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장흥에서도 옥봉 백광훈을 기리고 현창해야
사설 - 장흥에서도 옥봉 백광훈을 기리고 현창해야
  • 김선욱
  • 승인 2023.05.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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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봉·옥봉 기념관’, ‘기봉·옥봉 문학관’ 추진해볼 만하다

조선 명종, 선조 때의 대문인으로,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이었던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출신이었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진사로 입격했으나 당대 출세를 보장 받았던 관리의 길을 버리고 재야와 강호(江湖)에서 시(詩)와 서도(書道)로써, 자족의 삶을 즐겼던 천상 ‘전업(專業)‧처사(處士) 시인’이었던 옥봉 백광훈.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 칭호를 얻었으며, 당시까지 유행하던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과감히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여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고, 이산해(李山海)·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조선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으며, 특히 절구(絶句) 시에 탁월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되기도 하였고,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가를 받았던 옥봉 백광훈.

그가 비록 5세이던 유소년 때 해남(당시 영암군)으로 유학을 가 해남에서 공부하고 해남에서 기거하며 해남에서 생을 마쳤지만, 그의 고향은 여전히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였다.

그의 사후 1590년(선조 23) 강진(康津)의 유생들이 그의 정신과 위업을 기려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하였고, 1981년 해남에서는 그의 유물관을 건립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고향 장흥에서는 이전에도 잊혀졌고 지금도 잊혀져 가고 있다. 명목상은 그 가 해남에서 생을 마쳤고, 그의 후손(백진남)들도 해남에서 세거하여 장흥인이 아닌 해남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옥봉은 그의 유고집인 『기봉집』 등에서 모두 500여 수의 명시를 남겼다. 그의 시편 중에 유독 장흥 관련 시들이 많다. 보림사를 소재·제재로 한 시만 10여 수에 이른다. 풍암 문위세·청영정 문희개·천방 유호인 등 당대 장흥 명사들과 관련된 시도 10여 수에 이른다.

장흥위씨 등 장흥사람의 시를 비롯하여 안양면 동계(東溪)·회진·천관사 등 장흥의 인명·지명이 들어간 시가 10여 수 그리고 장흥의 예양강이며 부산면 부춘리의 청영정과 부춘리의 강을 제재로 하여 우의적인 표현인 용호·용강으로 탄생시킨 예양강 관련의 시가 30여 수 등 모두 장흥 관련의 시가 60여 수에 이른다(아마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면 더 많은 시들이 장흥과 관련되 시로 밝혀질 것이다.)

그가 생애의 많은 시간을 살았던 해남(당시는 영암)이나, 해남에서 장흥을 오가는 도중에 거쳐가게 되는 강진과 관련된 시는 많아야 각각 20여 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장흥과 관련된 시는 무려 60여 수에 이른다. 어찌하여 옥봉의 시에서 이처럼 유독 장흥의 시가 많았을까.

그는 비록 그의 몸은 처가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해남에 있었지만, 마음과 가슴과 머리는 늘 장흥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나이 때 고향을 떠났는데 이는 고향의 상실 같은 심경이었을 것이며, 그 고향 상실은 두고두고 평생토록 그리움을 배태하고 고향에 대한 꿈을 꾸도록 하였을 것이다. 성인이 되며 결혼하였지만 결혼한 지 이태만에 아내를 여의면서 아내와의 사별은 고향상실에 더하여 그의 삶과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하며 그의 삶을 더욱 고독하고 더욱 곤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의 시(詩)에서 유독 별리(別利)에 대한 시, 사람들과의 인연이 제재가 되는 시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 그가 전업(專業)시인으로서 길을 걷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술 취한 채 쓴 시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향을 상실했지만-고향을 떠났지만-늘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회귀를 꿈꾸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틈만 나면 해남에서 한나절 반 쯤 거리에 불과한 고향 장흥 길을 나섰을 것이고, 고향 장흥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의 산하의 정서를 수많은 시편으로 담았을 것이다.

결국 옥봉에게 고향 상실과 별리의 아픔에 대한 극복으로서 숱한 명시들이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명시로 평가받는 옥봉의 ‘용강의 노래 龍江詞’는 장흥 부춘리 앞을 흐르는 예양강을 우의적(寓意的)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용강의 노래’ 뿐만이 아니다. 그가 부춘리 예양강인 용호와 청영정을 소재·제재로 빚어낸 많은 시 중 ‘용호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읊다 龍湖雜詠’ ‘용호에서 장남삼아 짓다 龍湖戱題-5수’, ‘청영정 사시사 淸暎亭 四時詞-4수’, ‘부춘의 농막에서 富春別墅’ 등은 명시중의 명시로 평가받는다.

옥봉은 그의 고향 장흥에서 특별한 인연이 맺혀진 부산면의 부춘리 앞을 흐르는 예양강에서 그 강을 용강(龍江)이고 용호(龍湖)이고 용연(龍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옥봉이 장흥에 대한, 장흥의 예양강에 대한 헌사(獻詞)요, 그의 시적 서정성을 가장 순도 높게 발효시킨 시정(詩情)의 묵시(默示)였을 것이다.

우리가 ‘해남의 위대한 시인’으로 존중받는 옥봉을 장흥으로도 모셔 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부춘정 앞 예양강변이나 장흥읍 예양강변 어디쯤에 ‘용강의 노래’ 시비라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기왕에 장흥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기봉(岐峯)은 장흥 고문학의 최고 시인으로 기리고 있는 만큼, ‘기봉·옥봉 기념관’이나 ‘기봉·옥봉 문학관’이라도 세운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역사는 기억하고 기리지 않으면 아주 묻혀진다.

탐진강은 지금 장흥 문화관광의 최대 자원이다. 그런데 이 탐진강이라는 의미가 ‘강진의 강’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전에는 ‘예양강’이었다는 그 역사적 사실을 요즘 장흥의 청소년들이며 젊은이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조명되지 않는 역사는 묻혀 지고 잊혀 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훌륭한 과거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하여도 그를 기억하지 않고 기리지 않으면 잊혀 지고 만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역사가 오늘에 이어져 있고 내일로 이어져져 갈 ‘한길’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일이라는 비전도 그 역사가 토대가 되고 모색의 동력이 될 수 있어서이다.

옥봉이 대는 영암(해남)에서 살았고 거기서 졸하였지만, 그는 평생을 고향 장흥을 그리워하고 장흥을 예찬하고, 장흥의 서정을 시화시켜 헌정하였던, 참으로 자랑스런 장흥인이요, 장흥의 위대한 시인이었다.

박경리 작가는 그의 고향이 충무시여서 충무시에서는 박경리기념관을 짓고 그를 기리어 오고 있다. 박경리는 또 그의 명작 『토지』의 4부와 5부를 원주시(단구동)에서 집필하며 원주에서 삶의 여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원주시에서도 ‘토지문학공원’과 ‘토지 문화관’을 지어 박경리를 기려오고 있다.

해남에 옥봉 유물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흥에서 옥봉을 기리는 기념관이나 문학관을 짓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장흥인이요, 진짜 장흥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옥봉의 문학을 기리고 현창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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