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장흥 사인정과 관련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
특별기고 - 장흥 사인정과 관련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3.02.0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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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김구 선생은 장흥초등학교에서 언제 특별강연(유세)했을까?

1946년 9월 22일 또는 9월 23일 유세한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1898년 3월 9일 밤에 인천감옥소에서 탈출하고 도망자로 다녔던 연고지를 찾아 특별강연(유세)했기 때문이다.

김창수(1876~1949, 안동김씨, 훗날 김구 라는 이름으로 개명)는 1896년 2월 21세 때 황해도 해주 치하포 주막에서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본사람 쓰치다쬬스케 군인장교를 만났고,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고로 일당으로 잘못 알고 일본인을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황제의 특사로 사형이 중지된 후 인천감옥소에서 1년 8개월 수감하다 탈출했다.

1898년 5월 김구 선생은 안동김씨 집성촌인 보성 득량면 쇠실마을에서 45일간 숨어 지냈던 김승묵(1864~1937)집을 9월 22일 방문했고 보성으로 옮겨 강연(유세)를 마치고, 장흥에서 강연(유세)하고 강진을 거쳐 목포로 이동해 9월 24일 광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은 1946년 9월 14일부터 10월 4일까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당시 입법의원인 민선의원 45명과 관선의원 45명을 뽑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되는 선거를 앞두고 한국독립당의 조직 강화를 위해 특별강연(유세)를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해임시정부 망명길에 사인정에서 1박하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임시정부 망명길에 장흥 사인정에서 1박했다고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어 필자는 사실이 아니다. 라고 장흥투데이(2022년 5월 20일)와 장흥신문(2022년 5월 27일)에 특별기고한 바 있다.

왜냐하면 김구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던 방향은 황해도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단동에서 이륭양행으로 가는 배를 4일 동안 타고 상해 푸동 나루에 1919년 4월 13일 도착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인정 앞에 2005년에 설치된 홍보안내판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상략)...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전국 최초로 실시한 총선거 유세차 백범 김구 선생께서 장흥초등학교에 오셔서 2천명 청충 앞 연단에서 ”장흥과 나는 장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와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본인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이곳 사인정에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일박하면서 지친 몸을 쉬여간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라고 직접 말씀하신바 있다. ...(하략)...

그래서 이번에는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면서 사인정에서 1박했다는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으려고 자료출처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년 발행)의 상해 망명부분 내용”을 밝힌다.

43세 김구는 3.1운동을 맞은 것은 그의 고향 황해도 안익군 동상평 농장에서였다. 서당 같은 학교에서 농촌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리키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하던 때다.

김구가 ‘만세운동’을 거부하는 이유와 중국으로 탈출하는 과정 즉, 만세는 젊은이들이 부르면 되고, 김구 자신은 장래계획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는 말이다. ...(중략)...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을 보고 즉시 출발하여 사리원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이튼날 신의주행 기차에 올랐다.

나는 중국인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큰 다리를 지나서 안동현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을 하고 좁쌀장수라 하고서 7일을 경과한 뒤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했다.

김구 선생은 보성 쇠실마을로 가면서 사인정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가 고종 황제의 특사로 사형이 중지된 이후 인천감옥소에서 수감생활하다 1898년 3월 9일 밤 감옥을 탈출한 이후 서울, 수운, 오산을 거쳐 공주 마곡사에서 스님으로 생활하다 함평, 목포, 해남을 숨어 다니다가 강진 내동마을(현재 해남군 북일면) 김창묵(안동김씨, 1867~1938)집에 잠시 머물렀는데 김창묵은 자기 집은 은신처로 적합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해 안동김씨 집성촌인 보성 득량면 쇠실마을 김승묵(1864~1937)에게 소개해줬고, 김구 선생은 강진에서 보성으로 가는 길목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장흥 사인정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잠시 휴식하였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사인정과 관련된 잘못된 홍보내용을 바로 잡아야 한다.

먼저 집필된 책자이다. 장흥군 암각문(홍순석, 2021년, 한국문화사 p.78) 문림의 향기Ⅰ(장흥군, 2016년, p.148), 문림고을 장흥(장흥문화원, 2010년, p.37 ), 장흥의 亭(장흥군, 2009년, p.89), 장흥의 亭.射.臺(장흥문화원,1998년, p.77), 장흥군지(장흥군,1990년, p.985)에 중국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는 길에 장흥 사인정에서 1박했다 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사인정 앞 홍보안내판을 아래와 같이 정정해야 한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전국 최초로 실시한 총선거 유세차”를 “1946년 10월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행정단위별 간접선거 유세차”로 고치고, 또한 “상해임시정부로 망명길에 오르면서”를 “보성 쇠실마을로 가면서”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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