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 - 늙기도 설웨라커든

김선욱 시인

2023-03-02     장흥투데이

 

늙기도 설웨라커든

   할미꽃 4

 

여태 꽃 추윈 떠나지 않고

환한 봄날은 저만큼 서성거려

서둘러 세상 밖으로 나온 게 잘못이다

발부리에 걸린 동상은 채 낫질 않았는데

첫 봄에 피는 꽃이라 꽃 잔치 연다고 구경나와

볼품없다며 무시해버리는 속사정 모를 리 없지만

 

허리도 펴기 전인데

젊은 것들은 아예 발로 짓밟고 다니는 구나

남풍 불고 해가 풍요로운

이 땅이 내 고향인데

축복은 못할지언정

강제 징집으로 내 이웃들 파내어

네들 집으로 데려가는 꼴

지켜보노라니 울화통이 치민다

 

보라, 빈터에 잡풀 검불만 우거지는구나

당초 볼품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못 생긴 게 죄라면 죄일 터

내 잘못 아니라고 항변해 봐야 씨도 먹히지 않을 터

이 세상에 움트고 나와

피운 내 꿈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네들이 어찌 짐작이나 하리

이른 봄에 세상으로 서둘러 튀어나와

네들 시선받는 게

내 죄이려나

 

늙기도 설웨라커든*,

어느 놈이 내 얼굴 짓뭉개고

허릴 댕강 부러뜨려 놓았으니

나 속절없이 죽어가는구나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러나 허리 꺾어져 죽어가며

비로소 보는 하늘

저리 푸르고 푸르구나

 

*정철의 연시조 ‘훈민가’ 중 제16수 ‘반백자불부대(斑白者不負戴)’시조의 한 구절.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 나는 저멋거니 돌이라 무거울가/늙기도 설웨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