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아, 예양강(16)/옥봉과 예양강(12) - 옥봉 백광훈과 장흥 사람들(1)- 옥봉의 3형제
■기획 - 아, 예양강(16)/옥봉과 예양강(12) - 옥봉 백광훈과 장흥 사람들(1)- 옥봉의 3형제
  • 김선욱
  • 승인 2023.08.3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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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공 아무에게나 물어보게, 그들이 손에 꼽는 영웅이란 진정 누구인지

미인들은 관서별곡 부를 줄 알 것이다 …(기봉 백광훈이 진정한 영웅이었소)

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김선욱/ 시인. 본지 편집인
▲옥봉 3형제을 배향한 안양면 기산리 기양사

 

 

 

 

 

 

 

 

 

 

기양사 현판

<지난호에 이어서>

한 달에 3번을 고향 장흥을 찾아가는 일은 그의 삶에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동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옥봉은 시업(詩業)과의 동행에 이어, 장흥과의 동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리하였지만, 이 일을 연보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고향방문을 지속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열흘마다 고향 방문하는 일을 제 삶의 순리처럼 수용한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었기에 60여 수에 이르는 장흥 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흥과의 동행, 그것은 옥봉에게는 피 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옥봉은 그 운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기에 장흥은 옥봉의 시문학에서 중요한 산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옥봉의 장흥 행보는 고향마을인 안양면 기산리와 동계마을, 보림사와 청영정이 주된 행보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장흥 관련 시들이 동계마을, 예양강, 청영정과 용호, 보림사 관련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데서 이런 사실을 유추하게 된다. 즉 당시 옥봉의 행보는 장흥부와 안양면 기산리를 경계로 장흥 북부에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옥봉의 장흥 시 중 남부권역에 속한 시로는 ‘회진 임감역에게 주다 會津贈林監役滉’, ‘사준 스님이 천관산 스님의 시축을 가져와 시를 지어달라고 해서 思峻 持天冠山僧試軸 來求詩’, 위숙 댁에서 형님의 운을 따라 짓다 魏叔宅 次伯氏韻, 위사임의 집을 제재로 삼아 지어 부치다 魏士任家, 위이율에게 주다 贈魏而栗) 등 5수 정도였다.

당시 옥봉의 장흥행보는 말을 타고서였다. 특히 말을 타고 가는 행보에서 강은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만나는 자연물이었다. 예양강도 그랬다. 그의 시에 유독 강과 관련된 시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옥봉에게 사찰은 사찰 자체만으로도 시작(詩作)의 중요한 소재였을 것이다. 더구나 옥봉은, 그의 성향도 기인하였겠지만 본시 관리가 아닌 야인이요, 시인이었기 때문에 유학자이면서 시인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가 교유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리들 보다는 처사의 선비들이고 승려들이 태반이었다. 그의 시중 사찰 관련의 시나 스님들과 교유한 시들이 많은 점도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보림사는 천년 고찰로서 장흥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옥봉에게 장흥 행보에서 찾아갈 만한 곳은 보림사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또 보림사 행보 중에 반드시 거치게 되는 부산면 부춘리의 청영정은 그가 즐겨 찾는 강변의 정자였고, 중간쯤의 휴식처로서로 최적지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림사를 오가는 중에 만나는 예양강과 청영정과 용호 관련의 시들이 많았을 것이고, 바로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시도 많았을 것이다.

옥봉의 장흥 사람들과 교유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보통 장흥 사람들이 대충 알만한 인사들은 문위세, 문희개, 백광성, 임회, 유호인, 조희문 등이다. 그리고 거의 무명인이지만 옥봉과 절친으로 지낸 사준 스님 등이 있다. 이들 중 몇 분을 대표하여 소개한다.(앞에서 문위세, 문희개, 백광성, 임회 등은 부분적으로나마 소개된 바 있어 여기서 생략한다.)

