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12)/옥봉과 예양강(8) - 옥봉 백광훈, ‘예양강은 용호’의 확장성 선도하였다
■기획 - 아, 예양강(12)/옥봉과 예양강(8) - 옥봉 백광훈, ‘예양강은 용호’의 확장성 선도하였다
  • 김선욱
  • 승인 2023.07.1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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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정은 용호에서 비롯, 경호정도 “부춘리 용호 공유한다” 천명

“부춘·기동·용반리의 예양강 전체 유역 5.3Km가 용호였다”로 확장

김선욱/본지 편집인. 시인

 

 

 

 

 

 

 

 

▲장흥 용호정 앞 예양강
▲장흥 용호정 앞 예양강-용호로 불린다.

 

<지난호에 이어서>

장흥군 부산면 북동부의 용반리, 기동리, 부춘리 세 마을은 서쪽으로 예양강을 이웃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세 마을은 북동쪽으로 병무산(513.8m) - 금장산(금장재, 471m) - 용두산(549,1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북동부에 가로놓여 있고 이 산줄기와 예양강 사이에 드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기동리 바로 위쪽으로는 장동면 만년리에서부터 흘러온 부산천이 합류해 흐르면서 기동리와 부춘리의 예양강은 수량이 더욱 풍부해진다. 이들 세 마을 중 가장 위쪽에 위치한 용반리에서 부터 부천리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흘러내리는 예양강은 길이가 5.3Km 쯤 되는데, 이 예양강은 고대로부터 이들 세 마을의 역사 문화를 함께 해 온 세 마을의 살붙이 같은 강이었다. 이들 세 마을 앞에는 이 강과의 이러한 질긴 인연을 증거라도 하듯 영호정, 경호정. 부춘정 세 누정이 강변에 들어서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 세 마을은 예양강의 하나의 강역권(江域圈)에 속한다. 맨 하류 쪽인 부춘리에서 1560년 청영정(淸暎亭)이 세워졌고, 이어 1823년 용반리에 용호정(龍湖亭)이 세워졌고(이후 1838년에 부춘정이 재건립되었지만, 부춘정은 청영정의 연장선으로 본다), 이를 뒤이어 1912년 기동리에 경호정(鏡湖亭)이 세워졌다.

그런데 당초 예양강의 한 강역권인 이들 3개 마을 중 맨 상류에는 용소(龍沼)가, 맨 하류 부춘리에는 용암(龍巖)이 있었다.

그런데 부춘리에 맨 먼저 청영정이 세워지고 나서 부춘리 출신의 풍암 문위세, 문위세 조카이며 청영정 주인인 문희개와 교유(交遊)하며 인연 맺은 장흥 출신의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1537~1582)은 부춘리 청영정의 예양강을 ‘용호(龍湖)’라 부르며 용호, 용강(龍江) 등을 제재‧소재로 시 15 수를 남겼다. 부춘리 예양강에는 ‘용에 바우’라는 용암(龍巖)이 있어 ‘용호(龍湖)‧용강(龍江)‧용연(龍淵)’ 등의 시어를 활용한 우의(寓意)적인 시편들이 가능했을 것이다.

부춘리 예양강에 대한 용호라는 이명(異名)의 호칭은 옥봉에서 그치지 않았다. 옥봉의 이후이긴 하지만, 옥봉 외에도 당대 저명한 시인이었던 계은 이정립(溪隱 李廷立,1556~1595)과 백호 임제(白湖 林悌,1549~1587)에 의해서도 부춘리 예양강은 용호로 불리어졌다. 즉 그 두 시인도 부춘리 청영정과 용호를 제재‧소재로 각각 2,3수 씩 시를 남기며 옥봉이 부춘리 예양강에 부여한 용호의 이명을 증거하여 주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100여 년 쯤 지나 장육재 문덕구(藏六齋 文德龜,1667∼1718)가 용반리 상류 용소(龍沼)가 있는 예양강을 용호(龍湖)로 부르면서 시를 지었고, 이로부터 다시 200여 년 이 지난 1828년 최규문(崔奎文,1784~1864)이 용반리의 예양강 용소(龍沼) 위에 용호정(龍湖亭)을 세우면서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용호는 영호정 앞 예양강을 의미하는 용호로 대치되었다.

