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10)/옥봉과 예양강(6) - 옥봉의 ‘용호’ … 예양강 전 수역이 ‘용호’로 불리었다
■기획 - 아, 예양강(10)/옥봉과 예양강(6) - 옥봉의 ‘용호’ … 예양강 전 수역이 ‘용호’로 불리었다
  • 김선욱
  • 승인 2023.06.28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옥봉 초상화
옥봉서실

 

 

 

 

 

 

 

 

 

 

 

<지난호에 이어>

조선 후기 황실제도국총재, 흥사단 단장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유명했던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1835-1922)의 부춘정 관련의 시문을 보자.

이 시는 ‘부춘정의 원운을 차운하다 次富春亭原韻’로, 당대 부춘정 내력을 잘 알 수 있는 시문이다.

‘부춘정의 원운을 차운하다 次富春亭原韻’-문평공 김길통金吉通은 우리 집안과 관향이 같다. 일찍이 호남 안절按節을 지냈는데, 부部를 순시하다 장흥에 이르렀을 때 부춘정 아래에 머물러 감상하며 노닐었다. 그 자손이 그로 인해 그곳에 머물러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낸다. 次富春亭原韻 : 文平公 金吉通與吾家同貫。嘗按節湖南,巡部時歷到長興,留連賞翫於富春亭下。其子孫因留爲家,立祠以祀之.

비단같이 맑은 강에 정자 하나 솟으니 / 澄江如練聳孤亭

사람도 갈매기도 함께 형체를 잊었네 / 人與沙鷗共忘形

마당가엔 지금도 소백(召伯)의 나무 있고 / 庭畔至今召伯樹

산중엔 지난날 엄릉의 별 있었네 / 山中昔日嚴陵星

낚시에서 돌아온 작은 배에 안개가 막 엉기고 / 釣歸小艇煙初合

피리 소리 끊긴 긴 강섬에선 문득 술이 깨네 / 笛斷長洲酒忽醒

【부춘팔경富春八景에 ‘능파조대凌波釣臺’와 ‘연주목적煙洲牧笛’이 있다. / 富春八景,有凌波釣臺、烟洲牧笛。】

우연히 타향에서 화수회를 가지니 / 偶得殊鄕花樹會

못가의 봄풀이 혼령을 꿈 꾸는구나 / 池塘春草夢魂靈

-ⓒ운양집 제1권/시/昇平館集/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기태완 (역) /2013

*소백(召伯)의 나무 : 소백은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 주공(周公)과 함께 삼공(三公)이었던 소공석(召公奭)을 말한다. 그는 덕치를 베풀었는데, 순행할 때 팥배〔甘棠〕나무 아래서 쉬었더니 백성들이 그 덕을 기리는 감당 노래를 지어 불렀다. 《시경》 〈감당(甘棠)〉이 그것이다.

*엄릉(嚴陵)의 별 : 엄릉(嚴陵)은 후한(後漢) 때의 엄광(嚴光)을 말한다.

*화수회(花樹會) : 같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친목을 위해 이루는 모임이다.

용호는 용호정의 용호로

청영정 용호는 장강(長江)·동강(桐江)으로

장흥 출신의 많은 시인들도 부춘정 시문에서 엄자릉과 동강 등을 사용하였다.

이상행(李相行, 1789~1880)은 시 ‘차운하다 次韻’의 첫 구절에서부터 “지금 이 정자는 옛 한나라 산 이름(부춘산) 古漢山名今此 / 깨끗한 풍도는 또렷한 엄자릉의 형상이다 淸風 轉子陵形”라고 읊으며 부춘정 내력의 뿌리가 엄자릉에 있음을 표현하였다.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1836~1905)도 ‘부춘정 富春亭’에서 ”청풍김씨의 부춘정 있어 淸風金氏富春亭 / 하나의 띠 동강을 에워싸 푸르다 … 一帶桐江碧繞庭”고 읊었다.

화동 김한익(華東 金漢翼,1863~1944)도 ‘부춘정 주인을 방문하다 訪富春亭主人’에서 “ …동강 위 안개 연기의 달 桐江上煙霞月 / 칠리탄 변을 은은히 비춘다 隱映如七里汀”라고 읊었으며, ‘부춘정 차운하다 富春亭 次韻’에서는 “동강 물결 젖은 술에 취해 깨기 어렵다 桐波釀與醉難醒 / …상상한 엄자릉 혼령 있을 것 같다 想像嚴陵若有靈”고 읊었다.

