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9), 《조선왕조실록》의 마천묵
■장흥고문학-기록문학(9), 《조선왕조실록》의 마천묵
  • 김선욱
  • 승인 2022.09.2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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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1)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 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 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 열전 –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 열전 –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 열전 –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傳)

7. 《동문선》 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 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지난 162호에 이어>

장흥부원군 마천목 졸기(卒記)

장흥 부원군(長興府院君) 마천목(馬天牧)이 졸하였다. 천목은 장흥부(長興府)의 속현(屬縣) 회령(會寧) 사람으로, 홍무(洪武) 신유년에 산원(散員)에 보직되어, 누차 승진 천전(遷轉)한 끝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기묘년에 상장군(上將軍)으로 전임되고 신사년에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칭호를 내렸으며, 곧 이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 임진년에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판나주목사(判羅州牧使)로 나갔고, 갑오년에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

병신년에 도총제(都摠制)가 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로 나갔고, 계묘년에 판우군부사(判右軍府使)로 승진되었다. 기유년에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특히 장흥 부원군(長興府院君)을 제수하고, 예조에 명하여 잔치를 배설해 전별하게 하고 녹봉을 전과 같이 주게 하였는데, 향년이 74세이다. 부음(訃音)을 아뢰니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내사(內史)에게 명하여 가서 조문하게 하고, 쌀·콩 아울러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로 내렸다. 또 예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를 내리니,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신하로서 큰 공로가 있어 이미 시종(始終) 변함이 없었으니, 나라에는 상전(常典)이 있는지라 오직 휼전(恤典)을 특히 더하노라. 생각하건대, 경은 흉금(胸襟)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천성이 순수하고 행검(行檢)이 독실한데다가, 외적을 막는 재능이 뛰어나고 계략(計略)의 지혜 또한 구비하였으니, 실로 군왕의 우익(羽翼)이요, 국가의 주석(柱石)이라 이를 만하도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사졸(士卒) 속에서 경(卿)을 발탁하사 군기(軍機)를 맡기시니, 경은 과연 대의(大義)를 따르고 사(私)를 잊었으며, 충성과 노력을 다하여 위험이 절박했던 그날에 창업(創業)을 도와 이루었고, 창졸간에 일어난 변란을 다스려 나라를 바로잡았던 것이니, 경의 충성, 그 용맹은 의당 산하(山河)에 맹세하고 이정(彝鼎)에 새겨야 할 것이로다. 누차 총제(摠制) 직에 등용되고 인하여 장흥군(長興君)에 봉하니, 그 임용(任用)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사랑과 대우 또한 갈수록 후하여져 부덕한 내가 즉위함에 이르러서도 간성(干城)같이 의중(倚重)해 왔도다. 드디어 치사(致仕)하고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원하였고, 곧 질병에 걸려 직사(職事)를 사양하기에, 부원군(府院君)의 숭품(崇品)으로 승진시키고 만년의 휴양을 바랐더니, 이 무슨 갑작스런 부음(訃音)이란 말인가. 아득한 저 하늘이 이 한 원로마저 남겨 두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영령(英靈)에 고하여 나의 심회를 펴보는 바이노라.

아아, 슬프도다. 기뻐도 슬퍼도 정의는 같은지라 어찌 경의 옛 공적을 잊으며, 유명(幽明)을 달리 했어도 이치는 일반이니 나의 지극한 이 회포를 살피리라 믿노라."하였다.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니, 위험한 속에서도 어려운 것을 사양치 않는 것을 충(忠)이라 이르고, 관후(寬厚) 화평하며, 착한 이름을 지니고 세상을 마친 것을 정(靖)이라 한다.

© 《세종실록 51권》세종 13년 2.1>丙申 5번째기사>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 【태백산사고본】 16책 5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93면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wda_11302001_005

○長興府院君 馬天牧卒。 天牧, 長興府屬縣會寧人。 洪武辛酉, 補散員, 累遷至大將軍。 己卯, 轉上將軍, 辛巳, 賜翊戴佐命功臣號, 尋加同知摠制。 壬辰, 出爲全羅道兵馬都節制使, 判羅州牧使, 甲午, 封長興君, 丙申, 改都摠制, 復出爲全羅道兵馬都節制使。 癸卯, 進判右軍府使, 己酉, 以老乞骸骨, 特授長興府院君, 命禮曹設宴餞之, 賜祿俸如舊, 卒年七十四。 訃聞, 輟朝三日, 命內史往弔, 賜賻米豆幷三十石、紙一百卷。 又命禮官致祭。 敎曰:

