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8 - 가을 사랑
■장흥한담 8 - 가을 사랑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10.18 12: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용수/시인·수필가

오동잎 하나 떨어져 온 누리가 가을임을 안다./ 梧桐一葉 天下盡知秋

소슬바람이 맑은 햇살을 슬그머니 대숲으로 밀어내자 대숲에 서 있는 오동나무 잎이 회색으로 물들여지는 걸 보니 올해의 가을도 어김없이 오동나무 잎에서 시작되나 보다. 텃밭에 널브러진 늙은 고춧대는 바쁜 농부 손놀림이 닿지 못하여 된서리를 맞아 뒤틀려 있고, 가을배추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깨어나 장독대를 빠져나온 하늬바람에 푸른 잎을 한들거리고 있다.

설익은 가을날, 푸른 솔숲에서 불어오는 간솔 바람으로 늙은 호박 하나가 곰삭게 익어가는 걸 보면, 가을은 하나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내려놓는 느낌으로 오는 것일까. 허전하지만 슬프지 않고, 쓸쓸하지만 외롭지 않다. 다만, 소슬바람이 허망해진 가슴을 더더욱 시리게 하고,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오래된 추억들은 그리움 되어 짙게 찍힌 삶의 흔적을 더듬을 뿐이다.

가을비가 오고 나면 계절은 더 깊어지고 겨울은 한 발짝 더 가까이 온다. 그리고 고요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햇살 비추는 창문 앞에서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흔들리는 갈대숲을 바라볼 때면 알 수 없는 적막감에 나는 계절의 포로가 되곤 한다. 가을은 풍성하나 어딘가 허전하고 서늘해지며 알 수 없는 쓸쓸함에 사로잡힌다. 가을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붙들고 마지막 남은 간절함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싶고, 붉게 물든 저녁 날에는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싶은 날이 가을이리라.

가을밤, 저녁 이슬을 맞으며 환한 달빛에 젖어 본다. 저수지 제방 둑에 앉아 물속에 떠 있는 달과 별을 바라보며, 온순해진 마음으로 몽글 몽글한 물안개를 보고 있다. 물 위를 솟구치는 참붕어의 비릿한 냄새와 저수지의 마름 냄새. 물 냄새를 맡으며 가을 속으로 들어가 있다. 달빛에 보이는 들판에는 가을걷이가 마무리되면서 겨울을 준비가 한창이고, 골목길 흙 담장을 뒤덮던 푸른 넝쿨 식물도 소슬바람에 메말라 가고, 푸른 잎 가시 속에 열린 노란 유자, 담장에 대롱거리는 노란 하늘 수박, 붉은 대추, 붉은 홍시, 그리고 못생긴 모과는 푸른 잎을 내려놓고 가을을 토해내니 그 향기가 바람을 타고 창궐한다. 아! 이렇게 향기로운 이 가을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

갯벌을 채우는 바닷물이 싱그럽다. 바닷물이 푸른 산으로 올라온다. 흰 포말이 날 선 바위에 고요를 묻혀놓는다. 동행하는 밤바람에 갈등과 집착을 내려놓고 싶다. 자연은 단풍으로 물들여지고 우리들의 가슴도 낮은 마음으로 물들어가는 가을날, 몸과 마음속을 깨끗이 씻어내어 맑아진 나의 아름다움과 곧게 펴진 올바른 가치관을 곧추세우고 싶다. 앙칼지게 묶인 자잘한 감정들을 다 버려 할 것 같다. 모자란 것은 모자라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듬직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 위로 휑한 바람이 지나간다. 단풍나무와 개옻나무에 가을이 물들여지고 있다. 며칠 전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대지 위에 토해냈다. 나의 젊은 가을에도 비를 맞으며 떨어지는 은행나무가 있었고, 긴 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바쁘게 걸어가는 골목길에서 통기타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던 낭만이 있었다.

그대 사랑 가을 사랑/ 단풍 일면 그대 오고 / 그대 사랑 가을 사랑 / 낙엽 지면 그대 가네

/ 그대 가을 사랑 / 파란 하늘 그대 얼굴/ 그대사랑 새벽안개/그대마음 아 가을 오면 가지 말아라/ 가을, 가을, 내 맘 이러나 / 그대 사랑 가을 사랑 / 저 들길에 그대 발자국 / 그대사랑 가을 사랑 / 빗소리는 그대 목소리 - 「신계행의 노래 가을사랑」

담배 연기 가득한 카페의 한구석에 앉아 DJ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LP판에서 흐르는 주옥같은 노래를 들으며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치열한 삶을 위로하던 나의 7080세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 음악에 귀를 쫑긋거리며 매일매일 낯익게 들어오던 이종환, 소수옥의 흉내 낼 수 없는 가을 짙은 목소리는 이제 귓전에 맴도는 메아리가 되었을까.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황인용의 다정다감한 목소리, 김기덕의 생기 넘치는 2시의 데이트, FM 방송에서 쏟아지는 김광한의 팝 소개와 곁들어지는 화려한 멘트는 이제 K팝에 묻혀 초라한 과거가 된 걸까. 거칠게 건너온 삶의 길목을 더듬다가 가슴속에 흐르는 진한 추억 앞에서 뜨거웠던 청춘을 그리워하며 몸이 파르르 반응한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나에게 잔인하게 머무르곤 한다. 오늘도 흰 머리 위에 햇살이 부윰히 깔리고, 한 세월 건너온 인생이 한 권의 앨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배고픈 삶과 피 끓는 젊음, 화려한 청춘이 심장 속에 아직도 살아있지만, 가슴 떨리는 청춘은 먼지를 둘러쓰고 슬라이드 필름처럼 찰칵거리며 넘어간다. 새벽녘, 날줄처럼 곧게 내리는 가을비소리를 들으며 앨범 한 장을 넘길 때 나는 청춘에 사로잡혀 가슴만 뜨거워질 뿐, 덧없이 세월은 흘러갔다.

오늘 가을 햇살이 더 익어지면 뒷산의 숲들도 고요 속에 묻히겠지. 아침저녁으로 지저귀던 산새 소리가 자지러지면 산은 낙엽을 벗고 침묵하겠지. 그러다가 홀연히 가을이 떠나던 날, 내안에 기억된 청춘만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