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사설 - 천방(天放) 선생의 ‘경의설(敬義設)(2)
202호 사설 - 천방(天放) 선생의 ‘경의설(敬義設)(2)
  • 김선욱
  • 승인 2023.10.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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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매한 선비정신, 정도(正道)의 군자도(君子道) 실천한 장흥의 사표(師表)였다

“…진사에 급제한 후에는 스스로 과업(科業)을 버리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고 성현들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경전(經傳)에 깊이 빠져 연원을 찾아 헤매다가 갑자기 스스로 깨닫게 되면 그 즐거움에 끼니도 잊어버렸다. 특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좋아하여 주야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장구(章句)와 주석(注釋) 사이의 한 글자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조금의 의문이나 거리낀 곳이 있으면, 이불 속에서도 깊이 생각하다가 불현듯 깨달아지면 기뻐서 기록해 두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이는 바로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자(朱子)의 학문을 종(宗)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 공(천방)의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은 나이 들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생도들을 가르침에도 언제나 싫은 기색없이 온화하였다. 비록 처음 배우는 어린 학동이라도 차근차근 잘 가르쳐서 단시일에 깨우치게 하니, 원근의 향리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무려 수백 인이었다. 근래에 향학(鄕學)의 후진들이 바른 길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공의 영향이 아닌 것이 없으니, 유림사회에 주는 공로가 심히 크다 할 것이다.

…(공은) 일찍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조상에 대해 불효라고 늘 한탄하다가 1570년, 68세 때 선영 곁에 초가집을 짓고 몸소 벌초하고 눈 쓸기를 게으르지 않았다.( 『천방선생문집』 行狀, 정경달)”

“…이전에 고을 방백(方伯)이 찾아 온 것을 보니, 필마에 관졸 몇 명과 와서 시간을 보내는데, 담론은 학문을 나누는 얘기일 뿐이고, 단지 선물은 필묵(筆墨)과 종이묶음 만으로 예를 표하고 갔다. 내가 학도들에게 다른 방백들도 그러했느냐 물으니, “감히 예물로 쌀·베·금전 같은 것은 안 되고 만일 그러면 즉시 돌려보낸다”고 하였다.…“ (『천방선생문집』, 行狀 追錄,丁鳴說)

“천방 유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모님 베갯머리 머리에서 부채질하고(扇枕) 귤을 품어(懷橘)와 드렸는데, 이런 지극한 효성을 ‘하늘이 낸 천품’이라고 말하면서 인근 향리 등에서 효동(孝童)으로 일컬어졌다. …고문(古文)과 매월 과제로 내주는 경전 공부(課讀)에도 한번 열람으로 바로 외우고 종신토록 잊지 않으며, 말을 하면 문장(文章)을 이루어 사람들을 자칫 놀라게 하였다. 약관 20세 때 전심전력으로 독서하여 깊은 의리(義理)를 탐색하되 옛사람의 글을 따라짓는 일(尋摘)은 하지 않았다. 형상이 장대하고 훤칠하였고 언행이 바르고 엄밀하여 비록 어른의 서열에 있는 자라도 다 존경하는 벗으로 대해주었다.”

“만년에 선영 아래 집을 짓고 뜰 가에 고목나무를 취하여 두었는데 이름하여 신선옹(神仙翁)이라 하고, 그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고, 혹은 (세태를) 조롱하면서 호탕하게도 웃으니, 가히 그의 풍류(風流)를 알 수 있다. 평일에도 시문(詩文)을 지으면서 한가하고 느긋하게 읊지만, 세상의 가르침을 빗대고 돌려서 말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심학(心學, 陽明學)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더욱이 남(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고 간절하였으며, 채소와 물(蔬水)로 끼니를 이었어도 평온하였다.

…도백(道伯)의 천거로 두 번이나 침랑(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연하동 임천(林泉)의 요조헌(窈窕軒)에 기거하며 집안 좌우에 가득 쌓인 서책의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고 살았다. 도백이나 목사가 본 고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유 처사를 먼저 방문하였으나, 감히 병졸은 야박하지만 마을 앞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천방선생문집』천방 행장, 추록2, 위백규)

상기 예문들은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의 애제자인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반곡의 아들로 부친으로부터 천방의 학문을 전수받았던 정명렬(丁鳴說),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등 3인의 천방(天放)에 대한 증언들이다.

