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고문학-기록문학(9), 《조선왕조실록》의 마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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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09.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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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순서>

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 탄생

2. 고려사열전 - 장흥출신 인물들

3. 고려사열전 - 공예태후임씨전(恭睿太后任氏傳)

4. 고려사열전 임의전(任懿傳)

5. 고려사열전 임원후전(任元厚傳)

6. 고려사열전 임극충임극정임보임유임익임황전()

7. 동문선등재 임원준(任元濬)

8. 동문선등재 임경숙

9. 조선왕조실록졸기(卒記) 등재 - 마천목 장군

<지난 164호에 이어>

마천목의 고향은 장흥부 회령현

마천목은 본시 장흥부 속현인 회령현의 토성 출신이었다. 그런데 조선 초에 속현이 폐지되면서 회령이 장흥에 합쳐짐으로써, 더불어 그의 본관도 장흥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한편 족보에는 그가 장흥 회령에서 출생하여 곡성으로 이주해 살았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족보에 의하면 그는 장흥에서 출생하였고 뒤에 곡성으로 이주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조선 전기의 지리지에 마천목이 장흥부의 인물과 곡성현의 우거(寓居) 조항에 각각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 그러했을 성싶기도 하다. 요컨대 그는 장흥 회령현의 토성 출신 지방인으로서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자신의 무적(武的) 능력을 바탕으로 중앙 진출에 성공한 신진세력, 이른바 신흥 세력(新興武人)’ 출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마천목이나 그 집안이 곡성으로 이주한 것은 마천목 모친의 연고를 좇아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산신씨였다는 마천목의 모(母)는 아마도 곡성 출신이었던 듯싶다.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이 곡성 출신이고 그가 곡성의 성황신으로 추앙되는 등 평산신씨와 곡성신씨는 동족(同祖)으로 결합된 사이였다. 곡성지역이 평산신씨의 본관이나 진배없는 고장이었다.

마천목 부친대에 모(母)의 연고를 좇아 곡성으로 이주하였을 터인데, 그 이유가 경제적 기반을 좇아서였거나 혹은 왜구의 약탈을 피해서 이주해 갔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가 처음 관직에 오른 것은 24세가 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관한 기록 모두가 하나같이 24세이던 우왕 7년(1381)에 그가 산원(종8)품)에 오른 것을 출사의 시작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흥 내지 또는 곡성의 토착세력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라도의 군적(軍籍)에 올라 정지(鄭地,1347~1391)의 휘하에서 군사 활동을 통해 첨설직(添設職)을 얻었다.

마천목은 고려 말에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무공을 세워 첨설직을 받아 관직에 진출하였던 신흥무인의 한 전형이었다.

조선조 개국-이방원 휘하에서 출세 가도

이후 조선의 개국과 함께 마천목은 정안군(靖安君) 이방언 곧 후일의 태종 휘하로 들어갔으며,군사적 능력과 충직함을 바탕으로 태종의 신임을 얻어 사직(司直)으로 발탁되고 사직(司直)을 거쳐 대장군이라는 대장성급 인사로 급부상한다. 그게 1차 왕자의 난 직후인 조선 태조 7년(1398) 9월이었다. 사직에서 대장군으로 파격적으로 단계를 건너뛰어 승진한 것은 1차 왕자의 난 뒤 행해진 논공행상에 의해서였다.

태종 이방원은 마천목에게 “그대는 일찍이 전라시위군에 적을 두었는데 이제 (전라) 도절제사가 되니 또한 영예롭지 아니한가”라며 격려하였다.

또한 세종은 마천목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에서 “우리 태종께서 잠저(潛邸-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나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에 계실 적에 그대를 항오(行伍, 군대, 즉 군대 편성編成을 말한다. 한 줄에 5명을 세우는 데 이를 오伍라 하고, 그 5줄의 25명을 항行이라 한다)서 발탁하였다”는 회고담으로 추모의 정을 표하기도 하였다.

마천목이 전라도 시위군 출신으로 태종에 의해 항오(行伍)에서 발탁되어 어 출세하였음을 전하는 기록이다.

이처럼 당초에 태종에 의해 항오(行伍)에서 발탁되었고, 조선이 건국하고 난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무렵에는 벌써 사직(司直)으로 활약하였으며, 직후의 논공행상에서 대장군으로 단계를 건너뛰어 승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천목이 고려 말, 무인으로 진출할 때 장흥 내지 곡성의 토착세력에 속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무예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궁술이 뛰어나 화살을 날리는 족족 명중하였다는 게 당대의 평이었다. 지방의 유력계층으로서 무예에 능한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첨설직이 그와도 무관치 않았을 것임을 직감할 수가 있다.