1. 기봉 광홍, 풍잠 광안과 옥봉

기봉과 풍잠, 옥봉 3형제에 대한 내용부터 살펴보자.

기봉은 1522년생, 광안은 1527년생, 옥봉은 1537년생이다. 옥봉은 장형 기봉의 15세 연하, 중형 광안의 10세 연하이다.

먼저 기봉과의 관계이다.

문헌상 『옥봉집』의 연보에 나오는 것으로는 “1553년 옥봉의 나이 17세 때 ‘백형 백광홍(당시 32세)을 따라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에게 수학하다”가 유일하다. 그 무렵 기봉은 1549년(28세)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으며 그해 11월 반궁(泮宮)에서 본 문신 시험에서 ‘동지부(冬至賦’로 1등하고 1553년(32세)에는 호당(湖堂)에 뽑히기도 했던, 아주 잘 나가던 때였고 옥봉은 약관이 되기도 전인 17세 때였다.

옥봉은 형인 기봉에 대한 시를 짓지 않았다. 아마 아버지처럼 존경하였을 형님에 대하여 감히 쉽게 언급할 마음이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타 문헌에는 나오지 않지만, 『옥봉집』에서는 기봉 관련된 시 2편이 나오고 있는데, 이 시들도 실은 기봉 형을 제재(題材)로 지은 시는 아니다. 기봉 형과 관련된 그 시는 ‘보림사에서 사상사를 차운하여 寶林寺 次徐上舍’와 ‘관서로 떠나는 작별하는 최고죽에게 주다 贈崔孤竹關西之別’인데, ‘보림사에서 서상사…’ 시는 시 주석에서 “옛날 큰 형과 더불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舊與伯氏 讀書于此”고 돼 있을 뿐이다. 이는 옥봉이 예전에 이곳 보림사에서 형과 함께 책을 읽었다는 사실, 그때 아마 서상사도 함께 그 독회(讀會)에 참가하였을 것이고, 그 독회에서의 인연이 서상사와 교유하게 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시이다.

또 ‘최고죽…’ 시 역시 기봉에 대한 시라기보다는 최고죽(최경창)과 작별하며 주는 시인데, 중간 부분에서 기봉 형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어 기봉 관련의 시로 분류했다.

‘보림사에서 서상사…’ 시는 내용에서 형에 대한 업급이 없으므로 기봉이 나오는 ‘관서로 떠나는 최고죽…’ 시를 보자 이 시는 옥봉이 절친 최고죽이 대동찰방(大同察訪)이 되어 관서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 쓴 시로 보인다.

당시 고죽은 39세 되던 1577년 가을 평안도의 대동도(大同道) 찰방(察訪)으로 복직한다. 그리고 1580년 봄에 고죽을 만났고 관서로 떠나가는 고죽에게 ‘관서로 떠나며 작별하는 …’시를 쓴 것이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옥봉은 1577년(41세)에 선릉 참봉(宣陵 參奉)이 되었다가 전주 영전 참봉(參奉)을 거쳐 1578년(42세) 정릉 참봉이 된다. 그리고 1580년(44세) 8월에 박순(朴淳)의 천거로 ‘예빈사참봉 겸 주자도감감조관’이 된다. 그러므로 옥봉이 고죽을 만났을 때는 정릉 참봉이었을 때였다. 이때의 옥봉이 자신의 사정을 밝힌 내용이 ‘관서로 떠나며 작별하는 …’ 서두에 나온다.

