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호 사설 - 백광훈, ‘아름다운 장흥과 동행’, 장흥 시 60여 수 남겼다
제192호 사설 - 백광훈, ‘아름다운 장흥과 동행’, 장흥 시 60여 수 남겼다
  • 김선욱
  • 승인 2023.06.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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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 백광훈은 오언절구 116편 137수, 칠언절구 199편 231수, 오언율시 72편 79수, 칠언율시 34편 37수, 오언고시 16수, 칠언고시 14수로 총 451편 514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이 중 장흥과 관련된 시는 무려 60여 수 이상이다. 이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동계마을 시 4수, 예양강 시 8수, 장흥사람 시 15수, 보림사 시 14수 등 41수에 이른다. 여기에 용호·청영정 시 20여 수를 포함하면 옥봉의 장흥 시는 모두 61수에 이른다.

다음은 용호·청영정 시를 제외한 옥봉의 분류별 장흥 시들이다.

■동계마을 – 4수 : ①동계에서 작별해 보내면서 지어서 주다 東溪贈別 ②동계에서 죽곡의 시 운을 따라 짓다 東溪次竹谷韻 ③동계에서 주인 형께 바치다 東溪呈主兄 ④동계에서 종가 형님의 시 운을 따라 짓다 東溪次主兄韻-名光城

■ 예양강 시 – 8수 : 예양동교 汭陽東橋 ②예양강 길에서 취한 뒤에 짓다 汭上路醉後 ③취중인 채 예양강을 가면서 自汭陽醉行 ④예양강 위에서 취한 유정보와 작별하면서 汭上醉別柳靜甫-名潑 ⑤예양강에서 거문고 타는 스님에게 주다 汭陽贈琴僧 ⑥봉명정 밑에서 차운하다 鳳鳴亭下次韻 ⑦예양강에서 작별하면서 汭江別 ⑧죽강정에서 竹江亭.

■장흥사람 시 –13편 15수 : ① 문순거(문희개)에게 부치다 寄文舜擧 ②위이율에게 주다 贈魏而栗) ③문숙장(문위세)에게 주다(2수) 寄文叔章 ④회진에서 임감역 황에게 주다 會津贈監役滉 ⑤연하동 유상사(유호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煙霞洞訪劉上舍 不遇 ⑥위씨 아저씨 댁에서 형님의 운을 따라 짓다 魏叔宅 次伯氏韻 ⑦ 위사임의 집을 제재로 삼아 지어 부치다 魏士任家 ⑧문순거가 찾아와서 文順擧來訪 ⑨문숙장에게 화답하며 和文叔章 ⑩보림사에서 서 상사의 운을 따라 짓다(2수)(예전에 형님과 함께 여기서 책을 읽으며 공부하였다) 寶林寺 次徐上舍(舊與伯氏 讀書于此) ⑪월계 조명부(조희문 장흥부사)에게 사례하며 謝月溪趙明府-名希文 ⑫조명부(월계)의 달구경 시에 화답하며 和趙明府翫月之韻 ⑬장흥 땅에서 텃밭을 사는데 땅 주인이 밭 값의 도움을 주어 고맙게 여기다 長興地買基田 得地主助田價

■보림사 - 13편 14수 : ①보림사를 찾아가면서 過寶林寺 ②보림사에서 작별하며 지어주다 寶林寺贈別 ③보림사로부터 서계로 내려가면서 自寶林下西溪 ④보림사에서 寶林寺 ⑤보림사에서 寶林寺(시제는 동일, 내용은 다름) ⑥보림사에서 연 스님에게 주다(2수) 寶林寺贈衍上人 ⑦보림사 물가 전각에서 유심보의 운을 따라 짓다 寶林寺水閣 次柳深 ⑧보림사를 출발하며 出寶林寺 ⑨사준 스님에게 주다 贈思峻上人 ⑩사준 스님에게 주다 贈思峻上人(시제는 동일, 내용은 다름) ⑪사준 스님에게 사양하며 부치다 寄思峻 ⑫사준이 서관(평양)에서 돌아와서 思峻歸自西關 ⑬사준 스님이 천관산 스님 시축을 가지고 와 시를 지어달라고 해서 思峻 持天冠山僧詩軸 來求詩.

조선조 역대 시인 중 장흥 소재‧주제 시로 이만한 분량의 시를 쓴 시인은 옥봉이 최초였다. 그렇다면, 옥봉이 이렇게 많은 장흥시를 쓸 수 있었던 그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과 배경을 알기 위해 영암에서의 옥봉의 삶을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당대 옥봉은 장흥 출신임에도 사는 곳은 영암이었다. 옥봉 이후 그 자손들도 계속 영암에서 세거하였고, 오늘날에는 옥봉과 그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해남군에 영속되면서 오늘날은 옥봉이 해남에서 역대 가장 빛난 인물로 존중 받고 인물이 되었다.