조선이 세워지는 것과 동시에 여러 도(道)의 시위패(侍衛牌)를 종친과 대신으로 하여금 나눠 관장토록 했는데, 당시 전라도는 정안군 방원(靖安君 芳遠)이 맡았다. 그러므로 도의 시위군에 적을 두었다던 마천목이 늦어도 이 즈음이면 태종의 휘하에 들었을 것임을 헤아릴 수가 있으며, 당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마천목을 항오(行伍)에서 발탁하였다는 세종의 술회 등을 보더라도 고려말 산원으로서 관계에 발을 들여 놓았던 마천목이 조선왕조의 개창 이후 태종 휘하에서 그의 천거를 바탕으로 직위를 높여갔으며, 그리하여 태조 7년이면 사직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세종은 마천목의 사후 그를 추장(推獎) 하는 교서에서, “경은 과연 대의(大義)를 따르고 사(私)를 잊었으며, 충성과 노력을 다하여 위험이 절박했던 그날에 창업(創業)을 도와 이루었고, 창졸간에 일어난 변란을 다스려 나라를 바로잡았던 것이니, 경의 충성, 그 용맹은 의당 산하(山河)에 맹세하고 이정(彝鼎)에 새겨야 할 것이로다”하였다. 그리하여 마천목의 그와 같은 충성과 용기는 길이 기억되어 마땅하다는 것이 세종의 평이었다.

마천목이 항오에서 발탁되어 수행했을 법한 군사적 임무와 관련하여, 태종이 마천목에게 내린 ‘좌명공신교서(佐命功臣敎書)’ 중 그의 행적을 기술한 내용이 이채롭다. 태종 원년(1401) 2월에 내려진 이 교서에는, 그가 공신으로 책봉되기에 이른 사정이 압축적으로 서술되어 전한다. 항오에서 발탁된 이후 왕자의 난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인 활동을 종합해서 축약한 셈이거니와, 거기에 수록된 내용이 오로지 마천목이 보였던 바의 무인으로서의 기상 같은 것이다.

즉 ①태종의 명으로 방번을 만나 태종의 회유하는 말을 전달하고 ②서둘러 대궐로만 향하던 이천우(李天祐)를 불러 세운 다음 설득하여 태종이 동조자를 모으던 장소로 안내하고 ③ 정도전(鄭道傳) 등이 회합하던 남은(南誾) 소실의 집을 포위하였을 적에는 먼저 화살을 날려 동태를 살피도록 태종에게 건의하고 ④남은의 당여로 지목되어 미복(微服)으로 피신하던 남재(南在)를 멀리 전라도의 완산에서 붙잡아 관아에 구치(拘置)하였으며 ⑤2차 왕자의 난 때도 의 기도 하였다.

선봉으로 방간(芳幹)을 추격하여 그 호위군 셋 중 둘을 직접 격살하고 나머지 한 명은 태종의 만류로 죽이지 않았다는 등의 기록에서 그것을 알 수가 있듯 마천목은 태종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복심이었으며 태종을 지근거리에서 받들며 그 명을 실행에 옮긴 심복 무인이었다. 그는 태종의 충직한 복심으로 정변에서 활동하였던 마천목이었다.

이리하여 위 ‘마천목 졸기卒記’나 마천목(佐命功臣敎書)’에서 보듯 “마천목은 변치 않는 충성으로 대의를 지켜낸 충의지사였우며 …사사로움을 잊고 대의를 드러내며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바쳤고 …빼앗기 어려운 절개를 지녔으며 … 대의를 드러냄에는 제 한 몸을 돌보지 않았다’는 등의 평가가 그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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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長興馬氏中央譜所 編, 長興馬氏大同譜 , 回想社, 1996, 208~209)

2) 1808년에 간행되었다는 長興馬氏 戊辰譜馬天牧 항목의 기록이 그러하다. 곡성으로 이주한 시기에 관해, ‘장흥마씨 무진보의 마천목 항목에서는 막연히 마천목의 中歲라고만 기록하였는데(長興馬氏中央譜所, 長興馬氏大同譜 , 回想社, 1996, 208~209), 대동보의 마천목 年譜’(같은 책, 148~150)에서는 마천목이 15세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이주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참고삼아 사전적 의미에서 中歲壯丁의 나이혹은 中年을 가리킨다고 한다(民衆書舘 編, 李相殷 監修, 漢韓大字典 民衆書林, 1983, 36).

