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3)
■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3)
  • 김선욱
  • 승인 2023.10.2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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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이르길, “임란‧정유란, 충무공 외 충신·지사 중 마하수는 그중 한 사람이다”

-마하수의 그 충절(忠節) … 백세에 이르도록 길이 남으리라

김선욱 / 시인, 본지 편집인
김선욱 / 시인, 본지 편집인
▲『연천집』에 수록된 홍석주 묘갈명

 

 

 

 

 

 

 

 

 

 

 

▲『연천집』에 수록된 홍석주 묘갈명
▲『연천집』에 수록된 홍석주 묘갈명

 

 

 

 

 

 

 

 

 

 

 

 

 

 

 

 

 

 

 

 

 

 

 

 

 

 

 

 

 

 

 

 

 

 

 

 

 

 

 

 

 

 

 

 

 

 

▼마하수의 묘비명(홍석주 찬)

 

 

 

 

 

 

 

 

 

 

 

 

 

 

 

 

 

 

 

 

 

북두성(北斗星) 남쪽에 / 維斗之南

빛과 기운이 휘황 찬란히 빛나는도다 / 光氣熊熊

그 누구가 빛나는 그 정기 타고 났는가 / 孰乘其精。

바로 혁혁히 빛나는 이충무공이구나 / 赫赫李公

공(마하수)은 이충무공에서 나왔구나 / 公於李公。

별(마하수)이 달(충무공)을 따랐던 것과 같구나 / 若星從月

나는 묘비에 이 말을 새기노니 / 我琢其石

(그 충절) 백세(百世)에 이르도록 길이 남으리라 / 百世不滅

<지난호에 이어>

연천 선생의 ‘마하수 묘갈명(墓碣銘)

… 이 묘갈명을 지은 연천 홍석주는 조선조 명문가 출신의 풍산 홍씨 출신으로 당대 대석학이었다. (조선조 풍산홍씨 문과 급제자는 136명, 무과에 오른 이가 92명, 그 중 재상이 5명, 문형이 8명, 호당에 든 이가 9명, 봉조하(朝朝賀)가 6명이나 된다.)

홍석주는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저서로 『연천집』·『학해(學海)』·『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동사세가(東史世家)』·『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고, 편서로는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상예회수(象藝薈粹)』·『풍산세고(豊山世稿)』·『대기지의(戴記志疑)』·『마방통휘(麻方統彙)』·『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을 남길 만큼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정종 17년 계축년(1793년) 가을이었다. 임금(正宗)은 신종황제단(神宗皇帝壇)에 참배하였다. 정종은 두렵게도 임진년 동원했을 때(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준 일)의 공적을 생각하였다. 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을 생각하였다.

그에 대한 공적을 포상하라 명하시어 그가 남긴 글과 사적을 모아 전서(全書)를 편찬, 반포하였는데, 이 편찬에서 태사씨(太史氏-역사를 맡은 사관)가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빠진 이들이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당대의 충신과 지사(志士)들을 연명(聯名)하여 추록한 이가 수십 여명인데,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 마공하수(馬公河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공(公)의 자는 선천(先天)이다.

마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다. 당(唐) 나라 원수(元帥)가 동정(東征)할 때 따랐다. 백제(百濟)의 말에 마사량현(馬斯良縣) 머물렀는데, 마침내 현의 씨(縣氏)로 삼았다. 그 현은 지금의 장흥부(長興府)다. 마씨(馬氏)는 고려와 조선국 초(國初)에도 있었다. 그 때에 현인(顯人)이 있었으니 이름이 천목(天牧)이다. 태종조(太宗朝)에 좌명공신(佐命功臣)에 훈공(勳功)되었다. 태종은 그를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충정(忠靖)이라는 시호(諡號)도 하사했다. 그가 공(公,마하수)의 7대조이다. 충정의 공적은 일곱 세대 동안 이어졌다.

공의 증조(曾祖)는 이건(以乾)으로 참봉이었고, 조부(祖父)는 팔준(八俊)으로 판결사였고, 공의 부(父)는 인서(麟瑞)로 사직(司直)이었다. 사직(司直) 인서는 동현(同縣)의 위씨(魏氏)와 혼인하였다.

가정(嘉靖) 무술년(戊戌年,1538년)에 공(마하수)을 낳았다.

-(사단법인 광주‧전남충의사현창회에서 1992년 10월 10일 발행한 『광주‧전남 五亂忠義史錄』 265쪽,‘마인서馬麟瑞’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마인서(馬麟瑞,1512∼1594) : 장흥인. 자字는 성중聖仲. 관官은 부사직副司直. 부父는 팔준八駿-副修撰. 조祖는 이건以乾-參奉, 현조顯祖는 천목天牧-忠靖公. ▶공적 : 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무수히 많은 적을 참살하다가 부안扶安 변강邊江에서 순절하였다. 옷만으로 이장衣履長하고 부사직副司直에 제수되었다.”)

공이 일찍이 어렸을 때 집안에 있던 쌍소나무 즉 쌍고송(雙枯松)에 대한 글(賦)을 지으며 순(巡), 원(遠), 휴양(睢陽)이라는 이라는 글귀를 써서 식자(識者, 학자들)들이 놀라워하였다.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말라죽은 쌍 소나무 賦-雙枯松

너는 본디 겨울철 나무인데 爾本歲寒物

어찌 눈 속에서 멀라 죽었느냐 如河雪裏枯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휴양진을 지키다 怳見睢陽壘

안록산을 보고 깜짝 놀라 죽었더냐? 遠巡公棄軀

-(『장흥마씨대동보 건(乾)』, 마하수 遺詩)

공(마하수)은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이미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임진년(壬辰年)에 왜적이 반란을 일으켰다.