臣有膚功, 旣終始之不替; 國有常典, 惟贈恤之特加。 惟卿器宇宏深, 性行醇謹。 才捷於禦侮, 智周乎運籌。 可謂王之爪牙, 而國之楨(幹)〔榦〕 也。 我太宗之潛邸也, 擢卿於行伍, 授卿以軍機, 而卿果能徇義忘私, 盡忠竭力, 佐命於危迫之日, 撥亂於倉卒之間。 惟卿之忠、與卿之勇, 宜乎誓山河, 而銘彝鼎也。 累登庸於摠制, 仍賜封於長興。 任用匪輕, 眷遇彌篤。 逮至眇末, 倚爲干城。 廼乞身而養親, 俄纏疾而謝事。 陞崇秩於府院, 庶休致於桑楡。 何訃音之遽聞? 痛昊天之不憖。 遣禮官而致奠, 告英靈而敍辭。 於戲! 休戚義同, 敢忘卿之舊績? 幽明理一, 諒體予之至懷。

諡忠靖, 險不辭難忠, 寬樂令終靖。

고려 때 마씨 인물군-마순흥·마혁인·마희원·마수손 등

장흥임씨, 장흥위씨와 함께 장흥의 토성 3대 성씨인 장흥 마씨의 경우, 동래조(東來祖) 마장(馬莊)의 부(父) 마완(馬浣)을 시조로 모시고 백제 건국공신으로 좌보를 역임한 마려(馬黎) 이후 장흥 땅에 세거한다. 이후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마육침(馬陸沈) 장군을 배출하는 등 장흥의 토호세력으로 기반을 다졌던 장흥마씨도 고려조에 이르러 대거 중앙 조정에 등용된다.

정종 때 문하시중과 평장사를 지낸 마순흥(馬順興), 선종 때 판개성윤을 역임한 마혁인(馬赫仁), 희종 때 문하시중과 평장사를 지낸 마희원(馬希援), 충선왕 때 평장사를 역임한 마수손(馬壽孫), 1205년(고려 희종 원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던 마중기(馬仲奇), 1361년(공민왕 10년)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고 회성군(會城君)에 봉해졌던 마천린(馬天麟), 이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도왔고 전라도 병마도절도사를 지낸 마천묵(馬天牧) 등이 장흥마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마천목은 당대 장흥의 속현이었던 회령 출신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공민왕 7년(1358)으로 정치적인 변화의 물결이 거센 무렵이었다.

마천목은 장흥 마씨 11세손이다. 부인은 목사 이빈(李彬)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마천목은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곡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어떻게 곡성으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머니가 평산 신씨였던 것으로 보아 곡성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로 인해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천목은 고려 말에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무공을 세워 첨설직을 받아 관직에 진출하였던 신흥무인의 한 전형이었다.

마천목은 조선왕조의 개창과 함께 군사적 능력과 충직함을 바탕으로 태종의 신임을 얻어 사직(司直)으로 발탁되고 사직에서 대장군으로 특진하고 뒤이어 상장군에 올라 고위 무장의 반열에 들었으며,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공신에 오른 이후 마천목은 내내 군사적 중임을 맡아 활약하였다. 중앙군 최고지휘부의 일원으로 궁궐 숙위와 도성의 순찰을 관장하였으며, 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여진족 방비책 등 국방 문제 등 군권(軍權) 행사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군부 실세의 요인으로 부상하였다. 또 전라병영성을 축조하고 축성을 통한 군비 확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평생을 무직(武職)에만 전념한 충직한 무인이었다.

마천목의 이러한 입신출세는 (마천목이 성인이 된 이후 마천목가(馬天牧家)는 곡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곡성의 장흥마씨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마천목가를 중심으로 한 장흥마씨는 마천목의 모계 평산신씨의 도움으로 곡성에 정착한 이후 지역사회에서 손꼽히는 유력 가문으로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마천목이 지역의 협조를 얻어 두가천 어량(魚梁)을 개설하였다든지, 혹은 마씨 일족의 거처를 피해 지신역(知申驛)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풍설 등이 그 증거였다. 외부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었음에도 곡성의 장흥마씨는 마천목의 출세에 힘입어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유력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도록 내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천목의 고향은 장흥부 회령현

마천목은 본시 장흥부 속현인 회령현의 토성 출신이었다. 그런데 조선 초에 속현이 폐지되면서 회령이 장흥에 합쳐짐으로써, 더불어 그의 본관도 장흥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한편 족보에는 그가 장흥 회령에서 출생하여 곡성으로 이주해 살았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족보에 의하면 그는 장흥에서 출생하였고 뒤에 곡성으로 이주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조선 전기의 지리지에 마천목이 장흥부의 인물과 곡성현의 우거(寓居) 조항에 각각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 그러했을 성싶기도 하다. 요컨대 그는 장흥 회령현의 토성 출신 지방인으로서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자신의 무적(武的) 능력을 바탕으로 중앙 진출에 성공한 신진세력, 이른바 신흥 세력(新興武人)’ 출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마천목이나 그 집안이 곡성으로 이주한 것은 마천목 모친의 연고를 좇아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산신씨였다는 마천목의 모(母)는 아마도 곡성 출신이었던 듯싶다.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이 곡성 출신이고 그가 곡성의 성황신으로 추앙되는 등 평산신씨와 곡성신씨는 동족(同祖)으로 결합된 사이였다. 곡성지역이 평산신씨의 본관이나 진배없는 고장이었다.

