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기봉과 옥봉, 둘 다 팔문장(八文章)이었다
사설 - 기봉과 옥봉, 둘 다 팔문장(八文章)이었다
  • 김선욱
  • 승인 2023.06.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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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문장(八文章)이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正史)에 정식으로 등장되기는 『선조실록』에서이다.

① …이순인은 젊었을 적에 이산해·최립·최경창·백광홍·윤탁연·송익필 및 이이(李珥)와 벗이 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고 일컬어졌다. (純仁少與李山海, 崔岦, 崔慶昌, 白光弘, 尹卓然, 宋翼弼及李珥爲友, 號八文章.)(『선조수정실록』18권/선조 17년 2월 1일 5번째 기사/1584년).

② …송익필은 처음에 시명(詩名)이 있어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었다.(翼弼初有詩名, 與李山海、崔慶昌、白光弘、崔岦、李純仁、尹卓然、河應臨等, 號八文章。)(『선조수정실록』23권』/선조 22년 12월 1일 11번째 기사/1589년).

①의 기사는 ‘사헌부가 이순인이 시세에 영합한다고 체직을 청하다’ 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순인을 소개하면서 팔문장을 거론하는데, 여기에 백광홍(白光弘)이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②의 기사는 ‘송익필 형제의 추문을 형조에 전교하다’는 제목의 기사로 송익필을 팔문장의 한사람으로 소개하면서 여기서도 팔문장 한 사람으로 백광홍이 나온다.

이처럼 조선조 정사(正史)에는 분명히 팔문장으로 백광홍을 칭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옥봉이 당대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거명된 근거는 어디 있는가.

최초로 옥봉을 팔문장으로 기록된 것은 『선조수정실록』 이후에 편찬된 『옥봉별집』에서이다.

“(옥봉)은 일찌기 큰 이름을 얻었고, 고죽 최경창(崔慶昌), 손곡 이달(李達), 구봉(龜峯) 송익필, 이산해(李山海), 최립(崔岦), 이순인(李純), 윤탁인(尹卓仁), 하응림(河應臨)과 함께 한때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이들을 사걸(四傑)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팔문장(八文章)이라고 말한다.(公早有大名。所與遊如楊蓬萊士彦,崔孤竹,蓀谷李達,宋龜峯翼弼,李山海,崔岦,李純仁,尹卓然,河應臨。皆一時英華。或稱以四傑。或謂之八文章。”((玉峯別集』/玉峯集後序 三下/附錄/墓碣銘幷序 烏川鄭澔撰 : 丈巖先生集』卷十七/墓碣/玉峯白公墓碣銘 幷序).

이 글은 정철의 현손으로 당대의 석학이며 영의정까지 역임한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쓴 『옥봉별집』의 옥봉의 묘갈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옥봉집』의 원집은 1608년에 간행되었으나 『옥봉별집』이 간행된 때는 1742년이었다. 그러므로 정호의 묘갈문 역시 『선조수정실록』 편찬으로부터 67년이 흐른 뒤에 써진 것이다. 이미 정사에서 기봉을 팔문장으로 기록했음에도 정호는 옥봉 묘갈문에서 옥봉을 팔문장으로 기록한 것이 된다.

당대의 대석학 송시열도 『구봉집』 묘갈문에서 백광훈을 팔문장으로 포함시켰다.(…李山海,崔慶昌,白光勳,崔岦,李純仁,尹卓然,河應臨也。時人號爲八文章(『宋子大全』/卷一/百七十二/墓碣/龜峯先生宋公墓碣). 이 밖에도 여러 시문집에서도 옥봉을 팔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고담일고(孤潭逸稿)』 행장‧잡저 동사팔문장(東史八文章), 『지호집(芝湖集)』의 최립 행장,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등).

