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13)/옥봉과 예양강(9) - 옥봉 백광훈, 장흥위씨 일족과 친밀히 교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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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흥투데이
  • 승인 2023.07.2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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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곤·위사임·위이율 – 당동‧방촌의 관산위씨 성세(成勢) 연 이들이었다

김선욱 / 시인 . 본지 편집인

 

 

 

 

 

 

 

 

▲관산읍 당동마을은 장흥임씨 사부자 평장사 출생지며 고려 인종왕비 공예태후 탄생지며, 장흥위씨 오덕 출생지요,
장흥위씨 관산파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지난호에 이어서>

옥봉이 당대 관산의 당동·방촌마을에 사는 장흥 위씨 일족과 긴밀히 교유했음을 나타내는 시들이 있다.

①위숙 댁에서 형님의 운을 따라 짓다 魏叔宅 次伯氏韻 ②위사임의 집을 제재로 삼아 지어 부치다 魏士任家 ③위이율에게 주다 贈魏而栗) 등 3수이다.

이들 3수 시 대상자들은 위곤(魏鯤)·위사임(魏士任)·위이율(魏而栗)로, 이른바 위곤 부자(父子)들이다. 이들은 당시 당동·방촌리에서 지역의 토호세력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장흥위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이 시의 내력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옥봉이 교유했던 이들 일가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당시 관산에서 장흥 위씨는 중세조 위창주(魏菖珠)의 19세손인 위진현(魏晉賢,1483∽1564) 대(代)부터 시작된다. 위진현이 당시 장흥 평화촌에서 처가였던 관산의 당동으로 이거해 관산에서 장흥위씨 시대를 연 것이다.

위진현의 아들(양자 입적)인 위곤(魏鯤,1515∽1582)은 조선조 명종 4년(1549)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진사가 된다. (이때 기봉도 진사에 급제, 둘은 진사시 동급생이 되며 이때부터 둘의 교유는 시작됐을 것이다.)

위곤의 자(字)는 대충(大冲)·태화(太和). 호(號)는 당곡(唐谷)이었다.

당곡은 다섯 아들을 둔다, 이들은 21세로 덕홍(德弘)·덕의(德毅)·덕관(德寬)·덕화(德和)·덕후였다. 이 오덕(五德) 중 덕홍(德弘)의 자손은 판사파(判司派), 덕의(德毅)의 자손은 청계파(廳溪派), 덕관(德寬)의 자손은 운암파(雲岩派), 덕화(德和)의 자손은 판서파(判書派), 덕후(德厚)의 자손은 안항파(顔巷派)로 나눠지며 비로소 관산파 장흥 위씨들이 이때부터 크게 번성하게 되기에 이른 것이다.

장남 위덕홍(魏德弘,1537~1606)의 자는 사림(士任)이다. (옥봉의 시에 나오는 인물이다). 군자감(軍資監)에 올랐다.

차남은 위덕의(魏德毅,1540∼1613)로 선조(宣祖) 6년(1573) 식년시(式年試)에 생원으로 급제했다. 자(字)는 이원(而遠), 호(號)는 청계(聽溪)‧동호(桐湖)다. 청계는 임진왜란 때 장흥에서 의주까지 90일간 걸어서 피난 중인 선조(宣祖)를 알현(謁見)하였다. 전란 후 진원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훈록되었으며 별세 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삼남은 위덕관(魏德寬,1547∼1628)으로 자는 이율(而栗), 호는 운암(雲巖)이었다. (이율 역시 옥봉의 시에 나온다). 봉직랑(奉直郎) 군자감(奉直郎) 판관(判官)을 역임했으며, 후에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운암은 1593년 47세 때 부산면 기동리에 입향(入鄕)하여 그곳에서 은거했다. 그는 마을 이름도 기동이라 짓고 훗날 후손들에 의해 지어진 경호정(鏡湖亭) 터인 석대에 자주 올라 시문을 읊었고, 이곳에서 행의(行義)를 실천하였으며 후손들이 대대로 정주하며 세거, 운암공파 집성촌을 일구었다.

