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장흥’(2) - 장흥군은 원시시대 대한반도에서 복지(福地)요, 낙토(樂土)였다
■'다시 읽고 새로 쓰는 장흥’(2) - 장흥군은 원시시대 대한반도에서 복지(福地)요, 낙토(樂土)였다
  • 김선욱
  • 승인 2023.01.0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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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경쟁력이 가장 강성했던 땅이었다
‘신북구석기 유적’, 유물 3만점, 국내 구석기 유적 최대 규모
구석기… 보성강 상류‧ 탐진강변에 구석기인 떼 지어 살았다
청동기 유산 고인돌 2,251기- 전남, 한국에서 최다 분포지였다
400m 이상 高山 32개, 탐진강 등 수자원 풍부 … 최적의 삶터

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인

 

 

▲장동면 북교리 신북 구석기 유적 발굴지역
▲신북 구석기 유적 표지판
▲관산읍 방촌리 고인돌군

 

 

 

 

 

 

▲유치면 신풍리 선사유적공원

 

 

 

 

 

 

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인

신북 구석기 유적- 유물 3만점

신북 구석기유적은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신북마을이 자리한 검은둥이 언덕(해발 190~165m)의 남쪽에 있다. 신북유적의 규모는 유물이 확인된 범위를 기준하면 약 12만여㎡으로 추산되고, 유물이 들어있는 지층의 분포 범위로 보면 신북마을을 포함한 언덕 전체가 해당되어 약 30여만㎡으로 추정된다.

이 후기 구석기 유적((3만5천∼1만년전)은 2002년 8월에 국도2호선 장흥-장동간 도로 확포장 구간도로 건설 구간의 교량 터파기 공사 때 문화층이 드러나면서 발견되어 2003년-2004년 사이 7개월간의 발굴조사(조사기관 : 조선대학교 박물관, 조사 면적18,000여㎡) 결과 3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①장흥 신북유적은 한국에서 보고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유물의 밀집도도 가장 높은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발굴된 신북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2㎞ 범위에 20여 개의 구석기 유적들이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신북유적은 거점 유적으로 추정될 뿐이었다.(그동안 후기 구석기 유적 중 가장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순천 월평 유적지 2만평보다 2배인 6만여 평의 유적지였다)

여기서 화덕자리가 6개 이상 드러났고, 대표되는 뗀석기로는 좀돌날(세형돌날)몸돌, 새기개, 밀개, 슴베찌르개, 창끝찌르개 등이 있으며, 유적의 중심 연대는 22,000년 전(방사성탄소연대)으로 재어져 후기구석기 후반의 석기 발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②출토 유물 3만여 점 중 간돌자귀(돌을 깨뜨린 뒤 갈아서 날을 세운 도구)와 숫돌 등 다양한 형태의 후기 구석기 유물 50여 점이 후기 구석기의 간석기(마제석기)로 확인, 그 동안 마제석기는 청동기시대 유물로 생각돼 왔던 기존 통설을 바뀌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즉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간석기가 출토, 우리나라의 구석기에도 뗀석기-간석기로 이어지는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주어, 아연 학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마제석기의 출토는 그동안의 ‘마제석기=신석기 유물’이라는 등식을 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③일본 학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갈아서 만든 돌도끼(간석기) 등의 유물로,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간석기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신북 유적에서는 간석기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출토된 예가 없는 수정 좀돌날몸돌도 나왔고,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창끝찌르개, 슴베찌르개 등 찌르개와 밀개, 긁개, 자르개 사냥용 석기는 고도로 발달한 사냥기술은 물론 사냥한 짐승의 가공까지 빈번하게 이뤄졌음을 입증하게 했다. 특히 뼈나 뿔을 다루는 새기개가 다양하게 출토돼 작살이나 끼움날 연장을 만드는 일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④신북 유적의 유물인 흑요석의 성분분석(PIXE) 결과 그 원산지가 백두산과 일본(큐슈 등)으로 추정되었다. 이 점은 유베쯔기법의 좀돌날몸돌, 슴베찌르개와 함께 신북유적의 후기구석기인들이 일본열도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학자들은 분석했다.

이처럼 장흥 신북유적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나라 후기 구석기 문화가 일본, 중국, 시베리아 등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 문화와의 연관성을 풀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아주 큰 유적이었다.

⑤ ▲이기길 교수(조선대박물관장) : "장흥∼장동간 도로 신설구간 인근 6,000여 평에서 발굴조사 작업을 벌인 결과, 후기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규모 살림터와 3만여 점의 석기를 출토했으며 이중 일부는 간석기로 입증됐다. …중략…이제까지 구석기시대 마제석부(간석기시대 석기들)가 출토된 것은 일본 간노키(貫ノ木) 유적 등 여러 곳에서 3만년 전 쯤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진 뒤 신석기 시대에 가서 다시 등장했다는 게 그동안의 정설이었다. 때문에 그동안 일본 구석기 학자들은 자신들의 마제석부가 세계 최고 간석기라고 주장해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간석기 유물이 발굴 된 것이다. …조사 결과 유적지 규모는 모두 마을들을 빼고 4만여 평에 달할 것으로 추정돼 후기 구석기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알려진 순천 월평유적(2만여 평)의 2배에 달한다."

