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남사에서 전통문화 학술이야기 행사 개최
예남사에서 전통문화 학술이야기 행사 개최
  • 김용란
  • 승인 2022.09.0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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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함께하는 전통문화 계승사업 전통문화 정자 이야기

지난 9월 3일 장흥읍 평장리 소재 예남사(경주김씨 장흥강진 종회 회장 김상윤)에서 전통문화 정자 이야기 행사가 호남선비문화원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예남사 강당인 추원당에서 지역의 유림 및 호남선비문화원 회원들에게 선비들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선비와 함께하는 전통문화 계승사업” 의 일환으로 개최됐다.

강사로 초빙된 전 강진군의회 의장인 김상윤 회원은 "오우당의 생애와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학술 강연을 하였고, 이어서 전주의 한문학자 오석환 교수가 다음 강좌를 하였다.

유서 깊은 예남사에서 학술행사를 하게 됨을 호남선비문화원 최기욱 원장은 “명문화벌 경주김씨의 전통과 임진 정유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오우당 김응원 선생의 사당을 참배하는 영광스런 참여에 감사한다”며 “예남사와 같은 유적이 잘 보전 전승되길 희망하고 또한 이런 학술행사가 강진 영암을 벗어나 장흥 해남 등 전남지역으로 확산되길 바라는 모습에 앞으로 군과 교육청에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이야기에는 경주김씨 종인은 물론 장흥을 비롯하여 서울, 광주, 나주, 강진, 영암 유림의 유림 30여명도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다.

 

오우당 김응원 선생 생애

1569년 3월 18일 장흥읍 평장리 금안마을에서 석철 김희련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오우당 김응원은 나면서부터 자품이 뛰어나고 효성스러웠으며 기국이 남달랐다

5세에 부친상을 당하니 슬퍼하기를 어른과 같이 하고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20년간 모시다가 별세하자 3년간 시모살이를 했다

1597년 정유재란때 강진 남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가 처들어오자 중과부적(衆寡不敵)인지라 직접 부딪힘을 피해 색다른 전술기법으로 물리쳤다

수천개의 등불을 독어동 뒷산에 매달고 의병을 매복시켰다

저녁마다 여러 곳에서 매복된 의병이 함성을 지르고 불을 피우며 강진에서 장흥으로 가는 외통수 길목을 막아내니 많은 병력의 의병이 매복해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왜구가 물러갔다고 전한다.

그 후 혁혁한 전술 성과가 전라감영에 보고되고 조정에서 참봉 벼슬이 제수되었다

금안동 뒷산에는 바위에 왜구들이 놀라 물러갔다하여 卻자와 倭자를 써서 각왜동이라 새겼으며,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획이 뚜렷하다. 한글자 크기가 25cm정도로 장흥땅을 지켰던 전승지의 흔적에 손색이 없다.

오우당은 형과 함께 한솥밥을 먹고 거처하였으며 누워서도 칼을 휘둘러 기운을 북돋우고 기세를 자랑하였다.

이괄의 난때 장흥창의도유사로 의병과 군량미를 모곡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 병자호란때는 노령으로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고 의병을 일으킨 제공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도고동에 정사를 짓고 오우당이란 편액을 붙었다.

오우란 소나무와 매화, 대나무, 국화 그리고 자신이 오우 즉 다섯의 벗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추원당 건립시 이를 상징하기 위하여 네가지 수목을 식재하여 관리하고 있다.

 

장흥 김응원 각왜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8호로 2018.08.23. 지정된 각왜비는 장흥군 장흥읍 평장리 602-1 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높이 125cm 너비 44cm의 규격인 각왜비는 조선시대 고종 20년 1883년에 건립된 석비다.

1597년 정유재란후 165년이 지난 1762년 종5대손 취동선생이 자료를 모아 유학자 존재 공위백규 선생이 선고 영이재 위문덕 선생께서 오우당 행장기가 작성되었다.

그 후 1883년 7대손 김원주 선생이 비문을 지어 1915년 의병활동이 진행됐던 금안마을 입구 강진-장흥을 통행하는 길목에 세워졌다.

각왜비전면에는 “유명조선국 성균생원 행 참봉 경주 김공각왜비”라 음각되어 있다.