“1580년 봄, 옥천자(玉川子:옥봉 자신을 말함)는 한양 땅에 집을 장만하여 들었다오 / 적은 봉급이라 배고픔에서 아직 벗어나진 못하였고 / 돌아가서 농사를 짓겠다며 날마다 태어나서 자란 마을을 생각하고 / 집을 나서면 (아직) 친하게 갈 곳도 없고 / 어려서 알던 두 셋사람이 있긴 하지만 / 열흘 한 번 언제 얼굴이나 본 일이 있었던가? / 밤 깊으면 그 생각에 서너 번 씩 탄식한다오. / 그대도 세세히 알겠지만 만사(萬事) 인력으로 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는 / 잠깐의 회호리 바람에 능하던 것도 사방으로 흩어져가버리는 거요 / 선옹(仙翁) 송강(松江)은 강원도 관찰사로 떠난 지 며칠 됐다오 / (이제) 자네도 이번에 또 관서 향해 가는 건가요? … 萬曆八年春, 玉川子寓居洛城裏. 薄祿不披飢. 歸耕日日思田里.出門無所親. 竹馬二三人. 十日何曾一見顔. 中夜念之三四歎. 乃知萬事非人能. 須臾飄散之四方. 仙翁東去曾幾日. 夫子又此關西行.)

이 시에서 옥봉은, 뒤늦게 관리(참봉)가 되었지만 한양의 관리로서 삶이 힘들고(적은 봉금으로 배고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쉽게 적응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관서로 떠나며 작별하는 최고죽에게 주다 贈崔孤竹關西之別’의 시중 기봉 형님에 대한 시를 보자. 이 시는 ‘관서로 떠나는…’ 후반부에 나온다.

1580년 봄 / 萬曆八年春 …

연광정(練光亭) 아래로 흐르는 대동강이 푸르고 / 練光亭前浿江碧

백상루(百祥樓) 저 밖에는 묘향산 향로봉 빼어나요 / 百祥樓外香爐秀

배를 대고 쉬는 사공 아무에게나 물어 보게 / 便思往問艤船子

손에 꼽는 영웅이란 진정 누구인지 / 屈指英雄定誰是

미인들은 관서별곡 부를 줄 알 것이다 / 佳人解唱關西曲

(형님이 평안도 평사로 그곳에 근무할 적에 이 별곡을 지으셨다)(伯氏佐幕時.留此曲)

역부들도 아직까지 그 당시 일 말할 것이다 / 郵僮尙說當時事

봄바람 속에 그 노래를 들으면 훨씬 처연(凄然)할 것이요

(형님께서 불운으로 가신 지) 흐르는 물과 뜬구름처럼 30년이 흘렀소

자네도 그때 일은 특별하였으니 생각이 날 거요마는 / 知君此時偏相憶

생각이 간절하여 글을 지었는데 ‘밝은 달(明月)’이라는 시(2편이)요 / 相憶應題明月篇

밝은 달이 먼 동쪽 바다에서 솟으리니 / 明月遙從東海出

(동쪽으로 떠난 송강) 선옹(仙翁)은 가더니만 편지를 툭 끊었으니 /仙翁去後音書絶

내년 풀빛이 돌 때에 돌아오는 좋은 일이 있으려는가 / 明年草綠好歸來

문득 선옹(仙翁)을 소리내 부르고는 술을 연달아 마신다 / 却喚仙翁重擧杯

술잔을 들어 밝은 달에 권하오니 / 擧杯勸明月

다시는 이별하는 자리 비추지 마시오 / 莫更照離別

강과 산은 사람을 배반하지를 않고 / 江山不負人

꽃이며 버들도 예전의 봄을 맞이할 거니 /花柳依舊春

대취하여 한양의 거리에서 한껏 노래를 불러보세 / 大醉高歌洛陽陌

사람들 쏠림대로 몸을 맡기며 소리쳐 부르며 정녕 미친 객(客)이라 부를 만큼 / 從他喚作眞狂客

ⓒ『玉峯集』下/詩/七言古詩

*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연호. 만력 8년이면 1580년이다.

*옥천자(玉川子) ; 노동(?~ 835 唐)은 제남 사람으로 일찌기 산 속에 은거하며, 스스로 옥천자(玉川子)라 불렀다. 가정 살림이 빈곤해 오직 책을 벗 삼아,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벼슬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차(茶)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 시에서 옥봉은 스스로를 옥천자(玉川子)로 칭했다.

