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9)/옥봉과 예양강(5) - 용호정 앞의 예양강이 ‘용호’로 등장되다
기획 - 아, 예양강(9)/옥봉과 예양강(5) - 용호정 앞의 예양강이 ‘용호’로 등장되다
  • 김선욱
  • 승인 2023.06.2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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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인
▲부춘정

 

 

 

 

 

 

 

 

 

 

 

▲부춘정에 오르는 계단길

 

<지난 호에 이어>

오탄 심유와 ‘청영정’

문희개(1550~1610) 이후 50여 년부터 100백여 년 사이에 ‘청영정’이 장흥 출신의 시인 2인에 의해 다시 표현된다. 그 시인은 오탄 심유(梧灘 沈攸,1620~1688)와 장육재 문덕구(藏六齋 文德龜,1667~1718)였다.

오탄은 조선 후기 이조참의‧예조참의‧호조참의 등을 역임한 장흥 출신의 문신으로 유집 『오탄집』을 남겼다. 오탄은 이 유집에서 예양강의 홍수를 그린 ‘예양강 큰물 구경 觀漲-汭陽江大水’을 비롯하여 ‘예양강 배 띄우다 汭江泛舟’, ‘천관사 스님에게 드리다 贈天冠僧’ 등 많은 장흥 관련 시를 썼는데, 이 중 ‘청영정에 쓰다 題淸瑛亭’의 시가 나온다.

오탄의 ‘청영정에…’은 “골바람 소슬하여 작은 누각 서늘하니 溪風颯颯小樓淸 / 손으로 꽃가지 꺾으며 술잔 수 셈한다 手折花枝算酒觥 / 지하에서 닦는 글은 어둡고 아득하다 地下修文冥漠恨 / 아름다운 거문고 세 곡조는 애간장 끊는 소리다 / 瑤琴三弄斷腸聲” 이다.

오탄이 ‘청영정’을 시제로 하여 시를 썼다는 사실에서 당대도 여전히 청영정은 정자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육재와 ‘청영정’


오탄으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후에 장육재에 의하여 다시 ‘청영정’ 관련의 시 2수가 쓰여진다. 장육재는 남평인 문희개 후인으로 400여 수의 시편을 남겼던 장흥 출신의 문인이었다. 그는 유고집 『장육재유고(藏六齋遺稿)』에서 ‘청영정에서 취한 뒤 문천두와 운자를 부르다 淸暎亭醉後興文天斗氏呼韻’, ‘읍청전 옛터를 바라보며 望挹淸亭遺址’의 청영정 관련 시 2수를 남겼다.

장육재는 7세 때 조부인 문회우(文會友)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며 1696년(숙종 2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5년(숙종 3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장원하였다. 1707년에서 1709년 사이에 할머니, 아들, 부친상을 연거푸 당하였는데, 예를 다하여 3년 상을 치렀고, 그 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청안현감(淸安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장육재의 ‘청영정에서 취한 뒤…’는 다른 어느 정자라 해도 상관없을 보통의 정자에서 바라본 정경과 늙은 시인의 회한을 읊은 시다. 다만 시제에서 ‘청영정’ 운운은 당시까지만 해도 부춘리의 정자가 여전히 청영정으로도 불러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시에서 “… 의자 아래 장강은 저녁 하늘 담았다 榻下長江涵暮天”라고 읊으며 ‘장강(長江)’이란 시어를 썼는데, 청영정 앞의 강을 ‘용호’로 쓰지 않는 대신 ‘크고 긴 강’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시어로 보인다. 그런데 장육재 이후 부춘리 앞 예양강을 ‘장강’으로 표현한 시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희개 시대의 부춘리 앞 예양강이 ‘용호’로 쓰인 이후에 차츰 ‘장강(長江)’ 또는 ‘동강(桐江)’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짐작하게 해 준다. 특히 장육재 이후 ‘장강’은 여러 시편에서 간헐적으로 등장되고 있으며, 동강(桐江)의 경우는 청영정이 부춘정으로 바꿔지면서 거의 모든 시문에서 예외없이 등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영정…’시와 함께 쓰여진 시 ‘읍청전 옛터를 바라보며 望挹淸亭 遺址’에 나오는 ‘읍청전’은 바로 문희개 때 청영정 건너편에 있었던 그 정자를 말한다. 그런데 문희개 대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당시에는 읍청정이 이미 폐허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시 첫 구에 “퇴락한 옛터 동풍에 시든 풀 남아 衰草東風舊址穨”라는 시구가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읍청전…’ 시에서도 읍청정 앞에 흐르는 강은 ‘용호’가 아닌 ‘장강(長江)’으로 표현되고 있다.

장육재 이후 ‘청영정’은 다시 등장되고 있지 않아 청영정은 장육재 이후 어떤 형태로든 점차 역사 속으로 아주 사라져간 것으로 보인다.