3)  ①〔인물: 본조 마천목(馬天牧)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장흥군(長興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本朝 馬天牧太宗朝爲佐命功臣封長興君諡忠靖(신증동국여지승람37>전라도>장흥도호부>인물) ②〔우거(寓居): 본조 마천목(馬天牧) 태종(太宗)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으로 봉하였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本朝 馬天牧太宗朝佐命功臣封長興府院君諡忠靖(신증동국여지승람37>전라도>곡성현>우거)

4) ‘新興武人이란, 고려말엽에 사인향리와 같은 지방의 토착세력 중에 자신의 무적(武的)인 능력을 바탕으로 첨설직(添設職)을 수여받으며 성장해간 새로운 사회세력을 지칭한다.(鄭杜熙, 高麗末期添設職, 震檀學報 44, 1977, 46.

5) 평산신씨였다는 마천목의 모()는 아마도 곡성 출신이었던 듯싶다.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이 곡성 출신이고 그가 곡성의 성황신으로 추앙되는 등, 평산신씨와 곡성신씨는 동족(同祖)으로 결합된 사이였다. 곡성지역이 평산신씨의 본관이나 진배없는 고장이었다.

6) 정지鄭地 : 고려 말 무신. 본관 하동(河東). 초명 준제(准提). 시호 경렬(景烈). 요동 정벌 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동조했던 장수. 나주 출신으로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이듬해 남원(南原)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고, 1383년 남해 관음포로 쳐들어온 왜적을 대파하였고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서 해도도원수,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가 되고, 1384(우왕 10)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다.

7) 사직은 종5품으로서 中郞將에 해당한다.(太祖實錄1太祖 1728丁未 및 같은 책 5 太祖 3229己亥)

8) 卿嘗籍全羅侍衛軍, 今爲都節制使, 不亦榮乎?" 天牧對曰: "臣之榮耀, 不可勝言, 何以報上恩?" 賜衣一襲及弓矢, 天牧啓曰: "南原付處監察金滋有武才, 乞移付處營中, 率以禦寇(太宗實錄23 太宗 12511甲午)

9) 잠저(潛邸)는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나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이안 뜻으로 여기서는, 조선이 개창되던 초기에 태종은 절제사로서 전라도 시위병마(侍衛兵馬)를 관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과거 전라도 시위군에 적을 두었다던 마천목이 태종과 인연을 맺기에 이른 계기를 암시한다.

10) 長興府院君馬天牧卒 … 敎曰 … 我太宗之潛邸也 擢卿於行伍 授卿以軍機 … (《世宗實錄51 世宗 1321丙申

11) 고려 말기에 마천목은 전라도 군적에 이름이 오른, 그리 높지 않은 무관이었다. 우왕 7년 신원(散員)에 올랐다. 조선 초는 여전했다. 전라시위군에 적()을 둔 행오(行伍)에 속하였고, 태조 7년까지 사직(司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12) 敎翊戴佐命功臣折衝將軍雄武侍衛司上將軍馬天牧 王若曰 不遇盤根 何以試利器 不賴良士 無以定國亂 維爾蘊不羈之才 秉難奪之節 力可以扼虎 勇可以兼人 通變適用 徇義忘身 服勞王家 夙著成績 且精於射藝 發而必中 所謂熊熊(?)之士 爪牙之才者也 … 建文三年二月日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增補版), 知識産業社, 1989, 65

13) 첨설직(添設職)은 본래 전공(戰功)이 있는 무신에게 새로 벼슬을 주거나 승진시키려 하여도 자리가 없을 때 주던 벼슬을 말한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와서 집권 무신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전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을 세운 것처럼 꾸미거나 전공을 부풀린 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무신들을 정방에서 첨설직(添設職)을 수여하고 품계도 올려주는 폐단이 야기되기도 했다.

14) 世宗實錄51 世宗 1321丙申

15) 又命禮官致祭 敎曰 我太宗之潛邸也 擢卿於行伍 授卿以軍機 而卿果能 徇義忘私 盡忠竭力 佐命於危迫之日 撥亂於倉卒之間 惟卿之忠 與卿之勇 宜乎誓山河 而銘彛鼎也 累登庸於摠制 仍賜封於長興 (世宗實錄 51 世宗 1321丙申)

16) 말을 달려 궁성(宮城)의 서문으로 나가니 익안군·회안군·상당군이 모두 달아나는데, 다만 상당군만은 능히 정안군의 말을 따라오고 익안군과 회안군은 혹은 넘어지기도 하였다. 정안군이 마천목(馬天牧)을 시켜 방번을 불러 말하였다. "나와서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 그 종 말에는 저들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방번이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이 말을 다 듣고는 도로 들어가 누웠다.

