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절의록』에 출전된 마하수
-“공(이순신)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
마하수(馬河秀), 자(字)는 선천(先天). 호(號)는 주촌(舟村). 본관은 장흥(長興). 충정공(忠靖公) 천목(天牧)의 후손이고 부사직(副司直) 인서(麟瑞)의 아들이다.
성질이 효성스러웠고 절조를 숭상하였다. 남계(南溪) 김윤(金胤)에게서 수업하였는데 김공이 무예를 익히도록 권하였다. 명종 19년(1564) 무과에 급제하고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다.
임진란(1592) 때 아버지 사직공(司直公)이 적에게 해를 당하니 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할 것을 맹서하였다.
정유란(1597) 때 이충무공을 회령포(會寧浦)에서 만나니 이공(이순신)이 고을의 여러 배들을 모아 후원을 해주도록 요청하므로, 공은 “마땅히 공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남자는 비록 흰머리가 되어도 마음은 건장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문연(文淵 : 마원 馬援)의 “말가죽으로 시체를 싼다(馬革裹尸).”라는 구절의 것이다.
공은 이후, 백진남(白振南)·정명열(丁鳴說)·문영개(文英凱 등 십여 사람과 함께 먼 바다에 배를 늘어놓고 마치 군선(軍船)처럼 보이게 하여 명량(鳴梁) 싸움에 응원하였다. 공이 고을의 배들(향선 10여 척)을 모아 외양(外洋)에 배치하고 바라보니 이공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으므로 칼을 빼어 들고 “대장부가 죽는도다.”하고 두 아들 성룡(成龍), 위룡(爲龍)과 함께 포위망 속에 깊숙이 들어가 힘껏 싸우다 탄환을 맞고 죽었다.
『연경재전집』 독부충의전(督府忠義傳)
馬氏家狀 장부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마하수(馬河秀)는 장흥(長興) 사람이다. 선공감(繕工監) 주부(主簿)였다.
정유년에 바다에서 수병으로 전란의 피해를 모면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고 들었다.
기쁘게 말하길, “이젠 우리들이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회령포(會寧浦) 출전하였다..
이순신이 신(臣,마하수)에게 말하길, “그대가 군향리(君鄕里)에서 소유한 병선(兵船)이 얼마나 되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공(마하수)은, “10 여 척이다.”라고 하였다.
마하수가 다시 말하길, “제가 후원하겠습니다. 군용(軍容)을 보충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백진남(白振南),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백선명(白善鳴 : 백진남의 자(字)가 백선명이므로 백진남과 백선명은 동일인. 여기서는 誤記)),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정명열(丁鳴說) 등이 각각의 배로 모여들었다.
왜군과 전쟁이 명량(鳴梁)에서 시작되었다. 마하수는 바다 밖(전투현장의 외곽)에서 진을 쳤다. 그러던 중 이순신이 왜군의 배로 포위된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칼을 뽑아 소리치기를 “장부(丈夫)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고 하였다.
두 아들 성룡(成龍)과 위룡(爲龍)도 함께 왜군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힘써 싸운 지 한참 만에 (마하수는) 왜군의 탄환을 맞아 순절하였다.
『충무공전서』의 마씨가장(馬氏家狀)
-내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아할 때다
마하수는 장흥(長興)이다. 관선공 주부(官繕工主簿)이다.
정유년(丁酉年) 이다. 배 한 척을 준비한다. 바다 가운데 난을 피한다.
들으니, 이통제(李統制) : 이순신)이 복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우리들이 어찌 근심하겠는가!”
마침내 회령포(會寧浦)로 가서 이공(이순신) 앞에 엎드렸다.
이공(李순신)이 말하기를, “칼날을 무릅쓰고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였습니다. 공이 소유한 고을에서 모은 피란선(避亂船)이 몇 척인가요?”
공이 “10 여척은 됩니다.” 하였다.
이공(李公)이 말하길 “공이 향선을 모아 저를 후원해주십시오. 군용(軍容), 즉 군대의 위용을 보여준다면 큰 도움이 안될 리 없습니다.”
공이 말하길, “제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마땅히 이공과 생사(生死)를 함께하겠습니다.”
이공이 공을 극력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공이 이공으로부터 불러났다. 이때 공이 시(詩)를 지었다.