장육재는 ‘무이구곡(朱子의 武夷九曲) 시내 뱃노래 시운에 차운, 예양구곡을 짓다 次晦庵武夷九曲溪櫂歌韻汭陽九曲’라는 시도 남겼다. 청영정의 시를 썼던 장육재마저 이 ‘…예양구곡’에서 부춘정을 제육곡(六曲)으로 선정하여 ‘제육곡 부춘정 第六曲富春亭’을 지었다. 이는 당시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청영정’으로 불러졌지만(‘청영정…’ 시제의 시를 썼으므로), 그 청영정 정자는 동시에 ‘부춘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졌고, 대외적으로는 부춘정이 더 많이 불러졌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장육재가 ‘제6곡 부춘정’ 시에서 용호(龍湖)의 시어를 표현하지 않았지만 ‘제8곡 용호 第八谷 龍湖’라는 시에서는 시제로서 용호(龍湖)를 사용하였는데, 그 용호는 문희개 대(代) 사용되던 그 ‘부춘리의 용호’가 아니고 부산면 ‘용반리 예양강’의 용호였다는 사실이다. 당초 부춘리의 용호는 부춘리 예양강의 용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용암은 ‘물속에 잠긴 용암’이었다. 그런데 장육재의 ‘제8곡 용호’에서는 “잠룡의 굴속” “깎아 세운 층암”이라는 시어로 표현된다. 즉 이 시 1,2구 표현에서 “…잠룡의 굴속은 열려 있으니 八谷潛龍窟宅開 / 깎아 세운 층암에 물돌아 흐른다 層巖削立水盤洄”라고 표현되었다. 이 시어가 말하는 곳은 바로 ‘깎아 세운 듯한 층층 바위 아래의 강물 속 굴이 용굴이다’고 설명되는 부산면 용반리 북쪽 예양강 용소(龍沼)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강 밑에 있다는 이 용소, 용연(龍涎) 등과 관련해서, 그 용소 위에 있는 바위를 용바위, 용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용박 등으로 불러왔으며 옛부터 이곳 용굴이 있는 용소에서 가뭄이 심해지면 기우제를 지냈던 사실도 있다. (기우제 때 개를 잡아 그 피로 용바위에 묻히면 그날밤에 비가 내려 바위에 묻힌 개위 피를 씻어냈다고 한다-(『부산면지』 633쪽).

그러므로 ‘제8곡 용호’에서 시제로 표현한 용호는 바로 이 용반리 북쪽 예양강의 용소를 지칭하였고 이 용소로 인한 용호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장육재 당대에는 이미 부춘리의 용호는 점점 사라져가면서 이곳 용반리의 용소가 부춘리의 용호 대신으로 불러지게 되었고, 장육재도 이 ‘…예양구곡’에서 그 용호를 용반리 예양강의 용호로 시화(詩化)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장육재의 용호의 표현은, 그 용호로 불리는 용반리 용소 위에 용호정(龍湖亭)이 세워지기 100여 년 전이었다. 이는 장육재 당대나 그 이전부터 부춘리 예양강에 잠긴 바위를 용암으로 불렀고 동시에 부춘리로부터 1.5킬로미터 남짓 상류 쪽의 용반리 예양강에도 용소로 불리는 지명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부춘리 예양강이 최초로 옥봉에 의해 용호로, 용강으로 불려졌을 때도 용반리 예양강은 용소가 있었지만 굳이 용호로까지는 불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옥봉의 그 용호라는 표현이 어떤 형태로든 장육재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유추하여 볼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물에 잠긴 용암이 있었다는 부춘리 예양강의 설화에 비하면. 용반리 용소는 보다 설득적이었을 것이라는 점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마을의 지형 자체가 용이 서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불렀다는 용반리(龍盤里) 지명의 유래설에 더해, 마을 북쪽에 자리한 용두산(龍頭山), 용반리 동쪽 마을의 용동(龍東) 마을, 용반리 서쪽 마을의 용서(龍西) 마을 그리고 용소(龍沼)까지 있는 등 용반리 마을 일대가 용과 관련된 설화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과 관련이 많은 그 용반리에 그 마을 상류 예양강의 용소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마을을 흐르는 강을 용호로 부르기는 더 설득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 등에 착안도 하였고 부춘리 용암바위 강을 용호로 불렀던 옥봉의 시까지 연관지었다면, 장육재 시인에게 용반리 용소를 용호로 부르기는 더욱 부담이 없었을 것이고 그러한 연유로 장육재는 용반리 용소를 아예 용호로 부르며 ‘제8곡 용호 第八谷 龍湖’를 작시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용반리의 예양강을 용호로 부르는 이는 장육재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 용호로 불리는 용반리 예양강변의 정자도 이러한 영향으로 ‘용호(龍湖)’라는 이름을 붙인 ‘용호정(龍湖亭)’으로 건립되지 않았을까 추정이 된다.

