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호 사설 - 기봉 백광홍… 조선조에서 왜 저평가되었나?(상)
제193호 사설 - 기봉 백광홍… 조선조에서 왜 저평가되었나?(상)
  • 김선욱
  • 승인 2023.07.0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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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관동별곡’은 그 구상·문장이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이루는 명작으로 꼽힌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본문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1580년 발표된 이 ‘관동별곡’보다 25년 앞선 1594년에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1522∼1556)이 지은 ‘관서별곡(關西別曲)’이 있었다. 이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 공인받고 있으며 이 작품의 체재와 수사가 ‘관동별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봉의 ‘관서별곡’은 왜 제대로 평가 받지 못 했을까.

‘관동별곡’이 수록된 『송강집』은 송강의 사후로부터 40년만인 1633년에 편찬되었었지만, 기봉의 ‘관서별곡’이 수록된 『기봉집』은 거의 사후 350여년 만인 1899년에 편찬되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간혹 ‘관서별곡’이 소개되더라도 백광홍이라는 작자 이름과 작품 제목만 소개되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다. 거기다가 기봉과 기녀와의 관계에 대한 정보가 잘못 전달되며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도 야기되었던 것이다.

특히 기봉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보면, 이수광의 『지봉유설』 문장부 ‘여정(麗情-아름다운 정)’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수광은 기봉의 시 ‘최고죽의 부채에 붙이다 題崔孤竹扇’를 잘못 이해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기녀 ‘몸강남’은 기봉이 진정으로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한 여인이었다. 즉 기봉은 관서에서 ‘여러 기녀들과의 사랑놀음’을 한 것이 아니라 ‘몽강남’으로 이칭되는 한 기녀에게만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인데, 이를 두고 ‘기녀들과의 애정행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기봉 소개에서 기녀에 대한 기봉의 사랑을 자기만의 잘못된 시각으로 해석하여 “기봉을 풍정(風情)을 절제하지 못한 사람”, “뜻 높은 선비로서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몸을) 돌보지 못했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수광의 기봉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상상이 더해지면서 신흠·고상안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조 중기 문신인 신흠(申欽,1566∼1628)이 『상촌집』(제60권)에서 기봉을 평가하기를, 이수광의 견해에 한걸음 더 나아가, 기봉은 “주색에 빠져 노닐다가 끝내는 그 길로 죽었다”는 표현으로 기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기도 했던 태촌(太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도 『태촌집(泰村集)』‘총화(叢話)·여화(餘話)’에서 “(기봉이) 요물(妖物-기녀)에 현혹되어 스스로 그 장수를 재촉하였다”라고 평가했다.

기봉의 시문집이 편찬되지 않아서였겠지만, ‘관서별곡’만큼은 관서지방에서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지며 기방 등에서 많은 기녀들에 의해 불려졌다. 그래서 세인들도 당대, 후대의 문인들도 “관서별곡 작가는 백광홍”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가사 작품을 소개할 때면 예외 없이 “관서별곡은 백광홍”식으로 이름과 가사작품 이름만 소개할 뿐이었다.

게다가 혹자들은(이수광, 고상안, 신흠 등) 기봉을 기녀와 연관 지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기봉이 조선조에서 잘못 평가되었다는 사실은 『기봉집』 편찬시 서문을 기술한 백사근(白師謹)의 고백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즉 “나는 유년부터 우리 집안의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두 어른은 난형난제라고 들었다. 그러나 유독 옥봉의 문장과 필법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기봉을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이상하게 여겼고, 옥봉이 기봉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기봉의) 문장은 담박하면서도 순정(純正)하였다. 당시 제현들이 칭찬하면서 기대했던 문장이었다. 또한 매우 훌륭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앞서 들었던 것이 옳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백씨의 종인(宗人)인 백사근의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장흥에서의 기봉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1757년∼1765년에 전국의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장흥의 경우 1747년에 편찬된 『장흥읍지』(정묘지)가 자료로 제공됐다)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인 『여지도서』에 기봉 백광홍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마 장흥부에서 보내준 자료(장흥읍지)에 근거했을 것임에도 자료로 제공된 장흥읍지 자료보다 몇 자가 추가 되었다. 백광홍의 인적사항에서 둬 가지 소개가 그것이었다. 이것은 아마 『여지도서』 편찬자가 궁중에 보관된 실록, 사료 등을 확보했기에 가능한 소개였을 것이다.