사남은 위덕화(魏德和,1551∼1598)로 1585년 무과에 급제하여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으로 있을 때 충무공 이순신(李純信)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분(悲憤)하여 병을 얻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오남은 위덕후(魏德厚,1556~1612)로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역임했다. 호는 안항(顔巷), 이명(異名)은 위덕임(魏德任)이다.

이처럼, 당대 관산의 위씨들은 항차 장흥에서 대표적인 토호세력으로 성장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관산 위씨들이 당동과 방촌리를 구심점으로 막 기지개를 펴고 있었을 때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 옥봉이 형님 기봉과 함께 그 장흥 위씨 성세의 시작점이었던 위곤(魏鯤)의 일가와 돈독한 교유를 했다는 사실이 그의 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는 당대 장흥의 사회상을 가늠해 볼 수도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옥봉이 당시 관산 위씨 집안인 위곤(魏鯤)의 집에 들러 여기서 하룻밤을 유숙하며 지은 시를 보자. 시제로 보아 옥봉은 기봉 형과 함께 어느 날 위씨 집을 방문했고 크게 환대받았다. 이때 기봉도 시를 지었고, 이 기봉의 시를 차운하여 옥봉도 시를 지었던 것이다.

위숙 댁에서 형님의 운을 따라 짓다 魏叔宅 次伯氏韻

시냇가 앞쪽 한 줄 길로 솔밭(솔 담쟁이) 속 들어가 / 溪南一路入松蘿

높은 마루(장춘대)로 불려가서 뵙고 나니 내 집 같아 / 趁召高軒似到家

한껏 취해 사양 않고 하룻밤 유숙하며 / 盡醉不辭留夜宿

작은 매화 향내 속에서 달뜨기를 기다리네 / 小梅香裏候嫦娥

ⓒ玉峯詩集上 / 詩○七言絶句/송준호 역

*위숙(魏叔) : 여기서 위(魏)는 장흥 위씨를 가르키고, ‘숙(淑)’은 아버지보다 나이 어린 숙부를 가리킨다. 옥봉이 차운한 기봉 시에서 위숙의 이름이 ‘곤(袞)’으로 나온다. 그러나 『기봉집』의 시에서는 이른바 위숙(魏叔)의 정명인 위곤(魏鯤)으로 나오고 장흥위씨 족보에서도 위곤(魏鯤)으로 나온다.

*백씨(伯氏) : 남의 맏형을 가르키지만 여기서는 기봉이다. 『옥봉집』에는 이 시에 바로 이어, 옥봉이 차운했다는 기봉의 시도 병기되어 있다.

*고헌(高軒) : 높은 가옥, 높은 정자를 의미. 덕후의 장남 위정훈은 이 눞은 정자가 ‘장춘대(長春臺)’였다고 기록했다. 즉 이 장춘대의 사연이 나오는 시 ‘長春臺韻’에서 이런 내역을 밝히고 있다. *송라(松蘿) : 소나무 겨우살이. 여기서는 은자(隱者)를 상징한다. 곧 집 주인 위곤의 고매한 품성을 의미한다.

옥봉이 이 시에서 ‘형님 시를 차운했다(次伯氏韻)’ 고 하였듯이 『옥봉집』에는 옥봉의 시에 이

어 병기된 기봉의 시가 뒤따른다.

『옥봉집』에 출전하는 기봉의 시도 보자.

위상사의 곤(衮)의 집에서 짓다-집은 관산의 고읍에 있다 題魏上舍衮宅- 宅在冠山之古邑.

옛 성에 남은 성가퀴 등나무 덩쿨 절반이고 / 古城殘堞半藤蘿

오차(烏次)에 남은 백성 몇 가구나 존재하나 / 焉次餘民有幾家

산악은 그대로요 강과 바다는 드넓은데 / 山岳不崩江海闊

나는 장차 오래 살고자 하여 달에게 묻노라 / 長生我欲問仙娥

*상사(上舍) : 생원, 진사.