자소헌 이삼정(自笑軒 李三徵,1789~1864)은 유고집으로 『한방집(閑放集)』 등 3권을 남긴 장흥 출신의 문인이었는데, 한 유시(遺詩)에서 “산 아래 새로운 사우 장강의 정자다 山下新祠水上亭 / 동강 칠리탄의 경물은 바른 형상 꾸민다 桐江景物完直形 …”라고 읊으며 동강 옆에 새로 지은 부춘정이 바로 ‘장강의 정자’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어초은 김상미(漁樵隱 金尙美,1795∼1854)도 ‘부춘 팔경’ 중 ‘동강의 고기잡이 등불 桐江漁火’이라는 시에서 아예 ‘동강’을 시제로 선정하고 시에서도 “엄광의 뜻이 울리니 고금이 같다 一絲風動古今同 / 어스름 저녁 칠리탄 물소리 난다 一絲風動古今同 七里灘聲薄暮中 / …주인 오니 밤 등불로 부춘정 높구나 人歸夜火富春亭”라고 읊었다.

또 ‘능파의 낚시터 凌波釣臺’에서는 “맑은 풍도(엄자릉) 칠리탄(七里一絲)에 낚시대 담그니 淸風七里一絲裁 /… 엄자릉(子陵) 가고 난 후 주인 어른 왔네 子陵去後主人來”라고 읊었고, ‘평평한 칠리의 여울 七里平灘’에서도 “늙은 주인이 전한 송덕은 엄자릉 명성이라 主翁傳松子陵名”고 읊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춘정 개축 이후부터 용호는 용호정의 예양강을 대변하는 시어로, 동강(桐江)과 장강(長江)은 부춘정의 예양강을 대변하는 시어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그렇다고 하여도, 청영정 때의 그 ‘용호’의 명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옥봉과 문희개부터 3,4백 년이 지난 후인 1800년대 이후에도,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2인에 의하여 부춘리의 용호가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김상미의 ‘부춘 팔경 富春八景’의 시와 만회 위국채(晩晦 魏國采,1846~1921)의 시에서였다.

이미 부춘정으로 정명화된 이후 ‘부춘정 팔경’을 쓴 이 시에서도 김상미는 당시 ‘부춘(富春)’이 의미하는 동강, 칠리탄, 엄자릉 등의 시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팔경의 시 중 한 시에서만큼은 옛 ‘청영정의 용호’를 다시 소환한 것이다. 김상미를 전후하여 거의 모든 장흥의 시문에서 용호는 이미 용호정의 용호를 의미할 때였으니, 김상미가 굳이 ‘부춘 팔경’이라고 시제를 붙이지 않았다면, 이 시에서의 용호는 문희개 시대의 청영정의 용호가 아닌 ‘용호정의 용호’를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제가 ‘부춘 팔경’이었다. 그러므로 김상미도 이 부춘정의 팔경으로 소개한 여러 시문에서 당시의 부춘정을 의미하는 동강 등을 시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 ‘사자산의 갠 달 獅子霽月’에서만큼은 “사자산 일맥은 용호에 닿았으니…”라고 표현, 청영정 때의 용호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아마 ‘부춘사 창건지’ 첫 문장에 소개된 “ … 이 강(용호)은 가지산에서 발원하였고 …사자산에서 뻗어 온 산줄기는 꿈틀꿈틀 서쪽으로 뻗어오다가 이 용담호에 이르러 멈추게 된다”는 내용을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시를 보자.

부춘팔경 富春八景 : ‘사자산의 갠 달 獅子霽月’

사자산 일맥은 용호에 닿았으니 / 獅岺一脉接龍湖”

개인 달 물 여신(凌波) 그림에 비치네 / 霽月凌波畵圖

시와 술로 강의 정자에서 고기 낚는 흥취 詩酒江亭漁釣臺興

산은 달그림자를 삼켜 주객이 즐겁다 /

*능파(凌波) : 능파선자라는 달의 여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김상미는 부춘 팔경의 모든 시제에서 부춘정을 의미하는 엄자릉 등의 시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시에서만큼은 옛날 청영정 때 용호로 불리었음을 상기하였는지, ‘부춘 팔경’의 다른 시에서 쓰인 동강(桐江) 등이 표현이 아닌 문희개 때의 그 ‘용호’의 시어를 사용한 것이다.

지형적으로 보자. 장흥군 유치면 삼계봉(505.7m)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호남정맥은 가지산(509.9m)―피재―병무산(513.7m)까지 남하하다가 남동진하여 금장재―용두산(549.1m)―만년고개―갑낭재(시목치)까지 이르러 여기서 다시 남진하여 작은산(685m)―제암산(807m)―곰재-사자산(667.5m)까지 뻗어 내린다. 그리고 제암산에서 서쪽으로 분기된 산줄기 하나가 장흥읍 금산리 뒷산 매봉(422.5m)을 거치고 장흥읍 행원리 뒷산이며 부산면 부춘리 앞산까지 이어지다가 예양강 유역에서 절맥된다. 다시 말하면 제암산(옛날에는 사자산으로 불리었다)에서 빚어진 산맥 하나가 부춘리 앞까지 이르렀다가 예양강을 만나며 절맥되고 있는데, 이러한 지형적인 의미를 김상미의 ‘사자산의 갠 달’에서도 “사자산 일맥은 용호에 닿았으니”라고 표현하고 이어, 절맥된 사자산맥과 만나고 있는 부춘리 앞 예양강이 용호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로써 김상미는 이 시에서 당시까지도 일부 시인에게는 여전히 옛날의 청영정과 용호로 불리운 그 시어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동리에 경호정(鏡湖亭) 건립

