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표(師表), 송기숙의 삶과 문학(1)
우리의 사표(師表), 송기숙의 삶과 문학(1)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12.0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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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숙(전남대학교 교수)

지난 11월 25일 오후 3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 영상실에서 ‘송기숙 문학강연’이 개최됐다.이날 조은숙 교수(전남대학교)는 ‘송기숙의 삶과 문학세계 조명’이라는 주제 강연을, 최현주 교수(순천대학교)는 ‘개벽의 문학, 문학의 정치-녹두장군’이라는 주제강연을 했다. 이 두 발제자의 가연 요지를 2,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송기숙 작가는 장편 6편, 중편 8편, 단편 43편의 소설, 연작소설집 1권, 산문집 3권, 민담집 1권, 설화집 6권 등을 발표한 위대한 소설가였다.

그는 작품 속의 소재 대부분을 당대 사회의 모순과 이와 결부된 자신의 삶에서 찾았는데, 그러한 송기숙에 대해 문단(문학계)에서는 “①1970~1980년 가장 치열하게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 살아온 작가’ ②잘못된 시대와 싸우는 ‘지식인’ ③펜을 놓지 않는 ‘작가’ ④‘저항 문학의 기수’ ⑤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중 소설가’ ⑦‘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불려지고 있다

문학의 모태는 동학도 외할아버지

문학의 산실은 장흥고, 김용술 선생

송기숙 문학의 원천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1939년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의 기억으로 외할아버지는 보통의 따스한 외할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부드럽고 따스했던 보통의 외할아버지는 동학도로서 치열했던 동학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러한 경험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강인한 민중의 표상으로 표현되기에 이르니, 이후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1974년에 『자랏골의 비가』에서부터 『암태도』(1981), 『녹두장군』(1994), 『은내골 기행』(1996), 『오월의 미소』(2000)까지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강인한 민중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송기숙 문학의 출발은 동학이었다. (그는 자신이 동학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포곡마을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했는데, 날마다 억불산 자락인 자포지재를 넘나들면서 바라보았던 석대들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항전지였음을 알게 되면서 동학을 주제로 소설을 쓰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석대들을 생각할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얼굴은, 공주 전투와 전봉준 장군의 최후 전투지였던 태인 전투에 참가했던 외할아버지였다.

송기숙은 '석대들’을 바라보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그 자체가 역사의 왜곡이며, 그것은 또 다른 범죄’라고 생각하고, 문학을 통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송기숙의 본격적인 창작의 산실은 장흥교등학교였다.

1953년 19세에 만학생으로 장흥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김용술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그가 문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용술 선생은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배부른 자들의 관념적인 이념에 의해,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구분이었다” “농촌 사람들의 가난은 그들이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인 모순에서 기인된다”는 등의 내용의 가르침을 주었고, 이점에 대해 송기숙은 깊이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김용술 선생 영향은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함께 저항의 땅인 고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로소 문학을 시작한 송기숙은 그의 첫 번째 단편소설 ‘물쌈’을 교지 ‘억불’ 창간호에 게재하였다. 이 소설은 가뭄으로 인한 농민들의 애환을 구체적으로 그린 소설이었다.

또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지에 투고한 소설 <야경>이 당선됐는데, 이 소설은 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 대신 야경을 했던 경험을 작품으로 쓴 것이었다. (이때까지 송기숙의 본명은 송귀숙이었고 송귀숙이란 이름으로 원고를 투고, <학원>지에서도 여학생인 것으로 알아, 이때 송기숙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게 됐다)

전남대 국문과 입학과 군 입대

산 경험‧체험을 소설로 승화

송기숙은 1956년 4월 8일 전남대학교 문리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진공지대」를 ‘국문학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공부한다.

송기숙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57년 학보병으로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1959년 복학하여, 문학의 힘을 빌려 군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단편소설 「진공지대」, 「사모곡 A단조」, 「전우」를 썼다.

이처럼 군대에서의 경험을 소설로 썼듯이, 그는 교육지표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 때도 "여기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소설로 쓸 것이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 옥살이 이후 유신체제가 일제강점기보다 더 악랄한 사회체제임을 소설로 폭로하는데, 이 소설들이 바로 『암태도』, 『은내골 기행』이었다.