*언차(焉次) : 오차(烏次)의 잘못 표기인 듯. 관산 지역은 백제 때 오차현(烏次縣)이었고, 신라 때는 오아현(烏兒縣)으로, 고려 때는 정안현(定安縣)으로 고쳐 불렀다.

*선아(仙娥) : 선녀(仙女). 달을 달리 이르는 말.

ⓒ峯詩集上/詩/七言絶句

『옥봉집』에 수록된 기봉의 시인데, 여기서 기봉 시의 시제는 ‘題魏上舍衮宅 宅在冠山之古邑’였다. 그런데 『기봉집』에서는 이 시의 시제가 좀 다르다. 즉 ‘題魏上舍衮宅- 宅在冠山之古邑’가 아니라 ‘題魏上舍軒- 名鯤同蓮榜 在古邑傍村’으로 돼 있다. 즉 “이름은 곤(鯤)이다. 함께 급제했다. 고읍 방촌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처럼 『옥봉집』에서 ‘곤(袞)’이라는 이름이 『기봉집』에서는 ‘곤(鯤)’으로 명기 되어 있고, 곤이 기봉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는 내역도 밝히고 있다. 시 본문 내용은 같다.

이처럼 옥봉이 자신의 시에서 곤(鯤)을 위숙(魏叔)으로 표현하고 병기된 기봉의 시에서도 조선시대 임금이 입는 정복인 곤룡포를 의미하는 곤(袞)으로 표기한 것은, 위숙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관산 방촌에서 기봉과 옥봉은 같은 소재로(위곤의 집과 위곤의 집 방문) 시를 지었다. 시를 지을 당시 위곤의 집은 당동이 아닌 방촌이었다. 곤의 부친 진현은 당동으로 이거하였으므로 곤의 집도 당동이어야 하는데, 당동이 아닌 방촌이 위곤의 집으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위문(魏門) 측에서는, 곤의 장남 덕홍이 결혼할 무렵에 위곤은 본가와 멀지 않은 방촌(현재의 도립공원 주차장과 축구장 사이의 포도밭. 이곳을 지금도 판사공의 집터라고 부른다)에 새집을 지어 덕홍을 분가시키고 이 집에 별당도 지어 본가와 자주 왕래하면서 자식들에게 학문도 전수시키고 자신도 여기서 풍류를 즐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별당 자리에 대가 있었는데, 이대를 장춘대(長春臺)라고 불렀다고 한다.(『천년가학 방촌학1』)

그러므로 기봉·옥봉 형제가 방문했던 위숙의 집은 방촌리에 있었고, 옥봉이 말한 고헌(高軒) 즉 ‘높은 누각’은 ‘장춘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동일한 제재나 소재를 두고 옥봉과 기봉의 시가 병기되어 나온 것은 이 시들이 처음이다. 그래서 이 두 시에서 기봉과 옥봉의 시가 비교되기도 한다. 여기서 옥봉 시는 서정성(抒情性)이 돋보인다. 대신 기봉의 시는 완숙미가 두드러진 데다 지성적(知性的)이다. 둘의 시 세계의 성향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를 지을 당시 옥봉은 아직 어린 나이-15세 전후-로 나이 들지 않았다는 점을 접어두고 본다 해도 둘의 시 세계의 지향점만큼은 분명히 달라 보인다).

위의 시로 보아 옥봉은 방촌의 위가(魏家)의 가풍에 반했을 것 같아 보인다, 송라(松蘿), 고헌(高軒-높은 정자 마루), 소매(小梅) 등으로 꾸며진 집안의 품격에 혹했을 듯도 싶다. 여기에는 당대 옥봉이 가장 존경하는 기봉 형과 함께 동년(同年)의 진사시에 합격했던 위숙(위곤)의 풍모며 덕망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병기된 기봉의 시에서 곤(鯤)을 곤(袞)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취기 속에 하룻밤을 유숙토록 했을 것이며, 이때부터 위곤의 첫째 아들로 동갑이었던 위덕홍을 비롯 덕홍 형제들과 교유도 자연스레 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분위기여서 집안에 가득한 소매 향에 취해 달뜨기를 기다렸을 것이며, 옥봉의 시에서 그러한 옥봉의 심사가 고스란히 전해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위곤의 다섯 아들 중에 옥봉이 쓴 시는 첫째인 위덕홍(魏德弘,1537~16069(자 사임), 셋째인 위덕관(魏德寬)(자 이율)이었다. 위사임과는 동갑이었고 위이율은 10년 연하였다.