후면에는 김원주 선생이 지운 비문으로 오우당의 행적과 임진왜란기의 활동이 새겨져있어 조선시대 국난을 극복한 원동력인 의병장의 행적비로 의병모집과 훈련, 왜군과의 접전, 호난경과 향촌사회 생활상과 후손등에 대한 기록유산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예남사의 설립 배경

예남사(汭南祠)는 장흥군 장흥읍 평장리 716-2(군장로 700-11)번지에 위치해 있다. 1947년 윤 2월 17일 상량한 한옥 1동이 경주김씨 두계공파(杜溪公派) 장흥‧ 강진종회의 선조 제향 장소다 1396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이주하여 평장(坪場)마을에 정착한 입향조(入鄕祖) 김광우(金光宇)는 경주김씨 두계공파 파조 김충유(金冲裕)의 넷째 아들이다. 입향조인 진사공(進士公) 김광우(1372-1440) 등 60위를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제향하고 있다. 춘계(春季) 시제(時祭)는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부장공(部將公) 김정길(?-1604) 등 52위를 모신다.

강당인 예남제(汭南齋)의 정면 중앙에 걸려있는 편액은 고당(顧堂) 김규태(1902-1966) 선생이 썼다. 각왜비(卻倭碑)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8호로 지정됨에 따라 오우당(五友堂) 김응원(金應遠)을 추모하기 위해 2022년 준공된 추원당(追遠堂)은 한옥 1동으로 추모실과 화목실, 세족실을 갖추고 있다. 추원당 편액은 유당(裕堂) 기호중(1937 - )선생의 글씨이다.

그리고 사우(祠宇) 1동과 내삼문, 관리사, 화장실, 충의문 각 1동이 있으며 청강(淸江) 김세좌(金世佐) 단비명(壇碑銘) 및 헌성비(獻誠碑) 각 1기(基)가 있다. 덕제(德堤)마을 초입에는 김종규(金宗圭)가 근수(謹竪)한 “예남사‧ 각왜비”란 입로석이 있다.

사우(祠宇)는 1935년(乙亥)에 지역유림들이 청강(淸江) 김세좌(金世佐), 석청(石靑) 김희연(金希練), 송천(松川) 김응규(金應虬), 오우당(五友堂) 김응원(金應遠), 열사(烈士) 김유길(金惟吉) 선생 등 경주김씨 5위의 학덕(學德)과 43충절(忠節)을 기리고자 후손(後孫) 삼우당(三友堂) 김병용(1889~1947) 주도로 장흥군 장흥읍 평장리 평장마을 박산(博山) 아래에 설단(設壇)하고, 제향(祭享)하고 있다. 이후 1974년 3월 장흥 유림 의산(義山) 안홍천(1895~1994)의 발의로 후손 김성옥(1907~1981), 김덕선(1910~1985), 김병태(1916~?), 김봉섭(1925~1990) 등과 종원들의 헌성으로 맞배집 신실(神室)을 건립하였다. 청간(淸江) 김세좌(金世佐)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이하는 소목(昭穆)으로 배향(配享)하여 매년 음력 9월 15일에 제향(享祀)을 한다.

배향 인물

가. 김세좌(1410~1482)

자는 일평(一平), 호는 청강(淸江)이며, 신실의 한 중앙에 주벽(主壁)으로 모셔져 있다. 조(祖)는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6대손이고, 부(父)는 이의판서(吏議判書)를 지낸 두계(杜溪) 김충유(金冲裕)다. 1426년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29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장흥읍 평장리 박산(博山)에 장사하였다.

나. 김희연(金希鍊)(1510~1573)

자는 정중(精中), 호는 석청(石靑)이며, 증조(曾祖)는 청강(淸江) 김세좌(金世佐)이다. 신잠(申潛)의 문인으로 153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43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 하였다. 이후 호조좌랑(戶曹佐郎)을 거쳐 흥양, 창평, 곡산, 정읍, 삭령, 덕원 등 6개 고을의 평사교리(評事校理)를 지내고, 문집(文集)을 남겼다. 용산면 운주리 선영에 장사하였다.

다. 김응규(金應虬, 1542~1620)

자는 이재(而在), 호는 송천(松川)이며, 석청(石靑) 김희연(金希鍊)의 장자(長子)이다. 충(忠)과 효(孝)를 겸비하여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 아우인 오우당(五友堂) 김응원(金應遠)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훈련판관(訓鍊判官)에 제수(除授)하였다. 용산면 운주리 선영에 장사하였다.

라. 김응원(金應遠, 1569~1638)

자는 이구(而久),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며, 석청(石靑) 김희연(金希鍊)의 사자(三子)이다. 1585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91년 모친 괴산최씨(槐山崔氏)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강진 구강포에서 올라온 왜병을 백형 김응규와 함께 의병 일천여명을 모아 장흥성 남쪽 토구동에 주둔케 하고 밤에는 수천 꽁지깃 횃불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흔드니 왜병은 이를 수만의 병력으로 오인하고 도주하여 장흥 땅 일대가 평안하였다.