문희개 200여 년 후 ‘용호정’ 건립

문희개 사후 218년이 지난 1828년, 장육재에 의하여 용호로 불러져왔던 부산면 용반리 예양강 그 용소가 있는 10여 미터 벼랑바위 즉 용바위 부근에 최규문(崔奎文,1794~1854)이 정자를 세우니, 그 정자가 용호정(龍湖亭)이었다.

용호정이 건립 된 후 이곳을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쓴 용호정과 관련된 시문에서 이 ‘용호’가 다시 등장되기에 이른다.

오남 김한섭(吾南 金韓燮, 1838~1849)은 1888년 기록한 ‘용호정기 龍湖亭’ 찬시에서 “바위깎아 공중 아래는 용궁인데 削石抽空下水宮 / 우뚝한 정자가 강물 한가운데 떠 있네 一亭浮開雲返照紅”라고 읊으며 용호정을 용소(용궁)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묘사했으며, 호산 위하조(壺山 魏河祚,1809~1881)는 “산을 등진 용호정이 용궁 위에 있으니 背山亭樹壓波宮 / 이곳은 인간세상 중에 별천지로다 除是塵間別界中”라고 읊었다.

용반리 용소 위에 용호정을 세웠던 최규문(崔奎文)은 시 ‘용호정 팔경 龍湖亭八景’의 ‘모래밭에 내리는 기러기 沙中落雁’ 시 첫 구에서 “용호의 소식은 기러기가 먼저 아니 龍湖消息雁先知 / 아황 여영은 소상강 물가로부터 왔네 來自瀟湘帝女湄” 하며 용호정의 강을 용호로 표현하였다.

또 모암재 위계철(帽巖齋 魏啓哲,1840∼1913)도 ‘부산면 용호정 시에 차운하다 夫山面龍湖亭韻’에서 “…이 용호에 함께 즐길 자리 있으니 有是龍湖同樂席 / 한쪽은 소년이고 한족은 늙은이라네 一邊年少一邊翁”라고 읊었다.

1946년 최동민(崔동東珉,1878~?)도 ‘용호정중건상량문 龍湖亭上樑文’에서 “용강이 도도히 흐르니 선인들의 덕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龍江滔滔不斬先人之德 / 기산(犭其山)이 우뚝 솟아 있으니 현명한 후손들이 장차 응하여 나타날 것이네 犭其山矗矗將應來之賢”라고 언급, 용호정 앞 예양강이 용강(龍江)임을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장육재 이후부터 용호정 건립을 전후로 예양강과 관련하여 다시 등장하는 용호며 용강은 바로 용반리 예양강의 용호를 지칭하는 시어로 고착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1838년 부춘정도 건립 … ‘동강(桐江)’ 등장

용호정 건립 10년 후인 1838년, 쇠락해가던 청영정 자리에 동강 김기성(桐江 金基成,1801~1869)이 청영정을 개보수하여 새로운 정자를 건립하니 바로 부춘정(富春亭)이었다.

김기성이 창건한 부춘정 관련 내용으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부춘사창건지 富春祠創建識’ 첫 구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관산(장흥부 : 조선조에 장흥부를 이명異名인 관산부로 부르기도 했다) 치소 북쪽에 있는 부

춘 마을은 옛날 문씨가 살았던 곳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은 그 이름이 용호(龍湖)라고 한

다. 이 강은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흘러오다가 이곳에(부춘리)에 이르러 큰 호수를 이

루고, 사자산에서부터 뻗어온 산줄기는 꿈틀꿈틀 서쪽으로 뻗어오다가 이곳 용호담에 이르러

멈추게 된다 冠山府治之北 富春洞 古文氏之攸居也 當門之水 其名曰 龍湖 而發源於迦智 縈廻

南注 至此成潭 山之自獅岳來者 蜿蟺西涵迤 臨潭以止 …”

‘부춘사 창건지’는 건립된 지 6년 후인 1844년 김기헌(金基憲,1790~1855)이 지은 글이다. 여

기서 중요한 부문이 옛날 부춘리 앞으로 흐르는 강을 ‘용호’로 불렀으며 이곳 부춘리가 사자

산맥(제암산 : 예전에는 제암산을 사자산으로 불렀다)이 이곳까지 뻗어 와 여기서 낙맥을 이루

었다고 기재하였다는 점이다.

