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한담 9- 천년의 기다림 매향
■ 장흥한담 9- 천년의 기다림 매향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10.2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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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1434년(세종 16년) 9월, 장흥군 용산면 덕암리 삼십포 앞바다에서
천여 명의 민초들은 용화 세상을 꿈꾸며 향나무를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묻으며 세상의 명약으로 태어나길 갈구하였으리라.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새로운 세상을 기원 했을 순박하고 후덕했던 사람들.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오십육억 칠천만 년이 지난 뒤에나 출현한다는 미륵불을 영접하기 위해 침향(沈香)을 준비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처절하게 위로받았을 자리에서 긴 침묵에 들었다.

 나뭇가지에 걸친 바람 한 줄기가 암반에 새겨진 글자를 어루만지며 흐르는 것은 까마득한 기억을 바닷물에 전해주기 위함일까. 현실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오직, 진실함과 정성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경건하고 장엄했을 매향 의식을 떠 올리고 있다. 가려지고 숨겨진 곳곳마다 자비의 손길이 퍼지길 소망하고, 모든 부정을 사하고 몸과 정신을 맑게 하여 절대자에게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천상의 향기인 침향을 사르고자 몸을 낮춘 사람들의 간절함이 새겨진 글자를 더듬는다.
“1434년 월 일 많은 사람들이 발원하여 남남동향에 향목을 묻었으며, 주도한 향도는 홍신 이다” (宣德 九年 月日 千人 同願巳地埋置 香徒主 洪信)라는 뜨겁고도 깊은 기도의 흔적들만이 암반에 박혀있을 뿐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자연의 소리를 들어본다.
바람이 길을 내며 지나가는 소리, 이름 모를 새가 깃털을 고르는 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낙엽이 바람에 뒤척거리는 소리, 바닷물이 스멀거리며 밀려오는 소리, 그리고 매듭진 가슴, 허리 굽혀 두 손을 모으며 풀어내던 민초들의 기도 소리가 귓전에서 흔들린다.

민초들의 서원(誓願)을 담고 침향이 되기 위해 오늘도 삭히고 있을 자리가 남남동쪽이면 득량만에서 올라오는 바닷물과 남상천의 민물이 교차하며 굽이치는 곳이다. 남상천 민물이 잠시 멈춰 득량만에서 올라오는 바닷물과 하나 되어 한번은 휘돌아가야 하는 곳. 이제는 무심한 세월이 흔적을 지워버려 아무도 알지 못한 곳에서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묻힌 매향지는 간척사업으로 지형은 변했지만 바다 건너 앞산은 많은 사람이 발원했던 그 날을 기억하고 천상의 침향으로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원등(元嶝)마을과 남하 약방이 있던 자리로 바닷물은 갈대를 비집고 서서히 밀려든다. 세월의 덮개를 눌러쓴 남상천이 휘돌아가는 덕암과 삼십포 주변은 오래전부터 자염(煮鹽)을 해오던 지역이다. 정묘지(1747, 장흥읍지)에 의하면 원등마을에서는 자염이 성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경까지는 남하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었던 행정의 주요지역으로 크게 성행하였던 곳으로 이곳은 미안해할 줄 알고, 감사해할 줄 알고, 고마워할 줄 아는 순박한 사람들이 짠 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바다를 마주하고 오밀조밀 살아가고 있다.

 듬성듬성 비워진 집으로 안내하는 시월 바람 따라 수천 년 쉼 없이 흐르는 남상천의 속살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발걸음은 기억되는 곳으로 향하고 기억이 스민 곳에서 걸음은 멈추는 걸까. 바닷물을 짊어지고 올라와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생산하던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이 오기를 소망하였던 흔적은 이제는 몇 자 기록된 고서에나 볼 수 있을 뿐, ‘용산면 삼십포(三十浦)가 침향포(沈香浦)’라고 불렸다는 구전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두리번거리지만, 누구 하나 전해줄 사람이 없다. 먼발치 앞산이 하루를 마감하고 야트막한 바다로 이울 때, 간척지와 갯벌을 휘도는 바람이 어딘가에 묻혀 있을 매향을 더듬으며 금방이라도 향기를 쏟아 낼 것만 같다.

바닷물이 남상천을 파고드는 스산한 가을날.
쑥부쟁이가 옛사람들의 기도를 기억이라도 하는지 고운 향기로 만삭의 가을을 풀어내는 무겁고 고요한 매향암비에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며 살다간 옛사람들의 삶을 되뇌고 있다. 조급함을 버리고 촘촘히 새겨놓았을 간절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혹여, 사람이 하늘인 오늘을 꿈꾸고 있지는 않았을까. 넘치는 풍요와 첨단의 세상을 사는 지금, 비울 줄 알고, 버릴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평범한 일상의 진리가 세상 속으로 훈습(熏習) 되어 흐를 때만이 기억이 멈춘 향나무는 천상의 향기를 쏟아내며 떠오르지 않을까. 그것만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사람들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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