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호 사설 - 기봉 백광홍에 대한 오해②
제195호 사설 - 기봉 백광홍에 대한 오해②
  • 김선욱
  • 승인 2023.07.2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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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봉은, 관서평사 복무 내내 깊이 병든 채였다”

“(기봉은) 평안평사가 되어 풍정을 절제하지 않고 영변의 기생을 아꼈다. 병으로 인해 체직되어 爲平安評事。風情不節。眷寧邊妓。因病遞還 ”(『芝峯類說』/卷十四/文章部七/麗情)

“ (기봉은) 서관(西關 평양)에서 주색에 빠져 노닐다가 끝내는 그 길로 죽었는데, 在西關。溺於花酒。竟以此死” (『象村稿』/卷五十二/漫稿下/晴窓軟談下)

“(기봉은) 관서의 평사였다. 그런데 요물(妖物)에 현혹되어 스스로 그 장수를 재촉하였다. 而爲關西評事。惑於妖物。自促其壽”(『泰村先生文集』/卷五/效嚬雜記下/餘話)

이상은 기봉 백광홍에 대한 글들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의 이 글 마지막 부문에서, 기봉의 기녀에 대한 사랑을 언급하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양주(楊州) 홍등가(紅燈街)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기며 세상의 환락을 실컷 맛보았지만 이는 꿈처럼 허환(虛幻)이었다고 술회하는 ‘견회(遣懷)’라는 시를 예로 들며, 기봉의 기녀에 대한 사랑은 ‘견회’에서의 사랑(기녀와의 사랑)과 전혀 다른, 진정으로 마음을 다한 사랑이었다고 평가는 했지만, 앞 부문에서 언급한 “풍정을 절제하지 못했다 風情不節”는 문장으로 기봉에 대한 오해의 빌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몇몇 시인들이 “주색에 빠져놀았다”느니, “요물에 현혹되었다”느니 하며, 마치 기봉의 병이 든 것은 기녀 때문이었다는 식으로 기봉을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기봉이 병들었음은 기녀와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기봉이 관서로 떠나긴 전 스승인 청연(淸蓮) 이후백을 한양에서 만났을 때 기봉의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던 듯싶었다. 이는 이후백의 만사 시 중에 “관서 땅 이별이니 견디겠지만 / 서울서 여윈 몸에 크게 놀랐네 可忍關西別。空驚洛下癯”라는 시구가 말해주고 있다. 이 시에서 기봉이 관서 땅으로 부임해가려고 하였을 때 청연이 깜짝 놀랐을 정도로 기봉의 몸이 쇠약해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쇠약한 몸으로 군무(軍務)에 임하다가 풍토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기저질환이 심해졌을 수도 있다. 따뜻한 고장의 장흥출신의 그의 몸이 관서의 혹독한 겨울추위를 견뎌내지 못했을 수 도 있다. 어쨌든 평사업무 중에 병을 얻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초부터 몸이 많이 쇠약해진 채 관서평사로 부임해 갔을 기봉이었는데, 어쩌다 깊은 병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 기봉의 몸의 상태였기에, 관서평사 재임 중에 쓴 여러 편의 시에서 “몸이 병들었다” “병으로 누워 있다” ”나는 병든 나그네다”등 여러 번 자신이 병들었음을 시에서 나타난 것이다.

기봉은 시 ‘취해 이자운에게 주다 醉贈李子雲’의 1구 “황금새(黃金塞 : 변방의 지명인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에 1년간 병이 든 나그네가 … 一年病客黃金塞”라고 표현, 1년간 병이 든 상태였음을 표현하였다. 기봉이 평안도 평사로 관서로 나간 것은 1555년 봄이었다. 그리고 병을 얻어 체직된 후 부안에서 졸하게 된 때가 1556년 8월 27일이었다. 그러므로 기봉의 평안도 평사로서 근무한 기간은 길어야 1년 반 쯤이었을 것이다.