▲손보기 교수(연세대학) : "우리나라 석기는 전부 단절돼 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뗀석기와 간석기가 같이 나오기는 힘들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주로 뗀석기만 출토됐다. 그런데 이번에 장흥에서는 그동안 출토되지 않아 단절되었던 것으로 알았던 간석기 유물이 출토돼 이것만으로 큰 의의가 있다.”

원시인들의 주요 거주지는 강변과 고산 기슭이었다. 산에서 나무뿌리를 캐고 열매 등을 채취하기 위해서, 강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구석기 유물이 중점 발굴된 지역도 보성강 상류지역의 강변 일원이었다. 장흥지역에는 장동‧장평면 지역이 보성강 상류지역이었다면 유치‧부산면, 장흥읍 지역은 탐진강이 관통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보성강 상류뿐만 아니라 수량이 더 풍부하였을 탐진강 유역 주변에도 더 많은 구석기인들이 떼지어 거주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고인돌 유적 – 장흥이 대한반도에서 최다 분포

선사시대 유산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유적이다. 고대 유산 및 고대 유적(유사 이후 장흥은 마한, 백제 지역이었다)은 집터, 묘제(고인돌, 석실분 등) 등이다. 이러한 고대 유적은 주로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해 확인된다.

장흥의 선사 고대유적(고인돌 등)에 대한 조사는 여러 곳에서 누차 실시한 바 있었다. 연도 별로 살펴보면,

①1985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원으로 국립목포대박물관에서, 장흥의 선사고대유적에 대한 조사를 했다. 이때의 조사 결과는 책자로 간행되지는 않았는데 당시 사진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누리집에 제공한 바 있다.

②1988년, 전라남도와 장흥군의 지원으로 국립목포대박물관에서 장흥군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 『장흥군의 문화유적』(1989)을 펴낸 바 있다.

③1996년, 국립광주박물관‧전남대박물관‧목포대박물관이 전남도의 의뢰로 1995년 6월부터 1996 12월까지 전남지역에 분포된 고대묘제 유적을 조사, 「전남의 지석묘」(『전남의 고대 묘제』, 이영문·조근우, 목포대학교박물관, 1996)라는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④2004년, 남도문화재연구원이 『문화유적 분포지도-장흥군-』을 발간한 바 있다.

⑤2020년, 장흥군 고인돌 유적 유네스코 등재추진을 위한 학술연구 용역으로 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서 『장흥 고인돌 현황조사』를 펴낸 바 있다.

이같은 일련의 고인돌 관련 조서 등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 조사 보고서는 1989년 발표된 목포대박물관의 『장흥군의 문화유적』, 1996년 발표된 이영문·조근우저, 목포대학교박물관 발행의 「전남의 지석묘」이다.

『장흥군의 문화유적』은 가장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장흥군 일원의 지석묘를 조사 발표했다는 점에서이고, 「전남의 지석묘」는 3개 기관(국립광주박물관‧전남대박물관‧목포대박물관)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전라남도 일원의 모든 지석묘를 조사하여, 각 지역 간의 고인돌 현황을 비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였다.

1988년 조사 결과 『장흥군의 문화유적』에서는 장흥군에 청동기시대 묘제인 고인돌(지석묘)이 213개군 2,251기가 확인되었다.

“(장흥군)지석묘는 213개군 2,251기가 조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각 지역의 지석묘 중 기장 많은 분포이며, 이들 지석묘 들은 크게 3개 지역으로 나누어 분포되어 있다. 보성강 상류지역으로 장평면‧장동면 일부가 해당되는데 29개군 188기가 있다. 다음은 탐진강 유역으로 장동면 일부 지역과 유치면, 부산면, 장흥읍 등이 해당되는데, 73개군 613기가 분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남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안양면, 용산면, 관산읍, 대덕읍, 회진면 등이 해당되는데, 모두 111개군 1,450기가 분포되어 있다.”(『장흥군 문화유적』, 11쪽).

이때의 조사에 의하면, 관산읍에만 총 80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이중 남송리 흥기에 96기가, 방촌리 신기 3곳에 86기가, 방촌리 호산 1곳에 100기가, 방촌리 내동 3곳에 114기가 분포되는 등 100여기가 밀집 분포된 곳만 4곳이나 되었다. 이 사실은 그만큼 관산읍의 천관산 자락에 수많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오래도록 운집해 살았다는 증거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영문·조근우 저 「전남의 지석묘」 조사에서는 장흥군의 고인돌 분포 수는 2,509기로 전남에서 가장 많고 전국 시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밀집지역으로 평가 받았다.