청영정의 용호(龍湖), 공용으로 공유

부산면 기동리는 부춘리의 바로 윗마을이다, 지금 부춘리 마을회관과 기동리 마을회관과는 직선거리는 고작 800m 거리다.

그리고 기동리 앞을 지나서 부춘리 옆으로 흐르는 예양강은 칼로도 나뉠 수 없는 한줄기의 강일뿐이다. 부춘리 예양강변에 부춘정이 있다면, 기동리 예양강변에는 경호정(鏡湖亭)이 있었다.

경호정은 행은 위계훈(杏隱 魏啓勳,1866~1942)이 1912년에 지은 누정이다. 그런데 경호정 앞으로 흐르는 예양강도 기동리 아랫마을인 부춘리를 흐르는 그 강줄기다. 부춘리 앞 예양강에 용암이 있어 용호로 불렀다면, 거기서 고작 1000m 상류 쯤의 기동리 앞마당을 관류하며 흐르는 그 경호정의 예양강도 용호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1912년 만회 위국채(晩悔 魏國采,1846∼1921)가 쓴 ‘경호정상량문 鏡湖亭上梁文’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만회는 ‘경호정 상량문’ 중 경호정을 예찬하는 시(讚詩)에서 “ …물은 경호(鏡湖亭)에 가득하고 달도 못(강 속)에 가득하다 水滿鏡湖月滿潭 / 띠처럼 이어진 동강(桐江)은 칠리탄 여울인데 一帶桐江灘七里 / 부춘산의 색깔은 쪽보다 푸르다 富春山色碧於藍 / …개바위(갯가바위)와 용호가 한 지역에 펼쳐있다 …犭其岳龍湖開一城”면서 이 경호정 창건도 부춘리의 부춘(富春, 엄자릉嚴子陵)의 뜻을 담고 있다는 데서 칠리탄, 동강(桐江) 등의 시어를 사용하였지만, 그 경호정 앞 예양강은 부춘정의 예전 청영정 때 불렷던 그 용호(龍湖)를 가져와 용호로서 의미화 하였다.

만회는 또 상량문의 결구에서 “ …용호는 넘실넘실 초석을 들러 싸고 흘러갈 것이요, 응령(應領 : 매바위 고개. 심천리 북쪽의 매처럼 생긴 고개)은 높고 높아 대들보를 눌러도 부러지지 않으리라 … 龍湖滾滾抱方礎而長流 鷹嶺峨峨鎭隆棟而不挑”라 기원하고 ‘경호정 앞을 흐르는 예양강의 용호는 오래도록 넘실넘실 흘러갈 것이다’고 축원하였다.

만회 때는 이미 부산면 용반리 영호정이 건립된 후이고 많은 시인들이 영호정의 용호를 찬미할 할 때여서, 이 용호도 용호정의 용호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기 상량문에서는 동강, 칠리탄의 시어가 나오고 용호가 한 지역(부춘리와 기동리)에 펼쳐져 흐른다고 명기한 터여서, 여기서의 용호는 예전 문희개 시대의 부춘리 용호를 가르킨 것이다.

만회는 또 시 ‘경호정 10경을 무이구곡가에 차운하다 鏡湖亭十境次武夷九曲韻’도 썼다, 만회는 이 ‘경호정 10경…’에서 경호정의 10경을 노래하였다. 이중 6번째로 노래한 ‘용호의 청아한 여울 龍湖鳴灘’도 있다. 만회는 ‘용호의 청아한 여울’에서 ‘경호정 상량문’에 이어 다시 한 번 ‘부춘리-기동리’의 앞 예양강을 용호로 부르며 그 강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시를 보자(제2경, 제6경 등 ‘제0경’은 편의상 필자가 부기한 것이다).