이들 두 사람에게 쓴 옥봉의 시를 보자.

위사임 집을 제재로 삼아 지어 부치다 奇魏士任家

사립문에는 손님도 없으니 (청)태전만 무르익고 / 柴門無客長苔錢

산에 가득 꽃이 피고 달빛 그득할 때 / 花滿山時月滿川

기다리게 가장 훌륭한 밤을 맞추어 내가 찾아 가리 / 好待吾行最良

푸른 언덕 깊은 곳에 두견 울음소리 들을 테니 / 碧巖深處聽啼鵑

ⓒ峯詩集上/詩/五言絶句

*위사임(魏士任) : 앞의 시에서 나온 ‘위곤(魏鯤)’의 장자인 위덕홍의 자.

*태전(苔錢) : 직역으로 ‘동전 모양으로 생기는 이끼. 모듬 이끼. 그러나 여기서는 ‘청태전(靑苔田)’을 의미한다.

위사임의 집은 바로 그의 부친 위곤(魏鯤) 집이기도 하다. 옥봉은 기봉 형과 함께 위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동갑이던 위사임과 교유했고, 함께 술도 마시며(그때 옥봉은 취했었다) 하룻밤 유숙도 하고 많은 대화도 나누며 아주 친해졌을 것이다.

1구 “사립문에는 손님도 없으니 (청)태전만 무르익고 柴門無客長苔錢”는 옥봉이 기봉형님과 함께 방문했을 때 사립문에 매달아 놓은 장흥의 전통 차인 청태전을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개 이 태전을 ‘모듬 이끼’ ‘동그란 이끼’ 등으로 이해(번역)하는데, 이것은 장흥의 전통차인 청태전이다. 즉 푸른 이끼가 낀 둥그런 엽전처럼 생겼던, 떡차, 돈차로 불렀던 차였다. 예전부터 장흥지방에서는 엽전 형태로 뭉쳐져 있는 이 차를 물에 우려서 마셨다. 그래서 옥봉은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청태전을 달여 마실 일이 별로 없을 테니 청태전만 묵어 있을 것이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리라.

낭만적인 시인이었던 옥봉은 그때 방문을 기억하며, 산에 들꽃이 가득 피며 달빛이 냇물에 비치는 그런 정취 가득한 밤에 찾아가겠다고 친구에게 전언하고 있다. 둘 사이에 상당한 교감과 공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해주는 시다.

위이율(위덕관)에게 주다 贈魏而栗

매화꽃이 피는 걸 살피지 않았다가 / 不省梅花發

자네가 찾아 와 병중이 데도 문을 나섰네 / 君來病出門

봄 산에 하루해도 이미 저무는지라 / 春山日已晩[

술잔 다하자 할 말을 잊어버렸네 / 杯盡却忘言

ⓒ峯詩集上/詩/五言絶句

*위이율(魏而栗) : 위덕관(魏德寬,1547∼1628)의 자이다.

이 시에서 나오는 위이율은 위곤의 다섯째 아들로 정명(正名)은 위덕관(魏德寬)이다. 위덕관이 옥봉을 보러 영암의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옥봉은 병중이었음에도 봄을 맞은 산 속에서 해가 저물도록 병든 제 몸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우의와 흥취에 젖어 함께 흠뻑 술을 마셨고, 술을 다 마신 뒤에는 서로 할 말이 없게 된 채 그냥 있었다는, 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게 하는 시다.