부춘정이 세워진 뒤 100여 년이 지난 뒤 1912년 부춘리 바로 윗마을인 기동리에 행은 위계훈(杏隱 魏啓勳,1866~1942)이 경호정을 세우면서, 경호정은 설립 때부터 청영정 때 호칭이던 용호를 다시 소환하여 경호정 앞 예양강도 용호로 공유하면서 백광훈‧문희대 대(代)의 용호가 다시 부활한 셈이 되었다.

옥봉의 시로서 예양강의 이명(異名)이 된 용호(龍湖)는 백광훈‧문희개 대를 지나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1세기를 지나 장육재에 의하여 다시 용반리 북쪽 예양강이, 다시 2세기 쯤 지나 기동리에 경호정이 들어서면서 경호정의 예양강이 이명으로 부여된 것이다. 이로써 부춘리에서부터 시작한 용호의 호칭이 3개 마을 모두에게도 공유되면서 이들 3개 마을의 예양강 수역은 ‘용호’로 불리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용호’는 백광훈‧문희개 대를 지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장흥 사람들에게 아주 잊혀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용호라는 이명이 세월이 지나면서 부춘리의 예양강 뿐만 아니고 기동리‧용반리 강역권으로까지 확대된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부춘리와 용반리 사이에 위치한 기동리마저 경호정이 세워지면서 부춘리 예양강의 이명이던 용호가 기동리의 예양강 이명으로 공유되면서, 이른바 부춘리-기동리-용반리에 이르는 예양강 유역 전체가 용호라는 이명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양강을 시인들은 ‘예(汭) 자(字)’만을 살린 채 ‘예강(汭江)’ ‘예천(汭川)’으로도 호칭하였다. 이는 ‘예양강’이라는 강 이름을 줄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옥봉 시인은 처음으로 그 지명인 ‘예양강’에 그 지명성을 넘어 우의(寓意)가 담기고 상징성이 부여되는 ‘용호(龍湖)’, ‘용강(龍江)’, ‘용연(龍淵)’을 시어로까지 차용하며 예양강의 의미를 확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예양강 관련의 시에서는 지명인 예양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더불어 15수의 시에서는 ‘용호’ 관련의 시어를 활용한 것이다.

그냥 ‘예양강’일 때 이는 사실적인 표현이 된다. 그런데 그 예양강이 용호요, 용강이요, 용연이기도 할 때는 그 사실적 표현과 엄청난 차이의 의미를 함유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예양강에 대한 의미와 그 이미지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춘리 예양강은 옥봉 이후 ‘장강(長江)’으로 ‘동강(桐江)’으로 표현되곤 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부춘리 예양강을 우의적으로 용호 등으로 표현한 옥봉 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부춘리 예양강의 용호가 용반리 예양강에서도 그대로 차용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옥봉의 부춘리 예양강의 용호 등의 표현이 장흥 예양강 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조선조에는 인쇄 출판 문화가 대중화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선비나 문인이 유집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그 당대나 그 당대 이후에 목판본으로라도 간행되지 않는 한 그 선비의 문집은 그 선비 가문에서 그대로 잠들게 마련이다.

기봉 옥봉의 경우만 해도 그런 경우이다.