예(禮)·악(樂)·의관(衣冠)이 바른 성스러운 나라 / 禮樂衣冠聖祖基
추악한 오랑캐 쳐들어오니 어찌 말 달려가지 않으랴 / 那令醜虜肆驅馳
남아의 머리가 희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굳세도다 / 男兒白首心猶壯
정히 문연(文淵)처럼 전쟁터에 나가 죽음을 맞이할 때이다 / 正是文淵裹革時
이때 백진남(白振南)과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백선명(白善鳴=白振南과 동일인),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등 10여 명이 각각 피란선(避亂船)을 가지고 와서 모여들었다.
정명열(丁鳴說) 또한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공(정명렬)이 와서 공을 보고서 말하였다.
“우리들은 평소에 쌓아 온 것(충성심)이 있습니다. 오늘에 이를 사용하는 것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들으니, 이통상(李統相, 이순신)이 지금 피란선(避亂船)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우리는 먼 바다에 열을 지어 군대같이 가장하는 의병(疑兵 : 의문의 병사)이 된다고 합니다. 기회를 틈타 일제히 진군해야 합니다. 즉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군해야 합니다. (승기勝氣는) 오직 이 한 번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였다. “제 마음은 이미 확고히 정해졌습니다.”
명량의 전장이었다.
향선 10여 척은 이전과 동일하다. 공은 외양(外洋)에 진을 쳤다.
이공(이순신)이 왜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공이 칼을 뽑아 들고 외친다. “장부에게 죽음이 있을 뿐이다!”
두 아들 성용(成龍)과 위룡(爲龍)도 함께 적진을 행해 돌격하였다.
한참 동안 힘써 싸웠다. 그러나 공은 기어이 적의 탄환을 맞아 전사하였다.
성룡(成龍), 위룡(爲龍)이 시신을 배 안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적은 이공(이순신)에게 크게 패하였다. 적은 군사를 데리고 달아났다.
더 이상 시행할 것이 없었다.
이상이 마씨(馬氏)의 가장(家狀)이다.
…▶『湖南節義錄』, 壬辰義蹟, 忠武李公舜臣同殉諸公事實 ▶『충무공전서』의 마씨가장(馬氏家狀) ▶『硏經齋全集』 권61/蘭室史料四 /督府忠義傳의 원문(한문)은 지ᅟᅧᆫ과계상 생략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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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원(馬援) : BC 14∼AD 49. 중국 후한(後漢)의 정치가이자 무장. 자는 문연(文淵). 티베트족의 정벌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정벌 등에 공이 많았다. 45년 흉노와 오환(烏丸)을 토벌하러 출전하였으나, 열병으로 고전하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2) 마하수의 시(詩) 본문엔 ‘문연과혁시지구(文淵裹革時之句)’라 나오는데 여기사 ‘시(時)’ ‘시(尸)’의 잘못으로 보인다. 마원(馬援)이 지금의 월남인 교지(交趾)지방을 평정하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니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는데 그중의 맹익(孟翼)이란 사람에게 “지금 흉노와 오환(烏桓)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裹尸還葬耳].…”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혁과시’란 말가죽으로 시체를 싼다는 뜻으로,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죽겠다는 용장(勇將)의 각오를 비유하는 말이다.-『후한서(後漢書)』(권53 列傳, 제14 馬援傳).
3) 군용(軍容) : 군대의 상태. 주로 사기(士氣)나 기율(紀律), 또는 군대의 위용(威容)이나 장비 등을 뜻한다.
4) 성조기(聖祖基) : 성스러운 나라의 터전이다.
5) 문연(文淵,BC14∼AD49) : 마원馬援이고 그의 자가 문연文淵이다. 티베트족의 정벌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정벌 등에 공이 많았다. 45년 흉노와 오환(烏丸)을 토벌하러 출전하였으나, 열병으로 고전하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6) ‘正是文淵裹革時’는 ‘正是文淵裹革尸’의 잘못이다. 앞의 ‘주석3), 주석4)’ 참조
7) 파죽지세(破竹之勢) : 진(晉) 무제(武帝)가 오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대장군 두예(杜預)가 작전회의서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 마치 대나무를 쪼갤 때의 맹렬한 기세(破竹之勢)와 같다. 대나무는 일단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말했다. 이어 두예는 곧바로 군사를 재정비해 글자 그대로 파죽지세처럼 단숨에 오나라 수도를 함락시켰다. -『진서(晉書)』 이처럼 파죽지세는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세력이 강대해 상대를 거침없이 물리치는 형세를 일컫는다. 오늘날에는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거나 처리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세여파죽(勢如破竹)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