「전남의 지석묘」 조사에서는 전남도 고인돌이 2,208군데 19,058기가 분포하고 지자체 별로는 ▶장흥군 2,509기 ▲고흥군 2,055기 ▲보성군 1,606기 ▲화순군 186기 ▲나주시 1,210기 ▲해남 1,089기 ▲순천시 1,040기 ▲강진군 971기 ▲함평군 804기 ▲진도군 563기… 순이었다.

한국의 고인돌은 약 4만여 기가 분포하고(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4만여기 중 특히 전라남도에서 거의 2만여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한다는 사실은 학계의 정설이다. 그 2만여 기의 고인돌 분포 수에서 장흥이 2천500여기로 가장 많으니, 장흥은 대한반도에서 고인돌 분포수가 최다지역인 것이다.

낙토(樂土)요, 복지(福地)요, 덕지(德地)였던

장흥은 원시시대 가장 살기 좋은 땅이었다

청동기 시대, 농경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식량 공급이 충분하게 이루어지게 되자 비로소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되는 집단거주가 이루어지고 이때부터 마을들이 모여지면서 비로소 부족시대가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인돌은 이 부족시대의 부족장의 무덤으로 유추되고 있다.

고인돌 상석의 경우, 수십에서 수백 톤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를 이용했기에 많은 인력을 동원해 옮겨서 조성했고, 이 때문에 주로 지배층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따라서 최고 지배층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권력을 가졌던 분들이 고인돌에 묻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고인돌 조성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해서 초기 부족 국가의 형태를 띠었을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고인돌 조성에는 장정 50명~100여 명까지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력 동원이 가능했던 시대는 부족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이 집중 분포된 장흥지역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부족국가 시대에 장흥은 가장 많은 부족들이 떼지어 거주했을 것이다. 이 부족들이 살았던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원시시대 장흥군은 대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있던 온화했던 땅이었다.

또 원시인들에게 필수적인 먹거리 즉 나무뿌리와 나무열매, 짐승 사냥이 용이한 고산들이 가장 많은 땅이 장흥이었다. 장흥은 400m 봉 이상의 산들이 무려 32개나 널려 있었던 땅이었다.

사람에게 일차적인 생명수요, 고기잡이로 생계 영위에 최적이었던 탐진강이며 보성강 상류와 남부지역의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하천들이 있었고 가까이로 남해가 지금의 2개읍 3개면에 걸쳐 넘실거려 그 어느 지역보다 수자원도 풍부했던 땅이었다.

고려말 문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유배와 지낼 당시 기록한 ‘중령산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에 “…고을이 큰 바다 언덕에 위치하여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다. 옛날에는 낙토(樂土)라고 일컬었다. 府岸大海。草木多冬靑。古稱樂土”며 장흥 땅을 낙토라고 하였다.

굳이 이색 포은이 장흥을 ‘낙토’라고 표현하지 않았어도, 본디부터 장흥은 낙토(樂土)요, 복지(福地)요, 덕지(德地)의 고을이었다. 특히 원시인들에게 그야말로 더없는 낙토(樂土)였던 땅이 바로 장흥땅이었다.

산은 덕(德)이고 인(仁)이었으며 물(강)은 지식이요 지혜(智慧)였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의 본질이 산과 강이었고 산과 강은 가장 인간다운, 가장 아름다운 삶의 지침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흥 땅은 본디부터 삶의 복지(福地)요, 덕지(德地)가 될 수 있었다.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고, 인자한 자는 고요하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삶을 즐기고, 인자한 자는 오래 가는 것이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옹야편>”고 했다. 노자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지만 공을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訴惡, 故幾於道-<도덕경> 8장”고 했다.)

이처럼 산과 강이 픙요로운 장흥 땅은, 본디부터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천태적인 환경을 가진 곳이었던 것으로 당연히 문명 이전의 원시인들의 삶의 경쟁력이 유난히 강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원시시대 때 장흥군은 이처럼 대한반도에서 삶의 경쟁력이 가장 강성했던 곳이었기에, 구석기 때부터 그러했고 신석기‧청동기 때도 장흥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거주 했을 것으로 유추되는 것이다.

이처럼, 특히 천관산 일대에는 고대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에, 유사시대에 접어들며, 삼국이 형성되고. 통일신라가 이루어졌을 때, 천관산을 중심으로 장흥지역은 천관보살 사상을 정점으로 한 ‘불국토(佛國土)’라는 일대 불교의 융성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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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남지역에 분포된 지석묘는 총 2,208개소에 19,058기인 것으로 확인됐다. 장흥군이 최다 분포지고 장흥군에 이어 고흥군 2055, 나주시 1,210기 순이었다. ·면단위로도 300기 이상을 보유한 지역이 장흥군 관산읍 802, 고흥군 동강면 466기 등 7개 지역에 이른다. 유역별로는 남해안지역 17,773, 영산강 유역이 4,218, 보성강·섬진강유역이 4,096, 서해안지역이 2,971기 순으로 분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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