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호 사설 - 기봉 백광홍에 대한 오해(1)
제194호 사설 - 기봉 백광홍에 대한 오해(1)
  • 김선욱
  • 승인 2023.07.19 1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양서 귀향 중 부안서 별세는 아니었다”

①“(백광홍은) …1555년 평안도 평사로 배수되어 변방에 나갔다. 하지만 이듬해 가을 병으로 교체되어 어버이 문안 차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안 처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민 교수, ‘기봉 백광홍의 인간과 문학세계’)

②“1555년 백광홍은 평안도 평사로 뽑혀 관서지방의 국경 상황과 민심을 돌아보았고 이때 관서별곡을 남겼다. 이듬 해 병이 든 그는 평사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전북 부안에 있는 처가에서 35세의 나이로 숨졌다. (『월간조선』 2004년 6월)

상기 예문 ①은, 『기봉집』을 역해한 정민 교수가 지난 2004년 6월 21일 ‘기봉 백광홍 선생 학술 발표회’ 때 발제한 ‘기봉 백광홍의 인간과 문학세계’ 논문 서두 기봉 선생을 소개하는 부문에서 언급한 내용의 일부이다. 예문 ②는 『월간조선』 2004년 6월호의 “문화관광부 선정 이 달의 文化人物- 白光弘 기행가사의 효시 ‘關西別曲’ 남기고 요절” 제하의 기사의 일부분이다.

두 예문이 다 ‘기봉 백광홍은 평안도 평사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부안의 처가에서 별세했다’ 라는 내용이다.

사실 기봉의 연보 등에 의하면, 기봉은 34세 되던 1555년 봄, 평안도 평사가 된다. 그리고 그해(1555)에 ‘관서별곡’을 짓는다. 또 그해 8월에는 스승인 이항으로부터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독실히 하라’는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1556년 8월 27일, 부안(扶安)의 처가에서 졸했다고 나온다. 그것이 다이다. 그러므로 보통은 1556년에 병을 얻어 체직되어 귀향하던 중 부안의 처가에서 사망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어쨌든, 평안도 평사를 그만 둔 이후의 기봉의 일정은 이처럼 불투명하다. 바로 ‘8월 27일 부안에서 졸했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은 기봉이 병을 얻어 귀향하던 중 처가인 부안에서 별세, 즉 객사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 즉 평안평사로 근무 중 기녀와의 사랑, 체직, 귀향 중 객사 등으로 연상되며 기봉의 죽음에 이상한 상상력도 야기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헌 등에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기봉이 귀향 중에 부안에서 사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그의 시 ‘만수원에서 짓다 題滿樹院-在長興’가 증거하고 있다. 만일 이 시를 부정한다면, 기봉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는 분명히 기봉의 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는 기봉이 평안도에서 귀향 중 죽은 게 아니고, 평안도에서 이미 장흥으로 귀향해 있었고, 고향 장흥에서 평안도 평사로 재직하던 때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밝혀 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 시제는 ‘만수원에서 짓다 題滿樹院-在長興’ 이다. 시 본문은 “사자산 아래 호계의 근방에 獅山之下虎溪傍 / 만수원 높은 다락에서 꿈이 길다 滿樹高樓午夢長 / 생각은 서쪽 변방에 있는데 소식이 끊어지니 西塞有思消息斷 / 도리어 남녘 고을이 내 고향임을 잊고 있다네 / 却忘南國是吾鄕”이다. (ⓒ『기봉집』/백수인 역)

‘장흥에 있다’는 만수원은, 바로 지금의 장동면 만년2구에 있었던 만수리를 가르킨다.

이 시에서 언급한 호계리는 만수리와 바로 이웃한 마을로 예전에는 만수리와 함께 용계면에 속했지만 1915년 행정구역 개편 때 호계리는 부산면에, 만수리는 장동면에 속하게 됐다.