이러한 행적이 장흥부사에 의해 조정에 전달되어 침랑(寢郞)벼슬을 내리고 토구동 비탈바위에 “각왜동(卻倭洞)”이라 새기게 하고,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제수(除授)하였다. 도고동(道高洞)에 정사(精舍)를 지어 송(松), 죽(竹), 매(梅), 국(菊)을 심고 스스로 자기와 더불어 오우(五友)라 하였다.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장흥도유사(長興都有司)로 의병(義兵)과 군량미(軍糧米)를 모으는데 공(功)을 세웠다. 용산면 운주리 선영에 장사하였다.

마. 김유길(金惟吉, ?~1636)

공(公)의 별호(別號)는 열사(烈士)로 관직은 부장(部將)이었다. 오우당(五友堂)의 당질(堂姪)이다. 1636년(丙子) 청나라가 침략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 전투에 부장(部將)으로 참전하여 전사(戰死)하였다.

 

5) 예남사(汭南祠) 축문(祝文)

早擢內臺 黼黻王猷 晩退江湖 冠冕士流

(조탁내대 보불왕유 만퇴강호 관면사류)

光前裕後 世篤忠孝 高山景行 久愈欽慕

(광전유후 세독충효 고산경행 구유흠모)

일찍이 등과하여 조정안으로 들어가 임금의 지근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도우셨고 뒤늦게 퇴임하여 강호 재야에 내려와 선비의 도리를 다함은 최

상의 으뜸이셨다.

선조들을 빛내주셨고 후손들께는 모범을 보이셨으며 충과 효를 이 세

상에 충실히 실천하셨구려 그 행실은 높고 높은 산과 같았으니 오래도

록 사모하고 흠모할 것입니다.

 

6) 예남사 추원당 상량문

들보의 중간 허리를 깊이 파 이글을 봉해 넣는다.

기록하노니 세대가 멀어졌으나 선대 조상을 추모하니 그 유택이 꺾이지 않았고

제사를 공경스럽게 올리니 자손들의 효성이 끝이 없으므로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추원당을 지으니 모든 후손들의 재계할 곳이요 유숙할 곳이네.

엎드려 생각컨데 선대 조현이신 오우당공 휘 응원께서는 경주김씨 이름 있는 집안이요 그 자는 이구요, 장흥 도고리에 사시는 세족이네

그 호는 오우당이니 품성과 도량이 총명하고 영특하셨으며 인조조 갑자년 이괄 난리에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 유사였고 왜를 물리치려는 괴로움에 침소가 편치 못했네 선조조 임진년 왜놈의 난리에 창의군을 모으는 격문을 발통하였으며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와 국화를 벗삼으며 왜를 물리치게 하는 충성심이 있어 특별히 능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자취를 감추고 삼가며 조용히 살으셨도다.

이제 마땅히 제사 국그릇이나 담장을 받드는 의례를 갖추고 큰 덕행과 타고난 천성을 지키기 좋아함은 누구나 애써 보이는 추모심을 붙이며 이 땅을 주고받는 일은 다른 사람과는 하지 않는 이 마음 없으리오.

도백인 영록이 도비 삼억원을 보조하였고 나라 안에 모든 후손들은 앞을 다투어 칠천여만원을 헌성하여 진실로 화화롭게 협동하고 이제 주추를 놓고 길일을 가려 사는 후손들도 즐겁게 듣고 다같이 소리를 함께 하여 이제 기와를 준비하고 재목을 마련하고 경영을 시작하여 장인들을 불러 신축년(2021) 춘 3월에 역사를 하여 완고하고 아름답게 짓고자 준공 낙성을 끝맺기 이른 여름철에 공사를 시작하여 높지도 아니하고 좁지도 아니하며 춥거나 더웁지도 아니하고 꿩이 나니 왕궁 같지 아니하고 대궐 같지 아니하며 화려하거나 사치하지 않으니 새가 날듯 깃을 편듯하고 앞은 설암산이 높이 바치고 있어 무이구곡이 우뚝하게 반공중에 솟아있네.

뒤로는 탐진강이 길게 흐르니 굽이쳐 소급하면 방불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상이 바뀌어 강산이 빛을 더하고 수사의 한줄기네. 등은 곤방이요 앞은 간방으로 풍수의 정기가 모여있네. 왼쪽에 두 칸 중 한 칸은 제사를 행하고 또 한칸은 의례를 강론하는 곳이요 오른쪽 3칸은 조현들의 세적이 장수하여 있는 곳이며 후손들의 제계하고 후손들이 화목하며 위선의 도리를 논하는 곳이요. 어찌 특별하게 한때만 의귀할 유숙하며 친의를 다지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네

장차 또한 백세의 우러러 지켜나갈 곳이리요? 감히 잔치를 베풀고 축하하는

곳이기도 하네. 들보를 들어 올리는데 힘을 보태네.