마천목 부친대에 모(母)의 연고를 좇아 곡성으로 이주하였을 터인데, 그 이유가 경제적 기반을 좇아서였거나 혹은 왜구의 약탈을 피해서 이주해 갔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가 처음 관직에 오른 것은 24세가 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관한 기록 모두가 하나같이 24세이던 우왕 7년(1381)에 그가 산원(종8)품)에 오른 것을 출사의 시작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흥 내지 또는 곡성의 토착세력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라도의 군적(軍籍)에 올라 정지(鄭地,1347~1391)의 휘하에서 군사 활동을 통해 첨설직(添設職)을 얻었다.

마천목은 고려 말에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무공을 세워 첨설직을 받아 관직에 진출하였던 신흥무인의 한 전형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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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천목은 고려말, 이조초의 인물로, 조선조에서 장흥 출신으로 그의 전기(졸기)의 출전은 최초이자 마지막 인물이어서 여기 장흥 고문학 기록문학편에 편입한다.

2) 계축 재추(宰樞)가 최우(崔瑀)의 집에 모여서 몽골과 동진(東眞) 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를 의논하였다. 몽골의 사신이 나라에서 보내는 예물[國贐禮物]을 가지고 돌아가자 왕이 직문하성(直門下省) 마희원(馬希援)에게 명하여 서경(西京)까지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癸丑 宰樞會崔瑀第, 議接蒙眞兩國使之禮. 蒙古使, 賫國贐禮物還, 王命直門下省馬希援, 途于西京. (고려사22>세가 권제22>고종11>1)

3) 고려사世家>卷第二十一>120571. 마중기 등을 급제시키다 秋七月 丙辰 賜馬仲奇等及第.

4) 고려사세가>권제40>공민왕 12>3또한 신축년 홍건적의 난리 때왕을 호종(扈從)한 공을 기록하여, 사망한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彦博), 정승(政丞)으로 추증된 정세운(鄭世雲), 전 대호군(大護軍) 마천린(馬天麟)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5) 長興馬氏中央譜所 編, 長興馬氏大同譜 , 回想社, 1996, 208~209)

6) 1808년에 간행되었다는 長興馬氏 戊辰譜馬天牧 항목의 기록이 그러하다. 곡성으로 이주한 시기에 관해, ‘장흥마씨 무진보의 마천목 항목에서는 막연히 마천목의 中歲라고만 기록하였는데(長興馬氏中央譜所, 長興馬氏大同譜 , 回想社, 1996, 208~209), 대동보의 마천목 年譜’(같은 책, 148~150)에서는 마천목이 15세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이주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참고삼아 사전적 의미에서 中歲壯丁의 나이혹은 中年을 가리킨다고 한다(民衆書舘 編, 李相殷 監修, 漢韓大字典 民衆書林, 1983, 36).

7) ①〔인물: 본조 마천목(馬天牧)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장흥군(長興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本朝 馬天牧太宗朝爲佐命功臣封長興君諡忠靖(신증동국여지승람37>전라도>장흥도호부>인물) ②〔우거(寓居): 본조 마천목(馬天牧) 태종(太宗)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으로 봉하였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本朝 馬天牧太宗朝佐命功臣封長興府院君諡忠靖(신증동국여지승람37>전라도>곡성현>우거)

8) 新興武人이란, 고려말엽에 사인향리와 같은 지방의 토착세력 중에 자신의 무적(武的)인 능력을 바탕으로 첨설직(添設職)을 수여받으며 성장해간 새로운 사회세력을 지칭한다.(鄭杜熙, 高麗末期添設職, 震檀學報 44, 1977, 46.

9) 평산신씨였다는 마천목의 모()는 아마도 곡성 출신이었던 듯싶다.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이 곡성 출신이고 그가 곡성의 성황신으로 추앙되는 등, 평산신씨와 곡성신씨는 동족(同祖)으로 결합된 사이였다. 곡성지역이 평산신씨의 본관이나 진배없는 고장이었다.

10) 정지鄭地 : 고려 말 무신. 본관 하동(河東). 초명 준제(准提). 시호 경렬(景烈). 요동 정벌 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동조했던 장수. 나주 출신으로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이듬해 남원(南原)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고, 1383년 남해 관음포로 쳐들어온 왜적을 대파하였고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서 해도도원수,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가 되고, 1384(우왕 10)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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