(제2경) ‘맑은 바람 부는 동강 桐江淸風

칠리탄 강 머리에 한 척의 낚시배 / 七里灘頭一釣船

맑은 바람 소리 싣고 와서 한천으로 보내네 / 載來淸送籍寒川

선생(엄뢰)께서 가신 뒤 높은 행적 남아서 / 先生去後遺高躍

빈 물가로 불러와 저녁 연기 거두었네 /噓入空汀敏夕炳

(제6경) ‘용호의 청아한 여울 龍湖鳴灘’

맑고 얕은 물보라 이는 세석탄(七里灘)에 / 淸沒路波細石灘

놀라 날아갔던 백로 다시 와 보는구나 / 驚飛白鷺復來看

틀림없이 이곳엔 강신(江神=龍神)이 있는 줄 알렸다 / 應知此處江神在

비 내리는 소리 더해 밤기운이 차갑구나 / 讓雨鳴聲夜動寒

시 제2경, ‘… 동강’은 부춘리 앞을 흐르는 칠리탄의 의미를 경호정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칠리탄 강 머리…”로 표현하였고, 제6경의 ‘용호의…’ 시에서는 아예 시제를 부춘리 강을 용호로 부르는 그 의미를 경호정도 함께 공유한다는 전제로 ‘용호’를 시제로 선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문희개 시대의 부춘리 예양강의 용호는 당대 이후로 곧 잊혀진 강의 이름이었을 테지만, 후대의 시인들 특히 김상미와 위국채 등의 시인은 여전히 예양강의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고 그 용호를 자기들 시에 차용하였던 것이다.

확장된 예양강 시어로 ‘용호(龍湖)’ 등장

부춘리의 용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용반리 예양강이 용호로 불리어지고 있던 때였다. 1912년에 경호정이 세워지며, 경호정의 예양강을 용호로 다시 불러지기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

이 무렵 예양강을 용호로 지칭하는 보성 출신의 시인 송은(松隱 崔成鐵, 1864∼1939)이 등장한다. 송은은 ‘제암산을 바라보다 望帝巖’, ‘보림사에서 놀다 遊寶林寺’ 등 수 편의 장흥 관련 시문을 쓴 시인이었다. 그 중 그가 쓴 ‘예양강을 지나며 過汭陽江’도 있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예양강을 아예 ‘용호’로 표현했다. 다음은 7구8절로 된 이 시 후반부 4절이다.

눈 번쩍이게 할 유명 누대 몇 곳이나 있나 / 名樓幾處堪開眼

천추의 시인들은 임의로 혼령 불러낸다 / 騷各千秋謾惹魂

그럭저럭 용호 가리키며 지난 일 슬퍼하니 / 聊指龍湖悲往事

석대에는 아무 말 없이 글자 흔적만 남아있다 / 石臺無恙字有痕

-ⓒ 『長寜詩文』(김규정 역)

위 시에서는 ‘용호(龍湖)’가 시어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전의 여러 시문에서 보았듯이 여기서의 용호와 관련하여 용반리나 부춘리 지명 등을 연결할 만한 시어가 없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제가 ‘예양강’이듯 예양강의 그 어딘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예양강이 한 줄기 강이므로 어느 수역에서 용호로 지칭했다면, 예양강의 다른 수역에서도 얼마든지 용호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예양강은 한 덩어리요, 한 몸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부춘리 예양강을 용호로 불렀다. 또 용반리 예양강도 용호로 불렀다. 이러한 사실을 시인이 인지하였다면, 굳이 부춘리나 용반리가 아니더라도 즉 창랑정의 예양강이나 독취정의 예양강에서도 그 예양강을 얼마든지 용호로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예양강의 용호 지칭에 대한 그 의미의 확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춘리 청영정 때의 용호만도 아니다. 영호정에서의 용호만도 아니다. 일정 구역에서 예양강의 일부 구간이 용호로 불리었다면, 예양강 전수역도 용호로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옥봉 시인으로부터 시작된 청영정의 용호, 이것은 이후 영호정의 예양강으로 이어 경호정의 에양강의 용호로 화장되었고, 끝내는 예양강의 전 수역으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단순한 예양강이 아니었다. 용호라는 이명을 지닌 예양강이 된 것이다. 용이 사는 예양강, 먼 훗날 승천하는 용을 품은 예양강인 것이다.

그러므로 옥봉은 이 예양강이 승천하는 용을 안고 있는 강으로 축원하고 축복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

1) 우암(尤庵) 송시열이 쓴 동강일사 부한구정(桐江一絲 扶漢九鼎”-동강에서 낚시줄 하나로 한나라를 붙들었다는 뜻을 담은 嚴子陵故事)”에서 나온 말로 엄자릉의 정신을 의미한다.

2) 능파(凌波) :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팔선녀의 환생 중 한 명으로 동정호 용왕의 딸인 용녀 백능파를 의미한다.

3) 장령시문앞의 책 958. 이 시의 역해는 편저자 김규정의 역해를 참조하였다.

4) 문림의 향기1(98-99).

5) 위국채 : 자는 윤명(胤明), 호는 만회(萬悔). 심석() 송병준(宋秉畯),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에게 배웠다. 많은 장흥 관련 시문을 남겼다. 위계훈과 함께 경호정을 지어 소요자략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6) 桐江淸風’, 龍湖鳴灘시 역해는 문림의 향기1(33)를 참조하였다.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