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암, 1930년대 천도교 중앙부 최고 권위자 중 1인 부상
성암, 1930년대 천도교 중앙부 최고 권위자 중 1인 부상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11.0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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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물/성암 김재계(중)
청년동맹중앙집행위원, 금융관장 역임-천도교 핵심인물로 입지

최후 독립운동으로 멸왜기도운동 주도-고문 휴유증으로 사망

■성암- 천도교 중요 핵심간부로 부상, 활동

1922년 1월 18일 제4세 교주 박인호의 취임을 계기로 불거진 박인호의 승통 문제로 천도교내 신구파의 갈등이 불거지게 된다.

당시 천도교에서 중앙 지도부 인사로 활동하였던 성암은 구파의 핵심적인 이사이면서 한편으로 대승적인 입장에서 신구 분열 극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또 성암은 천도교단에서 민족문화 향상에 이바지하겠다는 목적으로 펴내는 ‘천도교회월보’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주 글을 발표,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이러한 글들은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무렵 성암은 장흥의 주요 핵심 간부로 활동하면서 장흥과 중앙을 오르내리며 활동하게 되는데 이 무렵 그는 천도교에서 중추적인 핵심 인물로 급부상한다.

그 몇 가지 중요 내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25∼1935년 : ‘천도교회 월보’ 편집위원 역임 – 해마다 3∼6편씩 중요한 글 발표.

(천도교회 월보 1931년 1월호- ‘신년사’에 김재계는 ‘공정’이라는 글을 게재. 중앙의 핵심간부로서 김재계의 입지 웅변)

▲1926년 4월 3일 : 천도교회 중앙 종리원 청년동맹창립 때 전형위원 5인, 집행위원 13인 피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1927년 : 좌우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 결성. 김재계는 천도교 중앙조직 차원에서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

▲1929년 7월 18일 : 천도교 청년동맹전남연맹 설립. 전남의 천도교 주 세력이 장흥·완도·강진 지방으로 ‘연맹’ 창립대회 장흥종리원서 개최

▲1930년 12월 23일 : 중앙 종리원 합동대회 ‘감사관 관정’에 임명

▲1932년 6월∼1936년 12월 말 : ‘천도교회 월보’에 ‘교회사’ 연재

▲1933년 2월∼1935년 : 천도교 중앙종리원 금융관장에 임명(천도교 자금 담당)-명실상부 천도교 중앙부 최고 권위자 중 1인으로 부상

▲1934년 4월 4일 : 중앙종리원 임원 개편서 금융관장 재임 겸 경도사(敬道師)에 임명,

▲1936년 9월 5일 : 천도교 교헌 폐지, 대헌제 부활 위해 대헌 수정자(7인)로 김재계 참여

▲1936년 10월 5일 : 대헌 발효에 따른 중앙 임원 개편서, 김재계 금융관장에 재임.

▲1936년 10월 22일 : 박인호 교주가 김재계 등 4인 소집, 천도교 미래 당부.

1937년 4월 4일: 중앙대회 임원개편서 김재계 금융관장 겸 공선관장에 임명

■성암, 최후의 독립운동 –멸왜 기도운동

아산시 무인년  멸왜기도운동 기념탑

언급했듯, 천도교는 1920년대를 전후하여 교주의 승통문제를 놓고 최린을 중심으로 하는 신파와 박인호를 중심으로 하는 구파로 양분 상호 갈등하고 있었다.

최린은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니 자치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1930년대 이후 천도교 친일행위로까지 이어진다.

대신 박인호 중심의 구파는 신파와 대조적으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을 일본의 식민지화 하고 중국 본토 침략을 앞두면서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강화하는 시기에, 조선의 영구 식민지화에 대한 우려 속에 그 대응방법으로 광복이 되는 순간까지 반일의식으로 민족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

이 구파의 항일의식을 위한 대표적인 운동이 멸왜기도 운동이었고, 성암 김재계도 바로 구파의 지도층의 인사였다.

멸왜기도 운동이 추진된 때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진행하면서, 한민족에게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였던 시기였다. 지속적으로 반일항쟁을 부르짖어 온 박인호, 김재계 등을 포함한 천도교 구파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독립을 위하여 교단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민족운동인 멸왜기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부터 누차 협의(모의)한 결과 1936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38년 4월 30일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기까지 멸왜기도 운동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식고문(食告文)’ 계획이었다. 천도교 구파는 아래와 같은 식고문(食告文)이라는 기도문을 작성, 매일 아침, 저녁을 먹을 때마다 시행할 것을 교인들에게 지시하였다.

이 계획은 멸왜기도 운동의 기초계획으로, 교도들의 정신적인 결합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 조석식 식고문 계획은 당시 황해도 연원 대표인 홍순의가 중앙 금융관장인 김재계로부터 설명을 받아 비밀리에 황해도 교도들에게 실행케 하였고, 나중에는 전국적으로 실행되었다.

“생각하는 모신 내한울님이 본래 오신 한울님을 받들어서 먹고 굴신(屈伸) 동작하는 것이 곧 내인 줄을 투철히 깨달은 고(故)로 생각하는 모신내 한울님 은덕(恩德)을 잊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 다 먹을 때까지 심고(心告)를 마음에서 잊지 아니하면 잘하는 심고(心告)니라. 이상 식고문(食告文)의 이치를 알고 항상 념념불망(念念不忘)하면 도통(道通)이 그 중에 있나니라.(용담연원, ‘동학천도교 약사’, 보성사, 1990, 375쪽.)”

