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호 사설 - 회령포진과 이순신의 정유재란
제165호 사설 - 회령포진과 이순신의 정유재란
  • 김선욱
  • 승인 2022.09.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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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당초부터 “명량해전 전초기지는 회령포진으로 생각했다”

10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회진항 일대에서 ‘2022 회령포문화축제’가 개최된다. 올해 회령포문화축제의 주제는 ‘12척의 기적, 역사 속으로 가는 시간 여행’이다.

‘12척(13척)으로 일본 수군 133척과 싸워 기적같은 대승을 이끌었던 이순신 명량해전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당시 회령포진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7년부터 해마다 정례적으로 회령포문화축제를 시행해 오고 있다. 올해가 6회째이다.

이 축제의 의미는 회령포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 교지를 받고 수군재건을 마치고 회령진성에서 삼도수군 통제사로서 취임식(결의)을 가진 장소였다는 데 있다.

당시 회령포는 만호가 있었던 수군 진鎭에 불과했는데 왜 이순신이 하필이면 회령포에서 수군재건 출범, 해전 출정식을 거행했느냐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남해안에서 해남에 전라우수영(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도 있었고, 동쪽으로 여수에 전라우수영(현 진남관, 내례만호진)도 있었다. 이순신의 과거 전라도와 인연을 따져보면 1580년에 2년간 보임했던 고흥의 발포만호도 있었다. 당시 회령포영은 전라우수영의 속진으로 만호가 있던 19진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수군재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보성을 거쳐 회령포에 기착, 해전 출정식을 거행했다.

왜 회령포였을까.

단순히 무작정 남해 해안 쪽으로 잠행하다보니 도착한 곳이 회령포여서였을까?

사전 전쟁 준비에 철저했고, 조정의 도움 없이 거의 자력으로 남해 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무엇보다 천재적인 지략가였던 이순신 장군이 무작정 잠행하다 어쩌다 회진포에서 이르렀기에 회령포에서 그 역사적인 출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소환해보자.

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그러나 원균은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고 일본 수군이 해상 제해권을 독점, 이제는 왜군이 마음 놓고 서진(西進), 전라도는 물론 서해를 유린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중 진주(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 집)에 머무는 중에 삼도수군통제사 제수를 받은 때가 칠천량 해전 참패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1597년 8월 3일이었다.

진주에서 수군 잠행을 떠날 때 군관 9명, 병졸 6명이 따랐다고 한다. 이순신의 1차적인 목표는 수군의 재건이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병사와 병선, 군수물자와 군량미 확보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이순신은 이처럼 수군재건을 위한 잠행에 나섰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진주 → 하동 → 구례 → 곡성 → 옥과→ 순천→ 보성 조영창 → 보성 → 장흥 군영구미 →회령포에 이르기까지 15일간 수군 재건을 위한 잠행길에 나선 것이다.

왜 전라도 쪽으로 잠행이었을까.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판옥선 1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남해로 도피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게다가 경상도 해안은 이미 일본 수군에 장악돼 있었고, 무엇보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기 위해서는 전라도 남해 연안에서 왜군과 대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수군재건을 마치면 어디서 해전에 출전할 것이냐? 어디를 해전의 전초기지로 삼을 것이냐? 이것이 이순신의 두 번째 과제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먼저 전라도 남해연안 중 울돌목에서 해전을 고려했을 것이다.

KBS1 ‘불멸의 이순신’ 제94회 방영분 중, 1597년 8월 명량해전 한 달 전, 통제영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긴 후 가진 긴급 참모회의에서 이순신이 “울돌목(鬱돌목)은 최후의 보루(堡壘)입니다. 그 마저 내 준다면 이제 더는 조선의 안위를 생각 할 수 없으니, 수군으로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이다 …”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TV 드라마 방영에서 이순신의 울돌목 해전의 중요성이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순신도 울돌목의 지형(소수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수군과 대첩해 승리 가능성 큰 지형)의 장점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고, 이러한 상황의 수군재건 과정에서 울돌목의 전투를 수없이 구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울돌목에서 가까운 남해 연안의 어딘가를 즉 보성만, 득량만, 강진만, 해남과 진도간의 해협의 한 곳으로 일본 수군으로부터 은둔할 수 있는 내항의 수군진이 있는, 즉 해남현과 강진현, 보성군 사이의 유일한 부사고을이던 장흥부를 생각했을 것이고 장흥부 관할의 유일한 만호수진인 회령포진을 ‘해전 출정식’, ‘해전 전초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장흥부는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이순신의 병참참모로, 자신이 옥에 수감되었을 때 선조에게 나아가 목숨 걸고 자신의 방면을 주청했던 반곡 정경달이 장흥 출신 문관이었음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또 ①임란 때 문위세(文緯世)가 네 아들 원개(元凱) 원개(英凱) 형개(亨凱) 홍개(弘凱)와 사위 백민수(白民秀) 조카 희개(希凱) 등에 의병을 모집하여 참여케 했으며 자신은 군량을 조달하여 전라좌의병군(全羅左義兵軍)의 성주성 수복전(收復戰)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던 사실 ②장흥출신 위방(魏魴)이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자신의 막하로 들어 와 한산도 해전에서 전사했던 사실 ③자신의 막하에서 조전장으로 옥포, 적진포, 율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던 위대기·신용호·변홍달 등의 장흥 출신 의사들을 기억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이순신은 장흥부를 충절의 고장, 선비의 고장, 의로운 고장으로 이해했을 것이고, 다른 어느 지역보다 큰 지원과 협조가 있을 것을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로 장흥의 많은 의인들이 모여들었다.

마하수(馬河秀) 마성룡(馬成龍) 마위룡(馬爲龍) 백진남(白振南) 정명열(丁鳴說) 문영개(文英凱) 등을 비롯한 장흥의 선비들은 물론 수많은 상민들까지 의병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안양면 동촌 출신의 초계 변씨인 변홍주, 변국형, 변국간, 변국경 등이 전선 10여 척과 노를 젓는 사람 300여 명을 데리고 통제사의 군영에 합류, 명량대첩 승리에 기여하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공식적인 해전출정 선포로 명량해전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 회령포진, 회령진성이었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장흥 출신 의사들이 이순신 막하로 모여 들어 이순신의 기적 같은 명량해전의 승리에 기여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이로써 회령포는 정유재란 때의 역할로 ‘장흥 의향’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회령포문화축제’는 ‘12척(13척)으로 일본 수군 133척과 싸워 기적 같은 대승을 이끌었던 이순신의 명량해전 전초기지로서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축제이긴 하지만, 더 나아가 ‘장흥=의향’의 시작점이자 토대로서 그 전통을 조명하고 기억하는 축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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