이들의 증언에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효도가 극진하였고, 만년에는 시묘살이로 유학의 근본인 효행(孝行)을 실천했으며,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더 이상의 과업(科業)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만년에 참봉 벼슬에 2회나 제수받고도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을 처사(處士)로 살았던 천방의 삶을, 그리고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던 ‘강직하고 고매한 성리학자요, 큰 선비로서’의 당대 지역사회에서 대표적인 도학자(道學者)였던 천방의 삶을 유추하게 된다.

또한 『대학』, 『중용』 등 성리학의 공부와 탐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특히 성리학의 심원이나 다름없었던 송대(宋代)의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주자(朱子)의 정통 유학의 학문을 종(宗)으로 삼아 성리학에 궁구(窮究)하였던 천방의 모습도 연상하게 된다.

또 당대의 지역사회의 큰 선비로서 도백(道伯)이나 부사(府使)등 관리들의 방문을 받을 때도 예물이나 선물은 ‘필묵(筆墨)과 종이 묶음(紙束)’만 받을 뿐 ‘쌀·베·금전 따위는 결코 받지 않았던 청빈(淸貧) 속의 참된 군자도(君子道)를 실천하고, (유학의) 가르침을 빗대고 돌려서 말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심학(心學, 陽明學)을 옳게 여기지 않았으며. 남을 가르침에는 간절하였고, 채소와 물(蔬水)로 끼니를 이었어도 평온하였던’ 강직한 선비요, 올곧은 유학자로서 당대 세상에서 최선의 정도적(正道的)인 삶을 궁행하고 실천했던 엄정한 생활상도 유추할 수 있다.

결론지어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러한 천방(天放)의 삶은 ‘경(敬)의 정신’의 수범적인 실천이었다. 경(敬)은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고(子曰修己以敬-논어)’, 또한 ‘군자는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君子敬以直內-주역)’ ‘경(敬)은 인간다움을 실현시키고 학문공부를 진정한 의미에서 추진시키는 내적(內的)인 정신(朱子)’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敬)의 가치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했던 천방(天放)은, 유가(儒家)의 실천적 수양론에서 내면(內面)의 가치관으로 제시됐던 ‘의(義) 정신’의 실천에도 철저했다.

특히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영향으로 ‘경의(敬義)’사상에 경도(傾倒)돼 있었던 천방에서 이러한 ‘의(義) 정신’의 실천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지당한 실천의 윤리였을 것이다.

의(義) 정신의 최선은 맹자가 설한 ‘생명과 의(義)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선택하는 것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이었다. 즉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선택해야 하는, 공(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발현되는 것이 바로 ‘의(義)의 정신’이었다.

“선조 갑술년(1574) 여름은 몹시 가물었다. 공은 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냈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록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았다. 공은 상소(上疏)를 하고 섶을 쌓아 그 위에서 스스로 분사(焚死)하려 하니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쏟아졌다 한다. 임금은 그 충효(忠孝)를 기리며 “하늘이 그를 죽음에서 풀어줬다”는 뜻의 ‘천방(天放)’이란 호를 내려주었다.”(『천방선생문집』行狀-정경달)

천방이 장흥고을의 기우제 제관으로 선택되었음은 당시 장흥사회에서 천방이 유림(儒林)‧문림(文林)‧사림(士林)을 대표하는 사표(師表)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방(天放)이 기우제 제관으로서 기우제를 봉행했음에도 비기 오지 않자 결국 분사(焚死)까지 하겠다고 결심했고, 이를 실행했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철저한 의(義)의 실천적인 신념이 없으면 안 될 일이었다.

이처럼, 천방(天放)은 조선조 500년간 장흥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경의(敬義) 정신을 궁행하고 실천한 장흥사회의 사표(師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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