*의선(艤船) : 물가에다 배를 대는 행위를 말한다. 의선자(艤船子)은 뱃사공을 말한다. *연광정(練光亭) : 평양의 대동강가에 있는 정자이다. 평양성 대동문(大同門) 옆의 대동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덕암(德巖) 위에 있다. *패강(浿江) : 대동강의 별칭 *백상루(百祥樓) : 평안남도 안주에 있다. *향로(香爐) : 묘향산 향로봉(香爐峯) *우동(郵僮) : 역마(驛馬)를 끄는 하인. *흐르는 물 뜬구름에 30년이 지났건만 流水浮雲三十年 : 기봉 형님이 1556년에 별세했고 이 시를 쓴 때가 1580년이므로 정확히 기봉 사후 25년째이다. 25년이므로 반올림하여 30여년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늘 반올림을 해댔다. *‘밝은 달(明月)’이라는 시(2편) : ‘명월(明月)’ 제목으로 쓴 칠언절구 시와 오언절구 시를 가르킨다. 칠언절구 시는 동쪽(강원도)으로 간 친구 송강이 소식도 끊겨 송강을 그리며 술을 마신다는 내용의 시고, 오언절구 시는 고죽이나 송강이나 이별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은 시다. 그리고 절구로 다시 만나면 함께 대취하여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쓴 시다.

기봉에 대한 내용의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옥봉은 형님을 영웅시하고 있었으며, 당시 관서지방에는 기봉의 관서별곡이 여전히 널리 30여 년이 다 되도록 가인들에 의해 불러지고 있었고, 관서는 기봉 형의 근무 현장이었으므로 최고죽이 기봉 형을 더욱 그리워할 것이라고 옥봉이 생각하였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시 결구에서 칠언절구, 오원절구로 쓴 시는 이 시를 지을 당시, 옥봉은 절친인 최고죽과 이별하는 심사에 더해 기봉형님에 대한 추억까지 겹쳐있어 그 심사가 어떠했을까는 능히 짐작하게 해 준다.

기봉은 청주김씨(淸州金氏-訓導 金夢寅의 女)와 부안김씨(扶安金氏-監役 金世柱의 女)의 두 부인이 있었다. 첫째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둘째부인 부안김씨에게 아들 백붕남(白鵬南,1540〜)과 여식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 붕남이 16새 때 기봉이 별세하며, 자식들에 대한 후사가 막막해졌다.

그런데 장희구‧김성기 등은 이에 대해 “기봉의 요절 후 그의 후사(後嗣)인 붕남과 그의 누이는 숙부(옥봉)의 도움으로 옥천의 집에서 자라고 입장하여 성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옥봉가에서 기봉의 아들 붕남과 누이의 성가(혼인)를 시켰다면 옥봉의 아들 백진남의 일이기도 했을 텐데, 백진남의 연보며, 묘갈문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없다. 다만, 백진남의 묘갈명에 “…송호(松湖) 공(公)의 큰아버지인 백광홍(白光弘)의 딸 (선세휘) 친사촌 누이동생의 아들인 선세휘(宣世徽,1582-?미상)가 과시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집으로 돌아와 송호(松湖) 공(公)을 배알하러 오자 송호(松湖) 공(公)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公之從妹子 宣世徽 卽其一也 得魁科 歸謁公 公閉門不納 ”(『장암집(丈巖集)』/松湖白公墓碣銘 幷序)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옥봉이 기봉 형의 후사에 대해, 책임감으로 많은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을 해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형인 풍잠(風岑) 백광안(白光顔, 1527〜1567)은 주치상(朱致祥)의 여식과 혼인하면서 처가인 화순에서 기거한 것으로 알져졌다. 풍잠 역시 뛰어난 문장가로 살았으나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고 풍류의 삶을 살았다. 모친이 1545년(풍잠이 18세 때, 옥봉이 8세 때 별세) 일찍 별세하는 바람에 아버지께 효를 다하였고 풍류치에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였다고 알려졌다.(풍잠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별로 없다). 풍잠 역시 기양사에 배향되었다. 화순과 광주 운암동 일대에 거주하는 백씨들이 광안의 후손들이다.