옥봉이 당시 살았던 집이며 마을 주변에 대한 시를 제외하면, 당대 영암이나 이웃고을인 해남과 관련된 시는 각각 10여 수도 안 된다. 영암에서 장흥을 오가는 중간 지점이 강진과 관련된 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장흥 관련 시가 이렇게 많았을까.

옥봉은 어린 나이던 5세 때 고향을 떠나 영암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영암, 해남 등지에서 유학하며 공부할 때 경제적 궁핍 등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학비나 식비 등은 고향집에서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홀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하고 가장으로 생계도 책임져야 했던 성인이 된 이후는 사정이 예전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난한 시인의 길을 운명으로 생각했었는지, 과거시험(진사시험)에도 합격하였음에도 관리로서 길을 포기하였던 옥봉이었다. 이래저래 생활고며 생계유지 자체가 큰 위험 요인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실로 객지에서의 참담하기만 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정신적 지주이자 옥봉의 스승이었던 장형 기봉이 종명 한 것은 옥봉의 나이 20세 때였다. 외곽으로 돌다 평안도 한직으로 밀려나고, 기어이 관서의 추위와 외로움, 그 풍 토의 부적응 등으로 병을 얻었고, 그 병든 몸을 이끌고 낙 향하였지만 끝내 종명하고 말았다. 옥봉의 절망감이 어떠 했을까. 결국 그 치명적인 상처가 옥봉으로 하여금 진사 에 급제했음에도 과거를 포기하고 관료생활을 할 수 없게 했으며, 야인으로 끝없이 자기를 학대하면서 전국을 떠돌 며 시를 쓰게 했을 주요 동인(動因)이었을 것이다.)

옥봉은 26세 때 아들 형남(亨南)을 낳고, 이어 28세 때 진사에 합격하고 둘째 아들 진남(振男)을 낳았지만 이해에 진사합격을 끝으로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시작(詩作)에만 전념하게 된다. 28세의 한창 나이 때였다. 그런데 당대 출세와 성공의 길인 관리로서 길을 과감히 포기하고 ‘전업시인’의 길 곧 ‘시업(詩業)과 동행’을 선택한 것이다. 슬하에 2남을 가진 가장이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옥봉은 더욱 치열하게 모진 현실과 모진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옥봉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준 기록이 31세 때의 연보에 나온다. “옥봉이 거처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친가와 거리가 80리다.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비록 세를 빌려 말을 타고 매달마다 고향집 부모님을 알현하였다. 노비를 시켜 문안도 하였다. 한 달에 세 차례 방문, 알현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해마다 이와 같았다. 비록 삯을 주고 종을 빌리더라도(노비를 시켜 문안을 드리는 일) 단 한 번의 착오도 없었다. 부모와 떠나 멀리에 떨어져 있어 추위에 떨고 배 주리고 있다. …”(『옥봉집』 연보, 31세)

위의 31세 때 옥봉의 행력 중, 중요한 부문은 두 가지다. 즉 “부모를 떠나 멀리에 떨어져 있어 추위에 떨고 배 주리고 있다”는 궁핍한 생활상과 “한 달에 세 차례 방문하여 알현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해마다 이와 같았다”라는, 그처럼 궁핍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한 달에 3번, 즉 열흘마다 한번 씩은 고향을 방문, 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것은 30세 전후의 옥봉이 맞이하였던 가혹한 현실이었다. 두 아들의 가장이었다. 그런데도 뚜렷한 벌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자존은 ‘가난한 처사 시인, 야인 시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게다가 고향을 한 달에 3번은 찾아가는 일도 겹쳐 있었다. 그런데도 옥봉은 이 가혹한 현실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 달에 3번을 고향 장흥을 찾아가는 일은 그의 삶에 또 하나의 동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옥봉은 시업(詩業)과의 동행에 이어, 장흥과의 동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리하였겠지만(한 달에 최소한 2,3회 정도는 고향 방문하는 일), 이 일을 연보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매달 3회 고향 방문을 지속하겠다는 굳은 다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열흘마다 고향 방문하는 일을 제 삶의 순리처럼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었기에 60수의 장흥 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흥과의 동행, 그것은 옥봉에게는 필 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옥봉은 그 운명을 긍정적으로 즐거이 수용하였기에 장흥은 옥봉의 시문학에서 중요한 산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옥봉의 아름다운 장흥과의 동행’으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동행이었기에 장흥의 예양강을 ‘용호’로 헌사하고, 그토록 아름다운 장흥의 시들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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