조선 전기 때 문인으로 장흥 출신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알려진 백광홍(白光弘,1522~1556)의 경우가 좋은 사례이다. 기봉은 유집으로 남긴 유집 『기봉집』에서 시 200여수의 시문을 남겼으나 그 유집의 시문은 오랫동안 그 후대 가문에서 잠든 채 묵혀 있다가 기봉의 사후 300여 년이 지난 1802년에 비로소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기봉은 당대에 저명한 시인이었으나 활자본으로라도 간행되지 않았기에 그 시문(詩文)이 널리 회자될 수도 없었다. 최소한 3세기 동안 그의 시문이 거의 알려지지 않으면서 기봉이라는 위대한 천재 시인이 장흥에 있었는지 그 누구도 조명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기봉은 최소 3세기 동안은 장흥 고문학사에도 그리 큰 영향도 끼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옥봉의 경우는 달랐다. 옥봉의 졸(猝) 연도는 1582(선조 15)이다. 옥봉의 사후 그의 유집은 임진왜란으로 산일(散佚) 되고 남은 저자의 유고를 아들 백진남(白振南) 『옥봉유고 玉峯遺稿』란 이름으로 수집, 편차하였다. 호조정랑, 평안도도사,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던 윤광계(尹光啓,1559~?)가 『옥봉집』 후서(後敍)에서 “이 시집이 도성(都城)에 머무는 몇 년 간 대수필(大手筆)이라 불리던 명공(名公)들까지 보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어 널리 유포시키고자 했으나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라고 쓴 글로 보아 이 시집은 백진남에 의해 비교적 일찍 편차되어 간행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왕명으로 동국시문(東國詩文)을 찬집(撰集)하던 이정구((李廷龜,1564~1635 :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가 『옥봉유고』를 보고서 호남관찰사로 나가는 명관 윤안성(冥觀 尹安性,1542~1615 : 남원부사, 병마절도사, 형조참판 등 역임)에게 간행을 권하였고, 이에 백진남이 상중하 3권과 보유(補遺)로 편차된 유고들을 선사(繕寫)하여 1608년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현재 이 옥봉유고는 규장각(奎3413), 장서각(4-6031)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별집(別集)은 1742년 5대손 백수형(白受珩), 백수경(白受璥)이 가장(家藏)해 오던 옥봉의 서찰을 간행하면서 원집의 보유(補遺)를 빼고 원집 간행 시 누락되었던 시 약간 편과 함께 재편차하여 시(詩), 서(書), 부록(附錄)의 순서로 구성해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608년의 원집과 1742년의 별집을 합부한 것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744a), 연세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247)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옥봉의 시문은 그의 사후 26년만이던 1608년에 목판본으로 발간되었으며, 당연히 그 일부가 장흥의 수원백씨 문중이며 장흥의 여러 선비들에게도 배포되며, 어떤 형태로든 장흥의 문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백진항(白鎭恒,1760∼1818)은 장흥출신으로 100여 수 등을 담은 『계서유고(溪西遺稿)』를 남겼는데 그의 시문 중 ‘보림사를 지나다 옥봉의 시운을 차운하다 過寶林寺謹次玉峯韻’ 등 옥봉의 시운을 차운하는 시가 7수에 이르고 있다. 백진항 뿐만이 아니다, 많은 장흥 출신의 시인들이 옥봉의 시를 차운하고 있어, 당대에 옥봉의 시가 장흥 출신의 많은 시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예양강의 이명으로서 용호의 호칭. 그것의 시작은 옥봉 백광훈이었다. 옥봉은 단순히 1,2수의 시편에서 용호를 칭한 것이 아니었다. 30여 수의 용호, 용강, 용연 등의 시를 통하여, 부춘리 앞 예양강을 용호로 헌사한 것이다.

결국 부춘리 마을 앞 예양강은 1500년 대 옥봉 시인에 의해 용호로 불러졌고, 용반리 상류 용소가 있는 예양강은 장육재에 의해 용호로 불러졌으며 1900년대 초 경호정 앞 예양강은 위국채에 의해 다시 용호로 불러지게 되면서 결국 세 마을 앞 에양강이 모두 용호라는 의미로 불러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봉에 의해 최초로 용호로 지칭하게 되었지만, 장육재에 의해 그 용호가 용반리 에양강까지 확대, 확충된 의미로 불러지게 되었고, 1900년대 초 위국재에 의해 부춘리의 영호로 기동리 예양강까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부춘리에서 용반리까지 예양강의 5.3Km의 예양강이 용호로 불러지는 역사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의 시초는 옥봉 백관훈이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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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호정 건립으로부터 10년 뒤인 1838년 청영정 터에 동강 김기성(桐江 金基成,18011869)이 청영정 터를 매입하여 부춘정을 건립하면서 예전 청영정 앞 예양강을 용호로 부르던 시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동강(桐江)’이라 칭하는 강의 새로운 이름이 등장되기에 이르렀다.

2) 백진남(白振南, 1564~1618)으로,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이다. 시인 백광훈(光勳, 1537~1582)의 아들이다. 1590(선조2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와 시로 유명하며, 문집에 송호유고(松湖遺稿)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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