실록에서 기봉을 팔문장으로 기록할 때, 사서(史書) 담당자는 기봉의 장시(長詩) ‘동지(冬至)(원본을 궁에서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를 비롯하여 기봉에 대한 약간의 시문이며 필사본인 ‘관서별곡’도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러나 기봉의 유고집이 편찬되지 않아, 그 누구도 기봉에 대한 정보며 시문을 확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필사본이었을 ‘관서별곡’도 세월 속에 점차 마손되거나 묻혀졌을 것이다. 정호나 송시열은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기봉에 대한 정보를 당대에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기봉에 대한 기억이며 그 문명이 잊혀져 있어 별수 없이, 기봉 대신으로 옥봉을 팔문장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 같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기봉이 아닌 옥봉을 팔문장으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한 상황이었는데도 왜 실록에서는 팔문장으로 백광훈 대신 백광홍을 포함시켰을까.

사실상 당대 백광홍은 대단한 시명(詩名)을 날린 문인이었다. 기봉은 28세 때 과거에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고, 153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子)에 제수되었다. 호당(湖堂) 시절, 영호남 문사들이 한 자리에서 시회(詩會)를 겨뤘을 때 장시 ‘동지(冬至賦)’ 한편으로 장원에 뽑히며 뛰어난 학문과 문예와 함께 그의 문명(文名)을 크게 드날리기 시작하였다.

당대 통칭 팔문장에 거론되던 문인들 대부분이 젊은 나이에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아 그리 부르게 된 것과 관련짓는다면, 이미 30세 전후에 영호남 문인들의 시회에서 당당히 장원하며 시명(詩名)을 드날린 기봉이야말로 당대 팔문장 이상 가는 윗길의 문인에 속하는 인물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서인의 경우, 보다 사실 확인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당시 사서인들은 팔문장 기록에서, ‘팔시인(八詩人)’이 아닌, ‘팔문장(八文章)’이라는 점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당시 ‘삼당(三唐) 시인’으로 불리어진 옥봉은 분명히 뛰어난 시인이었을 뿐이다.(그의 전 저작물이 거의 시(詩)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詩) 외의 문장에선 그리 크게 문명을 날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봉은 달랐다. 이미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등 단시(短詩) 뿐만 아니라 장시(長詩)인 ‘동지(冬至)’로 영호남 시회에서 장원을 차지할 만큼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필사본으로 전해지며 관서지방에서 크게 유행한 ‘관서별곡’이란 장편 가사를 쓴 기봉의 그 탁월한 문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실록의 사서인들은 바로 이점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즉 시와 문장에 뛰어나며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백광홍에 더 주목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연히 시인으로서 옥봉도 잘 알고 있었을 테지만, 시인에다 탁월한 문장까지 겸비함으로써 옥봉 이상의 문학적인 성취를 보였던 기봉에게 더 후한 평가를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백광홍을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정사에서는 선조대 팔문장으로 기봉 백광홍이 포함된 것으로 정리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팔문장 등재 이후에도 세간이나 시단(詩壇) 등에서 백광홍의 문명(文名)이 전혀 지속되지 못하고 역대 문인들 간에도 좀처럼 회자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불운하게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며 더 이상의 문학적인 성취를 드러낼 수 없었던 데다 더구나 그의 시문집이 그 사후 350여 년만인 1899년에야 간행, 그동안 3세기 이상을 거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조 대 연간’에 일각의 세간에서는 옥봉이 팔문장으로 불러졌다.

그러나 조선조 역사의 정사인 실록에서는 기봉을 팔문장으로 등재하였다. 이제 와서 누가 팔문장이었는가 따지는 일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옥봉은 비록 정사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당대 영의정까지 지낸 석학 정호(鄭澔)와 역시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대석학이었던 송시열(宋時烈)이 팔문장으로 인정했다. 이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옥봉 역시 팔문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역사에서는 둘 다 팔문장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사서(私書)여서, 또는 정사(正史)여서 하며 가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기봉·옥봉 형제가 다 팔문장이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그 형제가 당대 일군 문학적인 성취가 조선팔도를 울리며 크게, 널리 문명(文名)을 날리는 일이었고 이는 또 문학의 고장인 장흥의 명예와 자존을 드높이는 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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