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다시 위령비를 세우며
특별기고 - 다시 위령비를 세우며
  • 장흥투데이
  • 승인 2022.12.07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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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서울대 명예교수,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이 끝나고, 지리산 영신봉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김해에 이르는 산맥을 우리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이라고 부른다. 이 산줄기가 함안과 마산·창원의 경계를 지날 때 솟아오른 봉우리가 여항산(770m)과 서북산(738.5m)이다. 이 산들이 바로 6·25전쟁의 운명을 결정했던 마산방어전투의 현장이었다. 1950년 8월초부터 진주에서 마산으로 향하던 북한군 6사단을 저지하기 위한 유엔군과 국군의 필사적인 전투가 이곳에서 전개되었다.

서북산 남쪽 진동지구에서 해병대 김성은 부대, 그리고 서북산 북쪽 함안에서 미군 25사단이 분투했다. 이후 9월 중순까지 6주간 진행된 서북산과 여항산의 고지전에서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다고 하니 그 치열함을 상상할만하다. 북한의 종군작가로 와 있던 소설가 김사량이 서북산 고지에서 쓴 종군기 ‘바다가 보인다’가 9월 17일 작성되었으니, 그날이 아마 마지막으로 주인이 바뀐 날이었을 것이다. 그가 본 “흐늘어지게 아름다운 바다”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민안(民安)비, 전적비, 그리고 ‘백운고비’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1988년 초, 여항산 입구에 호국영령을 기억하고 군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6.25격전 함안 민안비’가 세워졌다. 뒤이어 1992년 해병대 사령부는 ‘진동리지구 전첩비’를 세웠고, 1995년 육군 39사단은 서북산 전투에서 산화한 로버트 티몬스 대위와 유엔군 병사들을 기리는 전적비를 세웠다. 이 전투의 희생자는 미군 700여명과 국군 1,000명을 포함하여 총 1,700명,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티몬스 대위의 아들이자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리차드 티몬스 중장이 함께 하였다. 티몬스 대위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던 2020년 11월,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전쟁의 희생자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전투원 못지 않게 민간인들의 희생도 무척 컸다. 이들을 추모하는 위령비는 언제 세워졌을까? 이 지역에서 민간인 위령비의 출발은 2018년, 그러니까 민안비가 세워진 지 30년후에 건립된 ‘백운고비’(白雲孤飛)비다. 그대로 옮기면 “흰 구름은 외롭게 날고”이지만, 실은 당나라 고사를 빌어와 멀리 떠나온 자식이 어버이를 사모하여 그리는 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 비는 함안유족회가 민간인 희생자 700명을 새긴 각명비와 함께 있다. 이 비 바로 앞으로 함안천이 흐르고, 서북산과 여항산이 멀리 가까이 보인다. 이 평화로운 장소가 대전투 직전에 발생한 예방학살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데, 하물며 ‘백운고비’라는 표현이 위령비나 추모비라는 이름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위령탑과 북춤

올해 3월 진주 민간인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지고, 11월에는 진전 곡안리 이씨 사당에 미군에 의한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진 데 이어, 마산 가포해변에 창원위령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바로 유명한 가곡 ‘가고파’에서 표현된 “파랗고 잔잔한 고향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위령탑 오른쪽 위로 마창대교가 지나는데,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괭이바다의 파도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하다. 마산형무소 재소자나 보도연맹원 700명 이상이 수장되었다고 전해지는 그 바다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말했던 그 바다였을까?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은 유족들에게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재현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역사와의 화해를 향한 첫 걸음이다. 근래에 열리는 추모제에서 빠짐없이 낭독되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은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의 서러움이 겹쳐지는 순간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한다.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위령탑은 어떤 의미일까? 위령탑 제막식의 마지막 순서는 북춤, 전쟁희생자 모두를 안식의 세계로 안내하는 춤사위와 함께, 낯선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둥둥 북소리가 제공해 주는 듯했다. 탑을 돌면서 참석자 모두가 추모공동체가 되었다.

►정근식 교수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서울대 전 통일평화연구원장/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 *저서 :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국제연대〉(공저, 한울, 2018)/〈평화를 위한 끝없는 도전〉(공저, 북로그컴퍼니, 2018)/〈소련형 대학의 형성과 해체〉(공저, 진인진, 2018)/〈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공저, 진인진, 2016)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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