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유수원의 직업론과 시대착오적 신분의식
특별기고 - 유수원의 직업론과 시대착오적 신분의식
  • 장흥투데이
  • 승인 2023.06.2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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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역사연구자, 전 다산연구소장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은 실학자 가운데에서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뒤늦게 알려졌다. 그의 저서 <우서>가 주목받을 때도 저자가 누구인지 몰라 ‘저자 미상’이라고 했다. 유수원이 비밀의 인물이 되었던 것은 영조 때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유수원은 소론계 관인 집안 출신이다. 그의 호가 ‘농암(聾庵)’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귀머거리였다. 자신의 저서 <우서>가 추천된 후 영조를 만났을 때 필담을 나누어야 했다. 영조는 그를 경세에 재능이 있는 인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63세 때(1755년) 나주 괘서(掛書) 사건에 연루되어 대역부도의 죄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유수원’이란 이름은 입에 올리기 힘든 이름이 되었다.

차별적 신분이 아니라 분업으로서의 직업

그를 다시 주목하게 만든 <우서(迂書)>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우활한 책’이란 겸손한 이름과 달리 <우서>에는 당시의 주류적 사고를 벗어난 획기적 생각들이 체계적으로 펼쳐져 있다. 몇 가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의(仁義)를 중요시하여 이익 추구를 경계하던 생각을 반박했다. 의식이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재물이 있어야 나라도 제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상설 점포를 갖춘 상인이나 대(大)상인을 중심으로 한 진취적 구상을 했다. 상업 발전의 효과와 국가의 안정적 세수 확보를 겨냥한 것이었다.

셋째, 분업(分業)의 효율성을 깊이 인식했다. 기와집을 짓는 사례를 들어 분업의 효과를 설명했는데, 이는 사회적 분업과 연결되었다. (참고로 아담 스미스가 핀의 제조과정을 통해 분업의 중요성을 설파한 <국부론>은 1776년에 발간되었다.)

농암은 ‘국허민빈(國虛民貧)’, 즉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하게 된 근본적 원인을 ‘사민불분(四民不分)’에서 찾았다. ‘사민(四民)’, 즉 ‘사・농・공・상’의 직업체계가 바로서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농・공・상업을 천하게 여긴 결과, 양반들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업을 천하게 여긴 결과, 상업을 통해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가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농암의 해답은 ‘사민분별(四民分別)’이었다. 사민은 귀천이 있는 차별적 신분이 아니다. 생계수단이면서, 사회적 분업체계 속의 한 직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사민이 분별되면 각기 본업에 전념할 수 있고, 각기 본업에 충실하면 전문성이 높아진다. 또한 직업은 더욱 세분화되고, 산출의 수준이 높아진다. 농암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존재가 ‘한민(閑民)’이다. 한민은 뚜렷한 일이 정해지지 않았으면서도 품삯을 받고 생계를 해결하는 존재다. 얼핏 생각하면 농암의 사민론에서 벗어나는 존재다. 그러나 농암은 한민에게 적극적 의미를 부여했다. 한민은 정해진 직업 종사자가 본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으로 보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축구의 ‘리베로’를 연상시킨다. 최근 우리 사회의 쟁점 가운데 하나가 비정규직 문제다. 2018년 12월 청년 김용균의 안타까운 죽음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임금 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지난해 37.5%였다(2013년부터 2017년까지 32%대, 2018년 33.0%, 2019년 36.4%, 2020년 36.3%, 2021년 38.4%).

수평적이고 협력적인 직업의식을

기업으로선 비정규직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서류나 필기시험보다 일정 기간 근무를 통해서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업무의 성격상 필요한 경우도 있다. 변화무쌍한 기업 환경에 대응해 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할 때도 있다. 문제는 동일 노동인데도 낮은 보수로 차별하거나 꺼리는 업무를 전가하거나 노동자 보호를 위한 여러 장치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책으로 거론되는 ‘정규직 전환’에 대해서, 필자는 봉건시대의 신분상승운동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정규직/비정규직이 노동자 내부의 차별적 신분구조가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정규직 전환이 100% 가능한 것인지 진정한 해결책인지 필자는 의문이다.

당초 비정규직 채용은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보호 수준을 높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보호를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는 원칙적으로 비정규직에게도 통용되어야 한다. 결국 정규직이든 비정규적이든 기업과 노동자 양쪽의 합리적 선택 사항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농암은 18세기에 귀천이 있는 신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분화되어 협력하는 직업을 말했다. 21세기에 차별적 신분의식이 가당한 것인가. 사회 구성원이 저마다 자기 분야에 충실하여 이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이것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사회! 그 바탕엔 수평적이고 협력적인 직업의식이 필요하다.

*필자 김태희는 전 다산연구소장, 전 실학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실학의 숲에서 오늘을 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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