평론가‧소설가로 등단과 목포 시대

송기숙이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64년 「창작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현대문학)이라는 평론으로 조연현평론가의 추천을 받았고, 이후 「이상 서설」(현대문학)로 조연현 씨의 추천 완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65년 4월 9일 목포교육대학에 전임강사로 부임, 소설가로서 길을 걷기에 이른다. 즉 「대리복무」(현대문학, 1966), 「어떤 완충지대」,「백의민족 ‧1968」,「영감님 빠이빠이」를 비롯 「사모곡 A단조」,「휴전선 소식」,「어느 해 봄」 「낙제한 교수」,「전우」,「테러리스트」,「재수 없는 동행자」을 창작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1973년 현대문학 소설부분 신인문학상 단편집 『백의민족』이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입지하게 된 것이다.

송기숙은 1973년 전남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로 발령받으며 전남대학교 시절이 시작된다.

전남대학교에서 민담 취재를 하며 다양한 설화를 접하게 된 송기숙은 6권의 설화집을 발간하기도 한다. 그 설화집이 「거짓말 잘 하는 사윗감 구함」,「제불알 묻어버린 호랑이」, 「모주꾼이 조카 혼사에 옷을 홀랑 벗고」, 「정승 장인과 건달 사위」,「아전들 골탕먹인 나졸 최환락」,「보쌈당해서 장가간 홀아비」 등이다.

송기숙 문학의 진정한 출발, 『자랏골의 비가』

송기숙은 『자랏골의 비가』를 쓰기 전에는 창작활동이 자신과 거리가 먼 추상적인 문제를 잡고 있다고 느꼈는데, “자신이 자랐던 동네를 모델”로 하고, “어렸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하면서부터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고 핍진하게 이야기들이 꾸며졌다”고 밝혔는데 그 소설이 『자랏골의 비가』였다.

『자랏골의 비가』에 드러나는 자전적 요소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송기숙이 성장한 곳(장흥군 포곡마을)이며, 작품 속의 인물도 실제 모델이 많다.

해룡, 해룡이 아버지, 끝심이, 폰돌 등은 실존 인물이었다. 또 동학 농민군으로 활약하다가 자랏골에 숨어 들어와 살고 있는 고당 영감의 장남인 김태율의 묘사를 통해 송기숙 자신이 동학의 후손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자랏골의 비가』는 송기숙이 자신의 고향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랏골의 비가』에서 시작된 민중의식의 서사화는 이후에 발표된 많은 중‧단편과 『암태도』, 대하소설 『녹두장군』 등으로 이어지므로 『자랏골의 비가』는 송기숙 문학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랏골의 비가』는 송기숙에게 역사소설의 출발점인 동시에 민중의식의 발현과 민중 주체성의 자각을 형상화한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랏골의 비가』는 농민들의 문제이기 이전에 양문이와 자랏골 사람들의 지배와 피지배 문제로 ‘묏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민중의식의 발현 과정을 3대에 걸쳐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자랏골의 비가』 외에도 그의 작품 중 과거사 청산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으로 「추적」(1975), 「불패자」(1976), 「가남약전」(1977), 「도깨비 잔치」(1978), 만복이」(1978), 「땅꾼의 꼭지」(1978), 「살구꽃이 필 때까지」(1980), 「개는 왜 짖는가」(1983), 「부르는 소리」(1987) 등이 있다.

송기숙 문학 공간, 자랏골 정자나무

한 소설 작품이 탄생하는 데는 그 작가의 삶과 시대적 배경이 함께 녹아 그 작품만의 장소성을 만들어 낸다. 문학 작품에 녹아 든 이 장소는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송기숙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정자나무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문학적 산실인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 마을에 있는 정자나무이다.

“저녁을 먹은 자랏골 사람들은 한 사람씩 정자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살랑거리면서부터 좀 한산했던 정자나무 밑이 오늘 저녁에는 장터처럼 술렁거렸다. 양문이 묏등에서 한쪽으로 조금 비껴 동각이 앉았고, 그 동각 마당 축대 밑으로 예삿집 마당 서너 개 넓이에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여러 그루 솟아 있었다. 정자나무 고목들이 빽빽하게 가지를 얼싸안아 지붕처럼 두껍게 하늘을 가리고 있어 비라도 오는 날이면 대낮에도 컴컴할 지경으로 녹음이 짙었다. 오늘은 추석을 이틀 앞둔 열 사흘, 달이 중천에 밝았으나 정자나무 밑은 불 꺼진 방처럼 어두웠다. 좀팽나무 등걸에 호롱불이 하나 걸려 사방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송기숙, 『자랏골의 비가』 중에서)

<다음 호에서 계속>/김선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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