조선조에 조정의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馬匹)의 공급과 해당지역의 정세를 보고하던 곳을 역(驛)이라 하고, 관리나 여행자들의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원(院)이라 하였다.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설치되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으며,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조 장흥의 역원에 속하는 곳으로는 장흥부가 있는 지금의 장흥읍 원도리에 있었던 벽사역(碧沙驛)을 비롯, 각 지역에는 몇 개의 벽사역의 하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역원이 있었다. 그러한 역원으로 장흥부 내에는 만수원(滿水院, 萬壽院 : 在府東二十五里), 장릉원(長綾院 : 在府東六十里), 서덕원(西德院 : 在府南十三里), 비자원(榧子院 :在府北四十五里), 동덕원(東德院 : 在府東四十里), 성암원(省巖院 : 在府南十里) 등이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全羅道)/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역원).

장흥부로부터 동쪽 25리에 있었다던 그 만수원(滿水院, 萬壽院)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장동면 만년 2구 만수리(晩守里)다. 이 마을 유래에 의하면, 마을 어귀 오른쪽 길가에 만수원의 터가 있는데, 조선시대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만수원(滿水院, 萬壽院)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장동면지』, 2005, 638쪽)

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기봉은 1556년 낙향하여 사자산 기슭의 호계마을 부근의 만수리의 만수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봉이 살던 안양면 기산리에서 장동면의 만수원까지는 반나절이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여서, 어쩌다 기봉이 평양에서 귀향한 후에 어느 날 그곳에 들러 만수원 정자에서 흐드러지게 낮잠도 잤고 시 한 수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로 보아 만수원 다락에서 오수에 젖어 있으면서도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의 의식과 생각이 자꾸만 서쪽 변방에 가 있었는데, 그 쪽 소식이 끊어짐으로써 남녘 고을이 자신의 고향인 것조차 잊게 된다는 내용을 이 시에서 읊었다.

기봉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백담 구봉령(1526~1586)도 만수원에서 쉬면서 칠언절구 한 수를 짓는다. 백담이 1583년 5월 쉰여덟 살 때 전라도 관찰사로 보임되었으니 아마 이 무렵 장흥부내를 순행하던 중 여행자들의 숙소인 이곳 만수원에 들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시제가 ‘장흥 만수원에서 쉬며 憩長興萬壽院’이다 시 내용은 “남쪽으로 오는 동안 말 달리느라 지쳤는데 南來日月困馳驅 / 홀로 높은 난간에 올라 남은 시름 풀어보네 獨上高欄散餘愁 / 눈 가득한 연하의 풍광 그림 그릴 만한 곳 滿目煙霞堪畫處 / 흰 구름 붉은 나무 아래 실개천이 흐르네 白雲紅樹小溪流”이다.

이처럼 당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며 관리들이 장흥 여행 중에 풍취 좋은 이곳 만수원에 들러 쉬기도 하고 묵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기봉의 시 중에 “생각은 서쪽 변방에 있는데 소식이 끊어지니”라는 대목이다. 이는 관서 평사로 재임하였던 기봉이 그 변방의 소식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것도 장흥의 만수원에서. 그러므로 기봉은 이미 그 변방에서 장흥으로 귀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이것 만수원까지 찾아가 쉴 만큼의 건강도 회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변방의 소식을 가져올 그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무슨 일로인가 고향마을에서 처가인 부안을 찾아갔을 것이고, 거기에서 뜻하지 않게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평양에서 귀향 중에 부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고향 마을인 기산 마을로 귀향하였고, 고향에서 관서의 소식을 기다렸으며, 어느 날 고향에서 부안으로 올라갔다가 부안에서 갑자기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만수원에서 짓다 題滿樹院-在長興’의 시가 아마 기봉의 마지막 작품이었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서쪽 변방을 근심하며 오수에 젖었던 기봉이, 마지막의 작품을 그곳에서 쓰며 오수를 즐겼던 그 만수원 부근에 영면해 있다. 그 묘소 아래에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한 ’기봉가비‘가 세워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전남 장흥군 장흥읍 동교3길 11-8. 1층
  • 대표전화 : 061-864-4200
  • 팩스 : 061-863-49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욱
  • 법인명 : 주식회사 장흥투데이 혹은 (주)장흥투데이
  • 제호 : 장흥투데이
  • 등록번호 : 전남 다 00388
  • 등록일 : 2018-03-06
  • 발행일 : 2018-03-06
  • 발행인 : 임형기
  • 편집인 : 김선욱
  • 계좌번호 (농협) 301-0229-5455—61(주식회사 장흥투데이)
  • 장흥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장흥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htoday7@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