멸왜기도문 운동의 두 번째 단계는 특별기도였다.

즉 1936년 8월 14일 교주 박인호는 조석식고(朝夕食告-아침 저역식사 때 한울님게 고하는 일)에 심고(心告)할 심고문 운동을 지시한 것으로 기도문에 일본을 직접 겨냥했으며,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는데, 이 멸왜기도문을 특별기도라고 이름 하여 실시하여 왔다.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掃滅)하여 속히 조선독립 달성하고 대보단(大報壇-창덕궁에 있던 명태조등의 사우)에 맹서하고 오이원수(汙夷怨讐, 병자호란 때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 기도문을 ‘보국안민(報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의 대원과 함께 심고하도록 했다.

기도문 내용은 한반도의 병참기지화라는 당시의 삼엄한 상황으로 보아 대단히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1937년 12월 20일 박인호는 김재계, 최준모, 한순회 등과 1938년도의 특별기도 실시에 대하여 협의하던 중에 종전대로 특별 기도를 실시하게 된다면 일본의 탄압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인호 는 기도문에 들어있던 ‘개같은 倭敵놈을 한울님께 造化받아 一夜間에 掃滅하여’라는 구절을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 빨리 확립되도록 기원하여’ 라는 문구로 고치고 교도들에게는 이러한 문구의 변형이 일본 측을 기

만하는 수단에 불과하므로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지시하면서, 특별기도문을 유포하기도 했다.

멸왜기도운동은 1938년 2월 17일 신천 교인 최택선의 누설로 황해도 신천경찰서 고등계에 제보되었다.

“수년 전부터 박인호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 구파의 일부에 불온한 계획이 극비리에 행하여 지고 있다는 것을 황해도 경찰부에서 관계자를 검거, 취조 중이던 바 최근 이를 종료하였으므로 금일 김재계 이하 중앙간부 4명 내지 지방간부 1명 합 5명을 치안유지법 내지 대정 7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서 송국…”(조선일보, 1938년 5월1일 기사 중 경무국장 삼교의 담화. 같은 날짜 조선일보 제2면 머리기사는 천도교 구파 일부의 불온 계획사건 송국/금일 기사해금/내용 일체 발표/ 라는 5단 제목의 기사로 사건을 보도)

멸왜기도사건(불온계획사건)으로 해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5명의 피의자 중 중앙교회 금융관장 직함으로 김재계(당시5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천도교 지도자 수십 명과 교인들을 합하여 전부 256명이 투옥되었다. 이때 박인호는 노환으로 인해 병상에 있었으므로 심문만 당하였다. 그 와중에 일본은 중일전쟁시기로 멸왜기도운동이 크게 확대될 경우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해질 것으로 우려, 교인들을 5월 20일부터 모두 석방시켜 사건을 종결하였다. 일경은 이들을 병보석으로 내보내면서 전쟁수행 중이므로 특별석방 한다는 삼교 경무국장의 담화까지 있었다.

이때 구속된 사람들은 일경의 전기고문과 가죽혁대로 맞는 등 가혹한 심문을 받고 반송장이 되었다.

당시 피검된 수백 명의 교인들 중에서도 김재계, 손필규, 이강우, 김정삼 등 4명은 고문으로 인하여 출옥한 후 즉시 사망하였고 이 외에도 112명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후에 사망(멸왜기도 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황해도 93명을 비롯 전라도 6명, 경기도 9명, 충청도 4명 등) 사망하였다.

이때 성암은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멸왜기도 운동은 전국의 각 지방에까지 확대되어 장흥 천도교들도 큰 수난을 당했다.

당시 일경은 김재계 선생과 대질신문을 위해 황해도에서 장흥까지 차를 몰고 와, 장흥 천도교 간부 박윤배, 김재반을 황해도로 연행해가 고문을 가하니 사실대로 실토했다고 한다. 또한 장흥 현지에서는 김덕호, 김병후, 김재반, 황업주, 황생주, 최기홍, 김도선, 조홍준, 김병칠 등 수십 명이 경찰에 끌려가 심고사건을 누가 주동했으냐는 등의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김재계 선생은 이때 전기고문과 가죽혁대로 맞는 고문으로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황해도와 각지 경찰서에서 고문 받은 사람들은 거의 반송장이 되어, 감옥에서 나온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한 사람이 장흥의 김재계를 비롯 논산의 손필규, 해남의 이강우, 신천의 김정삼 등 4인이나 된다.

멸왜기도 사건을 주도한 김재계, 최준모, 한순회, 김경함, 홍순의 등 5인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독립자금 불법 모금까지 발각되어 멸왜기도 사건과 함께 기소되었지만 5인 모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멸왜기도 운동은 다른 독립운동과는 다른 형태로서 가장 종교적인 민족운동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천도교가 독립을 위해 그동안 펼쳐온 많은 운동과 함께 매우 높은 정신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멸왜기도 운동이 격렬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결코 지조를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일제강점기 독림운동의 하나로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으며 그동안 천도교가 참여했던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의 맥락과 이어지는 구국운동으로서, 천도교 정신사뿐 아니라 민족운동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운동이었던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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