17) 이천우(李天祐)는 자기 집에서 반인(伴人) 2명을 거느리고 대궐로 가는데, 마천목(馬天牧)이 이를 바라보고 안국방(安國坊) 동구(洞口)에까지 뒤쫓아 가서 말하였다. "천우 영공(天祐令公)이 아닙니까?" 천우가 대답하지 않으므로, 천목(天牧)이 말하였다."영공(令公)께서 대답하지 않고 가신다면 화살이 두렵습니다." 천우가 말하였다. "그대가 마 사직(馬司直)이 아닌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 천목이 대답하였다. "정안군께서 여러 왕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태조실록14>태조 7>826>1번째기사)

18) 여러 형제들도 또한 안에서 달려 나와 변()을 고하였다. 드디어 함께 정도전(鄭道傳)이 모여 있는 곳에 갔는데, 길에서 10여 인이 모여 있는 것을 만났다. 마천목(馬天牧)이 쏘라고 청하여, 화살 네 다섯 대를 쏘고 모인 곳에 들어가니, 정도전 등이 이미 도망하였다. 이에 마음이 놀라고 두려웠었는데, 혜비댁(惠妃宅) 문앞에 이르러 이무(李茂) 박포(朴苞)를 만났다. 이무가 말하기를, ‘어째서 약속을 어기었소? 내가 화살을 맞았소!’ 하였다.(태종실록18>태종 9101>3번째기사)

19) 남재(南在) 의령(宜寧)으로 내쫓았다. 처음에 우리 전하께서 남재를 보전하고자 하여 자기 제택(第宅)에 두게 했었는데, 그 어머니가 남은(南誾)의 난리에 죽었다고 생각하여 매우 슬피 우니, 남재가 그 수염을 뽑아 어머니에게 보내었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는 죽지 않았구나." 난리가 평정된 뒤에 어머니를 과주(果州)의 전장(田莊)에서 뵈옵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남은 당여(黨與)의 죄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서, 남재는 두려워하여 미복으로 도망하였으나, 대장군 마천목(馬天牧)이 그를 완산(完山) 노상(路上)에서 만나 그 관아에 구치(拘置)하고, 조정에 와서 알리니, 그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南在于宜寧初我殿下欲全, 命置于第, 其母謂死於, 哭之甚 拔其鬚送之, 母曰: "不死矣" 事定, 見母于果州田莊, 仍留止乃聞治黨與, , 微服逃之大將軍馬天牧逢諸完山路上, 拘置其官, 來告於朝, 故有是命(태조실록15>태조 7>1026>2번째기사)

20) 대군(大軍)이 각()을 부니, 방간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났다. 서익(徐益)·마천목(馬天牧)·이유(李柔) 등이 선봉(先鋒)이 되어 쫓으니, 방간의 군사 세 사람이 창을 잡고 한 데 서 있었다. 마천목이 두 사람을 쳐 죽이고 또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정안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들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 하였다. 放懷安公芳幹于兎山 大軍吹角 芳幹軍皆奔潰 徐益馬天牧李柔等 爲先鋒追之 芳幹軍三人 執槍叢立 天牧擊殺二人 又將殺一人 公見之曰 彼無罪 勿殺之 益執槍追芳幹 芳幹勢窮北走(정종실록3> 2128>3번째기사)

21)  마천목(馬天牧)·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 조희민(趙希閔)·봉상경(奉常卿) 유기(柳沂) 12인은 정성과 힘을 다해서 여러 번 충성을 바치어 익대 좌명하였으니, 3등으로 칭하하고, ··처는 1등을 뛰어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1 등을 뛰어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자는 조카와 사위를 음직을 주고, 80, 노비 8, 2품 이상은 백은 25, 3품 이하는 은대(銀帶) 1(), 표리 1, 구마 1, 구사 3, 진배파령 6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한다. 上將軍馬天牧判殿中寺事趙希閔奉常卿柳沂等十二人, 推誠勠力, 累曾効忠翊戴佐命三等稱下, 父母妻超一等封贈, 直子超一等蔭職, 無直子者, 甥姪女壻蔭職, 田八十結, 奴婢八口二品以上, 白銀二十五兩, 三品以下銀帶一腰, 表裏一段, 廐馬一匹, 丘史三名, 眞拜把領六名, 許初入仕(태종실록1>태종 1115>2번째기사 이저·이거이 등에게 좌명 공신의 훈호를 내리는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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