『여지도서』에 소개된 백광홍 형제에 대한 소개는 “백광홍. 호는 기봉. 진사로 등제하다. 호당(독서당)을 역임하다. 아우 광훈은 호가 옥봉이고 시와 글씨로 이름을 날리고 백의의 접빈사로 종사했다. 종제(從弟) 광성은 호는 동계(東溪)다. 광안은 호가 풍잠(楓岑)이다. 모두 문장으로 문명을 떨쳤다. 白光弘。 號岐峯。 生進登第, 歷湖堂。 弟光勳, 號玉峯, 以詩筆鳴, 以白衣從事儐僚。 從弟光城, 號東溪, 光顔, 號楓岑, 俱以文章鳴。”

그런데 『장흥읍지』(정묘지, 1747)의 기봉 소개(안양방, 사마 조)에서 백광홍에 대한 소개는 ”“백광홍 : 백문기(白文麒)의 손자로 생원시·진사시 모두 합격했다 白光弘 : 文麒孫, 兩場”가 전부였다. 한문으로는 이름까지 합해 8자가 고작이었다. 『여지도서』에도 기재돼 있던 호(號)며 벼슬도 제외시켰다. 장흥 향교에 기재돼 있었을 역대 장흥부 사마시 합격자 명부만 보고 읍지에 기록했고, 그 외의 모든 정보는 더 이상이 기록을 확보하지 못해 이 정도 기록에서 그쳤을 것이다. 기봉에 이어진 옥봉의 소개는 어떠했을까. 옥봉의 소개는 기봉에 비하면 조금은 장황할 정도다. 옥봉의 만사시(실제는 옥봉의 아들 백진남에 대한 만사이다)까지 첨부했을 정도다. 즉 “광홍의 동생으로 호는 옥봉(玉峯)이다. 가정(嘉定:1522-1566), 갑자년(甲子年:1564)의 진사이다. 필법이 귀신과 통하고 시율(詩律)이 뛰어났지만 빈료(賓僚)로 백의종사(白衣從事:벼슬없이 일을 임시로 맡아보는 것)를 하였다. 이정구(李廷求)가 만장에서 말하길 (이 만장은 백광홍의 만장이 아니라 백광홍의 아들 백진남에 대한 만장인데 잘못 사용하였다) (…만장 소개…). 아들 송호 진남에게 지시하여 이청연(李靑緣)의 문인이 되게 하였다. 청연사(靑蓮詞)에 배향되었다.

정묘지 발간 이후 편찬된 여러 『장흥읍지』에서도 ‘정묘지’의 백광홍의 소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백광홍은 여전히 “文麒孫, 兩場”(백문기의 손자로 생원시·진사시 모두 합격했다)가 그대로 복사되어 소개되었다. 최소한 정부가 펴낸 『여지도서』에서 소개된 “호는 기봉. 진사로 등제하다. 호당을 역임하다.”라는 정보라도 부가할 수 있었는데도 정묘지 소개의 8자 소개에서 마무리했다. 대신 백광훈은 정묘지에서 잘못 인용된 아들 백진남의 만장을 삭제한 나머지의 모든 정보가 그대로 소개됐다.

『장흥도호부읍지』(1868년』, 『장흥읍지 경술(庚戌誌)』(1910), 『장흥지 무인(戊寅誌)』(1938)가 다 그랬다. 다만 한글과 한자가 병기된 『장흥지(丙午誌)』(1966)에서 만큼은 친절하게 “白光弘 : 文麒의 孫이요 兩場하다”고 13로 한문과 한글 병기로 소개했을 뿐이다.

백광홍의 『기봉집』 편찬이 1899년에 이루어졌으니 만큼, 1900년 이후에 편찬된 경술지 이후부터는 백광홍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등이 추가될 수도 있었는데도 장흥읍지로서 마지막이 된 1966년판 병오지까지 여전히 백광홍은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던 그 수많은 사마시 합격자일 뿐이었다. 이는 기봉집이 출간되었어도 장흥사회에서는 여전히 백광홍이 부상되지도 못하고, 여전히 부각되지도 않은 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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