옥봉이 1537년생이므로 옥봉은 운암 위덕관의 10년 연상이다. 그런데 운암이 직접 옥봉을 방문한 것을 보니, 나이와 상관없이 두 사람은 자주 교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훗날 운암은 부산면 기동리로 이거하여 은둔한다. 이는 아마 기동리 아랫마을인 부춘리의 용호·청영정과 연결되는 옥봉과의 깊은 인연이 동기가 되었을 듯싶다. 유독 부춘리의 예양강을 용호로 부르며 애착을 가졌던 옥봉에 대한 추억이며 기억들이 운암으로 하여금 바로 부춘리 윗마을인 기동리 용호 변의 석대에서 머물게 하며 시를 읊게 했을 것을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이다.

‘경호정중건기(鏡湖亭重建記)’에 “…(운암공은)… (부산면) 기동리로 오셔서 동네의 산수가 아름다워 즐기다가 눌러 사시게 되었다. 언제나 강변의 석대(경호대 자리) 위에서 바람을 쏘이며 시를 읊으셨다. 표연히 자연의 변화를 따라 사니, 증점(曾點)의 무우(無憂) 생활 같았고, 담담하게 세상을 잊은 삶은 하지장(賀知章)의 경호 생활 같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부춘리 바로 윗동네인 기동리 강변에서 유유자적했을 운암의 삶에서 옥봉의 삶이 겹쳐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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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흥 위씨는 15세 통선랑공(通善郞公) 휘 덕룡(諱 悳龍) 대에 이르러 자온(自溫자량(自良자공(自恭자검(自儉)의 네 아들을 두면서 상계 분파가 되고 21세 때 다시 한 번 크게 분파 된다. 이중 장천문중’, 또는 장흥파, ‘평화파로도 불리는 당동·방촌리 중심의 관산파의 상계파는 자량파(自良派)이다. 자량파는 18세 때 유형(由亨)으로 이어지고, 19세 때는 진보(晉寶진수(晉秀진현(晉賢) 3파로 갈라진다. 그리고 이중 관산파의 비조로 불리는 진현(晉賢,14831564) 대에 이르러 형 진수(晉秀)의 차남 곤()을 입양되면서 계대가 이어진다. ()5형제를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판사(判司청계(聽溪운암(雲巖판서(判書안항(顔巷) 등 오덕파로 갈린다.

2) 군자감(軍資監) : 조정 운영에 필요한 미곡 등 각종 물품[軍需儲積]들을 관장하는 정3품 아문.

3) 부호군(副護軍) :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둔 종사품(從四品) 서반 무관직. 부호군은 현직을 떠난 문()()음관(蔭官)잡직(雜職) 등이나 타직(他職)에서 거관(去官)된 자에게 녹봉(祿俸)만 주기 위해 만든 벼슬이었다.

4) 기봉 큰 선비는 옛 시선(詩仙)으로 / 오차현에서 남긴 시편이 하늘을 울렸네 / 드넓은 강하가 3만리에 있고 / 산악이 그대로인 것이 몇 천 년이나 되던가 / ()나라 백성들은 닭과 개가 우는 도화(桃花)속에 사는데 / 뾰족한 언덕의 인가는 물 억새의 설()가에 사네 / 그대가 장춘대 위에서 기록한 일은 / 일시에 서적이 다 없어졌으니 (장충대를 통해) 후세에 전해지리라. 岐峯大士古詩仙, 烏次遺篇響入天, 有闊江河三萬里, 不崩山岳幾千年, 秦民鷄犬桃花裏, 剡岸人家荻雪邊, 君記長春臺上事, 一時圖盡共流傳. (ⓒ『천년가학 방촌학1, 위의환, 2009. 35)

5) 위곤(魏鯤)은 명종(明宗) 4년 즉 1549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 3(三等)’으로 급제했고, 백광훈은 같은 해 식년시에서 ‘1(一等) - 2를 차지(이후 기봉은 1552년 식년 문과에도 을과로 급제했다), 둘은 동년의 과시 동급생이었다.

6) 김기홍 외, 문림의 향기, 장흥군, 2016, 26.

7) 하지장(賀知章,659~744) : 현종을 섬겼던 당나라 풍류시인. 하지장이 은퇴하여 고향 회계로 돌아가자 현종이 절강성 소홍 북쪽에 있는 경호(鏡湖)와 섬천(陝川) 일대를 그의 식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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