(바다에서 근무)

⓶세종 7년 2월 25일 (1425년) 회령포 만호의 병선이 머무르고 있는 장흥부의 소마포(召麻浦: 1914년 도제 개편으로 보성군에 편입, 현 보성군 회천면)는 조수가 물러나면 물이 얕아지기 때문에 병선의 출입이 용이 하지 않고 장흥부의 주포(周浦:현 장흥군 회진면)는 왜적이 밟는 첫길이요 또 토지가 비옥하고 많아서(중략), 소마포의 선박 4척을 주포로 이박 시키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⓷성종 21년 4월(1490년)에 주포에 회령진을 성축 하였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회령면 회령포(소마포)에는 진을 둔 기간이 고작 1422년 11월 22일~1425년 2월 25일 까지이며 3년이 채 못 된다. 1425년 이후 회령진이 폐진이 된 구한말까지 500여년 동안 회령진(회진면)은 현재 장흥군의 회진면에 있었다.

다시 언급하면 보성의 회천면은 회령포로 언급되어야 하고, 장흥의 회진면은 회령진으로 불려 져야 한다.

4)〈장흥 의병사〉 428p, 아랫단과 429p 상단 : “8월 18일 배설이 보내온 배를 타고 회령포에 도착했다. 회령포에 도착한 이순신은 배설이 핑계로 만나지 않자 그냥 관사에서 잠을 잤다”라고 단정하며 “군영구미에서 회령포까지 도착한 것을 단기치도회령포(單驥致到會寜浦 : 한 마리의 말로 회령포에 도착하다)라는 기록을 빌어서 말을 타고 간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항복 윤휴 등이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처했던 상황을 그만큼 열악했던 것으로 파악한 가운데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마치 기록도 무시하고 본 것처럼 말한다. 향선 이동설 운운도 언급하는데, 마하수 등이 찾아간 곳도 보성 회령포가 아니라 장흥 회진면 회령진이라고 이순신 전서에 분명하게 나온다.

이 부분의 기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군영구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순신이 회령진으로 간 이동 수단’을 논하려고 한다.

군영구미=회천으로 인식은 잘못

“백사정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군영구미에 도착한다. 군영구미의 사람들은 달아나고 창고에 있는 양곡을 감색과 색리가 나누어 갈 때 도착하여 곤장을 치며 원상 복구 시켰고 배설이 배를 보내지 않아 그곳에서 잤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군영구미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진행 중이다. 필자가 여러 가지 기록을 증거로 피력하고 있으나 몇몇 전문가라고 하는 학자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거만 들어 억지 주장이 난무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영구미에는 양곡 창고가 있어야 하고, 군사들이 주둔하여야 하고, 양곡을 총관리하는 감색(책임자)이 있어야 하고, 양곡과 창고를 지키는 색리(관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난중일기에 기록된 조건이다.

앞에 언급하였듯이, 이때의 보성 회령포(회천면)도 장흥부에 속했으나(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보성군에 속함) 임진왜란(1592년) 이전 17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장흥부 회령진(周浦)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지지류 등 기록은 모두 장흥에 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회천면 일대에는 군영구미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곳이 없다.

보성에서 회령진으로 오는 도중 딱 한 곳으로 군영구미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은 해창뿐이다. 해창은 장흥에서 걷어드린 세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고 이곳을 지키는 감색과 색리가 있었으며 장흥부사가 관리하고 전라 좌수영 혹은 우수영에 속한 병선과 세미를 옮기는 대선이 있었다.(<장흥읍지〉(정묘지)참조). 또 세금을 징수하는 징수관등 징선(徵船)이 있어 꽤 큰 규모의 포구가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병선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정유재란 당시의 김억추의 기록이 있다. 장흥 부사로 재임한 김억추는 전라우수사 김억기의 전사(戰死)로 전라 우수사에 임용되고 정유년 8월 26일자 부임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 가지고 간 병선이 해창에 주둔한 병선이다.(그런데 의문점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군영구미에 갔을 때 이 병선은 어디에 있었으며, 군사들이 도망가고 없어서 배를 못 움직인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 이 점에서는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회령진까지 이동 수단-바다인가 도보인가

이제 단기치도회령포에 대한 기록과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재건’에서는 배설이 18일 보낸 배로 회령포에 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배설은 못 만나고 관사에서 그냥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나 충무공 전서를 보면, 일찍 도착한 장군은 김억추를 시켜 배를 점검하고 배를 수선하고 고칠 것을 지시하고 상황을 점검하며 실질적인 통제사의 임무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장군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제수받았지만 병사가 없어 지휘할 군대가 없었다. 또 난중일기에 기록된 정유년 7월 20일~21일자 일기를 보면, 장군이 기록하는 패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배설이 도망가 20일에 오지 않아서 비난하고 21일 온 것을 적고 있으나, 8월 17일에 배설이 배를 안 보내서 원망하고 18일 회령진에 도착했는데 배멀미를 핑계로 나오지도 않았다고 적고 있다.

어디를 봐도 18일 배를 움직인 기록은 없다. 아니 움직이지 않았다.

배설도 장군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기 싫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기욱은 향선 이동설 운운하고 ‘정유재란 시기 조선수군재건’에서 제장명은 배설이 배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미약한 것이 아니라 아주 근거가 없다. 예를 들면, 이항복과 윤휴만 언급하며 이순신 장군의 열악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했는데, 조금은 맞고 대체로 틀렸다.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결코 선박 이동설은 아니다.

단기치도회령포(單驥致到會寜浦)라고 유고(遺稿)에 기록한 분이 또 있다.

은봉 안방준(1573~1654년)이다. 이분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보성에서 살았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분이 보성에서 살면서 이순신 장군이 말로 간지 배로 간지 몰라서 단기치도회령포라고 표현했을까? 물론 말이 여러 필이 있었을 것이다. 군기류도 4필에 나누어 실었으므로. 그리고 백사정 등에서 말모이를 먹인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 나가는 말

며칠 전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글이 생각나 그 내용을 빌어 이글을 마칠까 한다.

사람들은 논란이 생기면 실체적 진실이 무엇일가 하고 궁금해 한다. 논란의 발화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억측에서 시작된다. 누군가가 만들고 그럴싸하게 포장된 억측은 신념이나 주장을 공유하는 공론장으로 퍼져 나가며 진실인 양 여겨진다. 마치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부의 교양 있는 지식인층도 그렇다.

우리는 ‘전문가’라는 포장된 말로 학계에서 행세하는 사람들을 본다. 우리 같은 얼치기가 보기에도 딱한 사람들이다. 억측으로 만들어가지 말고 정론이 시끄러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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