‘부춘사 창건지’에는, 또 1837년 문씨 집안의 형편으로 부춘사(富春祠)를 보존하기 어려워 이를 구입하여 문평공(文平公, 金吉通)의 사당과 학문하는 장소로 하고 싶다고 기형(基衡)이 말한 후, 이 내용이 1838년 종친회의를 거쳐 이곳(부춘사 터)에 사당과 정자를 새롭게 지은 것으로 나온다. 또 개축, 건립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정전(正殿), 제실(祭室) 등 건물 3동과 정자 등의 지붕을 교체하거나 수리하고 제기 창고와 사당으로 가는 문과 담장을 신축하고, 정자 등은 목재를 다듬고 지붕은 새 기와로 교체하는 등 개축 위주로 부춘사를 완공하였으며, 원래의 지명에 근거하여 부춘사(富春祠)라는 편액을 내걸었다는 개축 내력도 나온다.(『문림의 향기1』, 부춘정 편).

이렇게 하여 예전 청영전의 터 위에 부춘사(富春祠)라는 사당과 함께 부춘정(富春亭)이 새롭게 단장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청영정에서 새롭게 재탄생한 부춘정 관련의 시문에서 이전 청영정과 함께 쓰였던 ‘용호’ 대신 ‘장강(長江)’이나 ‘동강(桐江)’의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부춘정을 건립했던 김기성은 ‘부춘정 원운 富春亭原韻’에서 “정자를 세운 것이 벌써 사십 년이 지났는데 年己四旬得此亭 /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이 지금도 새로워라 眼前物物各新形 / 바위에 서린 늙은 용이 때맞춰 비 내리니 龍盤老石行時雨 / 고기 뛰는 장강에 별이 반짝인다 魚躍長江動夜星…”라고 읊으며 예전 청영정 때부터 있었던 용암을 시어로 끌어오면서도 부춘정의 예양강을 용호 대신 ‘장강(長江)’으로 표현하였다.

부춘정에는 ‘부춘정창건지’ 등을 비롯하여 ‘부춘정기(富春亭記)’ ‘부춘정후기(富春亭後記)’ 등 부춘정 역사와 내력 등을 알 수 있는 내용의 편액을 비롯하여 부춘정에 관한 시를 담은 편액 시 30여 점이 걸려 있는데, 이들 시문에서 거의 예외없이 엄자릉(嚴子陵),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 등의 표현과 이와 관련된 시구(詩句)들이 표현 되어 있다. 이들 부춘정의 편액 시 뿐만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부춘정 관련 시에서 엄자릉과 동강 등을 사용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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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탄 심유의 가문은 당시 장흥에 거주했으나 후에 한양으로 이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2) 長寧詩文, 김규정 역해 참조.

3) 김규정, 長寧詩文, 삼보아트, 2016, 513-514.

4) 이하곤(李夏坤,16771724)두타초남유록南遊錄()’에 장육재 문덕구 기사가 나온다. “23: 아침밥을 먹고 보림사로 향했다. 정몽열(鄭夢說)과 조만우(趙萬瑀)가 따랐다. 대암령에서 오리를 지나 유치촌(有恥村)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문덕규(文德龜)가 사는 마을이다. 덕구와 그의 아우 덕린(德麟 : 1673-1739, 자는 성휴聖休. 1708-숙종 34-유학(幼學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보령현감, 영암군수를 지냈다.)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早飰發行向寶林寺鄭夢說趙萬瑀從焉過大巖領五里至有恥村文德龜所居也德龜與其弟德麟俱登文科官至郡守)” -頭陀草冊十八/雜著/南遊錄二.

5)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용은 운행우시(雲行雨施), 즉 마음대로 비를 오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있는 조화능력을 지닌 수신으로 신앙되었고, 이런 이유로 용은 가뭄 때 기우(祈雨)의 중요한 대상인 신이 되어주었다.

6) 아황 여영(娥皇, 女英) : 두 사람 모두 요임금의 딸로서 순()의 아내가 되었다. 기원전 2205년에 순임금이 죽자 아황과 여영은 상강(湘江)을 헤매며 슬피 울다가 그 둘이 상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후세에는 이 둘을 아울러서 종종 상비(湘妃) 또는 상군(湘君)이라고 불렀다.

7) 소상강(瀟湘江) : 중국 동정호 남쪽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강(湘江 혹은 湘水)을 함께 부르는 말.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8) 김기홍김대현김은수김준옥, 문림의 향기1, 장흥문화원, 2016, 98.

9) 김길통(金吉通) : 1408~1473.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이다. 아버지는 증 좌찬성 효례(孝禮)이다. 1429(세종11)에 생원이 되고, 1432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460년에 대사헌을 지낸 후 황해도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성종(成宗) 때 호조 판서를 지내고 월천군(月川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평(文平)이고, 월천집(月川集)이 있다. 특히 문평공 장흥부 순찰 때 청화루에서 짓다 文平公巡察時題本府淸和樓韻’, ‘동헌에 쓰다 題東軒의 시 2수의 편액이 부춘정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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