위 시 ‘취해 이자운에게 주다’에서 1년간 병이 들었다고 고백한 것으로 보면, 아마 관서에서 평사 재직하는 동안 내내 병이 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 외에도 ①‘병을 얻어 완계를 지나며 옛날을 기억하다가 病得浣溪。枉過談舊有感。仍步所袖寄四美韻。二首。兼別四美南行’의 1,2구 = “분성 사는 그대에게 감사하노니 多謝盆城子 / 자주 와 병든 내 맘 만져 주었지 頻來慰病唫” ②‘진서루에 조군옥에게 주다 鎭西樓.贈趙君玉’의 시 1구 = “높은 누각 올라보니 병든 눈에도 환하네 上高樓病眼明” ③ ‘외로운 밤 獨夜’의 시 1,2구 “철옹성 높고 높다 해도 어둑하니 鐵瓮城高山日昏 / 어버이 그리는 병든 객은 다시 마음 상하여 思親病客重傷魂” ④ ‘자수가 보낸 시에 차운하다 次子修見寄’의 시 1,2구 = “변방의 끝에서 병을 안고 아침 내내 누웠는데 竆邊抱病卧終朝 / 젊은 날의 장하던 꿈 호기조차 점차 스러지네 少日雄心漸减豪” ⑤ ‘병 중에 조 선생 경양의 운에 차운하여 주다 病次趙先生景陽韻…’의 시제 ⑥ ‘병으로 의주 청심당에 누워 회포를 적다 病卧義州淸心堂。書懷’의 시 1,2구 = “삼천리 먼 길을 집 떠나 와서 離家三千里 / 아파 드러눕자 어버이 배나 그리워 卧病倍思親” ⑦ ‘박일초가 질정관으로 연경에 가는 것을 전송하며 送朴一初質正赴京 名好元。壬子文科同榜’의 시 2수 중 2수 2구 = “몸져누워 먼 데로 이별 차마 견딜 수가 없네 病卧難堪遠別顔” 등 무려 8편의 시에서 기봉은 몸이 병든 상태였다고, 내내 자주 아팠다고 토로하고 있다.

한두 편의 시에서 몸이 아팠음을 나타낸 것도 아니다. 이토록 많은 시에서 몸이 아팠다고 표현한 것은 가식을 꾸밀 줄도, 위장할 줄도 모르던 고지식한 기봉이었기에, 우리는 그의 진실한 고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봉은 관서에서 복무 중 거의 내내 병이 들었고, 끝내는 그 병을 이기지 못해 사직하여 귀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녀와의 방탕한 놀음 따위로 병이 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독(愼獨)의 핵심은 무자기에 있다 謹獨要在毋自欺 / 내성(內省)은 옥루(屋漏-고대 실내 모서리에 신주新主를 모셔두는 곳)에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內省須無愧屋漏 /옥루는 안 보여도 또한 아주 환하거니와 屋漏雖幽亦孔昭 / 군자는 부끄럽지 않음으로 기약한다 君子所以期不疚 / 은미하여 저만 홀로 안다고 하지 말라 隱微莫道己獨知 / 열 손 열 눈 어지러이 손가락질 만나리니 十手十目紛指覯 / 하물며 그대 집 감춰진 곳에도 何况爾室莫顯處 / 또한 귀신 있어 좌우에 임해 있구나 亦有鬼神臨左右 …”

기봉의 시 ‘옥루(屋漏)’에서 ‘신독(愼獨-『대학』‧『중용』에 있는 말, 혼자 있을 때에도 조심한다는 의미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격의 완성을 위해 공부하는 유자儒者와 군자君子에게는 아주 중요한 가치관이었다)에 대한 글이다. 이 시에서 보듯, 기봉은 자기의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양심을 속이지 않는,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신독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삶의 가치관에 철저했던 것이 기봉이었음을 이 시 말고도 여러편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기봉은 그런 위인이었다. 이 시에서처럼 신독의 수행에 철저했던, 신독을 자기 삶의 중요한 삶의 철학으로 여겼던 기봉이었다.

이처럼 기봉은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은, 언제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는 수양(修養)과 수신(修身)을 갈고 닦았던 진정한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걸리지도 않았을 병”을 “나 병에 걸렸다”는 식으로 가식하고 위장하는 따위의 표현이나 시작(詩作)은 아예 꿈에서라도 생각도 못했을 기봉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편의 시에서 표현되었듯이 실제로 평사로서 복무 기간 거의 내내 병들어 있었던 기봉이었고, 그러한 병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불가피하게 체직(遞職)할 수밖에 없었을 기봉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홍진(洪縝) 시인은 만사에서,

“…그대의 죽음이 애석한 것을 / 아득한 자들은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 다만 운명인 까닭에 / 안타까운 마음 품고 /험한 산을 내달렸겠지 / 어이 해야 그 마음 흔들리지 아니하고 / 막부(幕府)의 말석에서 받들어 맞이할까 / 이미 스스로 얻지 못하였으리 / 하물며 풍토를 살펴 대비하지 못했음에랴 / 그대 죽음이 병 때문이라고 말들이 많지만 / 다만 그 운명임을 알지 못했음일세 …斯人之不淑. 茫茫者難知兮. 惟命之故. 懷靡遑而驅馳峻阻 兮. 安得不蕩搖其心腑. 承迎婉畫之末己不自得兮. 况不審備乎風土. 人多異說以病君兮. 殊不知其命.”라고 읊으며 기봉의 죽음이 운명이었다고 위무까지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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