 

어기여차!

들보 동쪽으로 떡과 과일을 던지려하니

주렴 밖으로 해뜨는 곳에 새벽 햇살이 붉게 떠오르네

백세에 돈종하며 한방과 같이할 것이니

뜰에 가득한 꽃과 나무는 언제나 봄바람 부는 것 같네

어기여차! 들보 남쪽으로 떡과 과일을 던지려하니

저 건너 사자봉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있네

도고리가 뭉켜나서 높고 낮게 있으니

문장과 학덕이 난다고 지금도 말들 하네

 

어기여차!

들보 서쪽으로 떡과 과일을 던지려하니

양풍이 쏜살같이 달려드는 말같이 달려들어 공맹의 예도가 변해가네

마귀가 두런 두런 온 천지를 어둡게 하니

누가 장차 촛불을 밝혀 여러 백성을 인도할고?

어기여차!

들보 북쪽으로 떡과 과일을 던지려하니

박산은 천년만년 일색으로 한가지이네

북쪽 기러기 소리 끊기니 절에서 종소리 울리고

꽃비가 그친 하늘이 맑으니 해는 서산으로 기우네

 

어기여차!

들보의 위쪽으로 떡과 과일을 던지려하니

받들어 모시는 정령에게 울창주를 따르네

해마다 제사를 끊이지 않으니

소나무 잣나무 창창하듯 음덕이 두텁게 넘쳐나네

어기여차! 들보 밑으로 떡과 과일을 던지려하니

양양하게 들리는 글 읽는 소리 겨울과 여름에도 마땅하네

문중의 모든 자손 옛 법도를 오래도록 이어가니

높은 관과 넓은 띠는 다 유풍이 우아하네

엎드려 원하옵건데 오늘 이 상량을 한 뒤로부터는 자손들이 더욱 번성 해지고 기둥과 건물은 천만년 가게하며 뜰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와 국화가 줄지어 번성하고 책상에는 성경 현전이 쌓여있게 할 것이며 한가히 대가의 은둔하는 사람에게는 부와 귀가 있게 해주시고 풍성이 오래오래 떨치게 해주옵소서.

2021년 3月 日

함양 박준섭 삼가 지음

도편수 양태현

 

追遠堂 上樑文

述夫 樑腰深鑿盛封此文

世代遠而追遠祖先之遺澤不斬 永世慕之追堂追齊

歲事修而伸恭子姓之致孝無窮 衆仍戒之攸齋攸宿

慶州金氏著姓 其字而久 性度聰潁 伏惟顯祖五友堂公諱應遠 長興道高世族 其號五友 器局超邁

甲子适亂募兵聚糧有司 勒岸卻倭特除寢郞 宜擧俎豆之儀

壬辰倭猘倡義徵召檄致 松竹梅菊爲友謹身 以寓羹牆之慕

懿德秉彝所好孰無是心 道伯瑛錄道補三億餘巨金

玆土受賜到今不與他等 國中諸承爭先七千萬원獻誠

後孫允協於僉議 玆以定礎而擇吉乃經乃營 召工始役于辛丑吉年春正

遠風樂聞而齊聲 於是具瓦而備材苟完苟羹 竣落有終於重光赤奮夏月

不高不陜不寒不暑而翬飛如革鳥 前撐雪叢高山彷彿武夷之九曲

非宮非闕非華非奢而突兀聳半空 後流耽津長江洄泝洙泗之一源

移步換形江山增色 左二間則行祭之春芬秋毖而祭官講禮之室

背坤向艮風水華精 右三間卽藏修于祖賢世跡而後仍齊宿之所

豈特爲一時依歸 敢唱燕賀之詞

將亦爲百世瞻仰 載賛虹樑之擧

兒郞偉抛樑東 簾外扶桑曉日紅 百世敦崇如一室 滿庭花樹何春風

〃 南 節彼獅山瑞氣舍 鍾出道高在高低 文章德學至今談

〃 西 洋風馺馺變魯齊 魔鬼啾啾九衝墨 誰將明燭導群黎

〃 北 博山千秋同一色 塞鴻聲斷寺鍾鳴 花雨晴天西日昃

〃 上 奉享精靈爵鬱鬯 年年俎豆繼無絶 松栢蒼蒼厚蔭漲

〃 下 洋洋絃誦宜冬夏 門戶長承故典型 峩冠博帶皆儒雅

子孫增衍 庭列松竹梅菊 幽人淸富貴 伏願上樑之後 自是 棟宇長秋 案積聖經賢傳 振大家胤聲

辛丑(2021) 三月 日, 咸陽 朴俊燮 謹記, 都邊首 梁泰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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