옥봉과 중형인 풍잠과 관련된 기록이 『옥복집』 연보에 나온다. 옥봉의 별세하던 46세 때(1582년)의 기록이다.

또 둘째 형님께 보낸 편지를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아우가 8월 완산(完山)의 만남을 힘들게 고대하는 것은 적으나마 결혼비용에 보탬을 얻어 조카딸을 시집보내는 거지요. 늘 아내가 병중이므로 하루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여기서 살 수 없으니 이 또한 운명이겠지요. 봄이라 산에는 고사리가 나니 더욱 사람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물처럼 흐르지만 대체 어찌, 어찌하리오까.”

또 둘째 형님(중형)께 보낸 편지를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봄에서 여름 사이에 있을 혼사(婚事)가 정해지면 곧 회령(會寧)에서 나오는 세(租)가 열 가마이니 (중략) 기간이 되면 보내게 하여 이것으로 일체의 준비를 돕도록 하자는 거지요. 매우 다행인 것은 아직 두 조카딸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밤낮으로 생각을 거듭해봅니다. 혹여 한 시라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당사자들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니 이런 사소한 알림이 있는 거지요. 굳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을 말씀드리는 거로군요. 사람을 얻어야 기약도 정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저 열 가마의 가용할 수 있다는 것 외에 또 그 밖에 방해할 것이 뭐겠습니까? 결코 어지러움 속으로 향하려는 것이 아니고 좋은 곳에 가져다 쓰려는 것입니다.

-ⓒ『옥봉별집』/후서 삼하/부록/연보

옥봉이 풍잠 형에 보낸 것으로 보인 이 서한에는 옥봉이 풍잠의 여식, 즉 조카딸의 결혼 때 쓰일 세 열가마(租十石)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옥봉의 형에 대한 애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서한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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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림사에서 서상사를 차운하여-옛날 큰 형과 더불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寶林寺次徐上舍-舊與伯氏 讀書于此 : 백년 삶에 그 몇 명 쯤 마음 속의 사람들을 百年多少意中人 / 입만 열면 만나자고 하다 이 봄을 맞았는데 開口相逢到底春 / 이별한 정 얘기하며 오직 술만 있다면야 話得別情唯有酒 / 귀향의 흥에 검은 두건 뒤지집혀도 괜찮겠지 不妨歸興倒烏巾(*귀흥歸興 :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을 이른다. *오건烏巾 :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사는 자가 쓰는 검은색의 두건을 말한다. () : 한 잔 술로 저승 간 사람 불러오긴 어려운데 一杯難喚九原人 / 풀 섶에 묻힌 외로운 무덤 벌써 몇 봄 보냈는가 草沒孤墳已幾春 / 비바람 속 그 광산에 풍경만은 남았건만 風雨匡山餘物色 / 오늘 그대 마주하며 다시 두건을 적시네 對君今日更霑巾(*九原구원 : 九天구천, 저승. * 광산匡山 : 중국 성도부成都府 창명현彰明縣 북쪽에 있는 대광산大匡山으로, 당나라 이백李白이 젊었을 때 글을 읽었던 곳이다. 두보杜甫가 성도에 가서 이백을 그리며 지은 불견不見의 시에, “글 읽었던 이곳 광산에, 이제 늙은 그대여 돌아오구려. 匡山讀書處 頭白好歸來하였는데, 흔히 소년 시절에 글을 읽었던 곳을 가리킨다.)-玉峯詩集上//七言絶句

2) 장희구, ‘기봉 백광홍의 시문학 연구’, 박사학위 논문, 59.

3) 김성기, ‘백광홍의 관서별곡과 기행가사’(기봉 백광홍학술 발표회), 78.

4) 여기서 중형은 풍잠(風岑) 백광안(光顔, 1527~?)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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