배흥립(裵興立,1546∼1608)과 힘을 다하고 적을 토벌하겠다고 약조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공(司公-마하수 부친)이 왜적을 피하여 근해에 머물렀다가 피살되었다.(다른 기록에 의하면, ‘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무수히 많은 적을 참살하다가 부안扶安 변강邊江에서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었다.(『광주‧전남 五亂忠義史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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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호소하였다. 더욱 왜적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 충무공(李忠武公)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가 되었다. 적(賊)을 공격하여 적이 남해(南海) 먼 바다로 달아났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이충무공이 참소를 당해 사직하였다.

적이 또 크게 들어와 아군의 수사(水師)를 모조리 섬멸하였다. 새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을 죽였다. 조정이 크게 놀랐다. 즉일로 적소(謫所)에 이공(李충무공)을 내보냈다. 옛 직임도(수군통제사) 돌려주었다.

당시 공은 왜적을 피해 바다 가운데 있었다.

들으니, 이충무공이 (장흥부 회령포로) 왔다고 한다. 공은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내 군문에 나아가 이충무공을 알현하였다. 이공(이순신)도 놀라워하며 기뻐하였다.

이순이 말하길,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와 고생을 하였다. 공에게 배가 얼마나 되는가?”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10여 척이 될 만합니다.” 하였다.

이공이 다시 말하길, “옳습니다. 공이 우리의 후원자가 돼 주십시오.”

공(마하수)이 말하길 “왜적은 우리 모두의 공적입니다. 마땅히 생사를 함께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향인(鄕人) 정명열(丁鳴說-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아들)과 백진남(白振南-옥봉玉峯 백광훈의 아들) 등 10여 명의 무리가 당도했다.

공은 해선(海船)을 해구(海口)에 포진하였다.

9월 16일이었다. 이순신은 배의 선주들(舟師)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 명량(鳴梁) 앞바다에서 적을 맞이하였다.

공은 이순신을 관망하였다. 적(賊)이 이순신을 위급히 포위하였다.

두 아들 성용(成龍)과 위룡(爲龍)과 함께 큰소리치며 적진 안으로 돌진하였다.

힘써 싸우기를 한참 만에 공이 결국 적의 탄환을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왜적도 대패하여 달아났다.

감히 왜적이 감히 이충무공과 다시는 각을 세울 수가 없었다.

오호라.

바람을 가르며 날갯짓하였구나!

아주 작은 힘이 아니었구나 (터럭 하나의 힘이 아니었구나).

광대한 건물은 결코 나무 한 그루로 이루지 못한다(大廈之成, 非一木之材也

이공(이순신)은 비록 충용(忠勇)이면서 용병(用兵)을 잘한다 하여도

백 번 싸우면 백번 모두 승리하여 대항할 적이 없었던 것은

뭇 의사(義士)가 힘을 같이하는데 어찌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또한 이공(이순신)의 공이다.

오직 이공에게는 사직(社稷)과 백성만 있었다.

만세에 이르도록 이를 힘입게 되었다.

능히 이러한 이공(李公)의 공(功)을 도와준 자가 있었다.

이것 또한 사직(社稷)이 의지하는 바이다.

하물며 그러한 그(마하수)가 의(義)를 위해

순순히 죽음을 무릅쓴 경우야 말할 나위가 더 있었겠는가.

공(마하수)의 나이 62세였다.

아들이 공의 시신을 받았다. 화개산(華葢山)의 곤(坤; 방위는 서남)의 자리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공의 묘지에 공의 부인 함풍노씨(咸豊魯氏, 또는 함평노씨(咸平魯氏)도 합장하였다.

공의 아들은 넷이다. 그 중 둘은 이룡(而龍)·화룡(化龍)이다.(공의 네 아들은 성룡成龍·위룡爲龍·이룡而龍·화룡化龍인데, 앞 명량해전에서 첫째 성룡(成龍)과 둘째 위룡(爲龍)을 거명했으므로 여기서 명량해전에서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던 셋째 이룡而龍, 넷째 화룡化龍을 거명한 것으로 보인다)

측실(側室)의 아들도 둘인데, 이름이 기룡(起龍), 운룡(雲龍)이라고 하였다. 사위 1인은 김여순(金汝順)인데, 궁궐의 첨정(僉正:조선시대 중앙관서에 설치한 종4품의 관직)이 된다. 후에 김여순(金汝順)은 선전관이 되었다. 그 나머지와 여러 손자는 모두 뚜렷하지 않다.

공의 별세 후 200여 년이었다. 7세손 마언모(馬彦模)가 비로소 묘비문(銘墓)을 나에게 지어주기를 요청한다. 내가 충무서(忠武書-이 충무공의 書)를 많이 살폈다. 이것을 미덥게 여기리라 믿는다. 마침내 묘비명을 쓴다.

북두성(北斗星, 維斗) 남쪽에 / 維斗之南

빛과 기운이 휘황 찬란히 빛나는도다 / 光氣熊熊

그 누구가 그 빛나는 정기 타고 났는가 / 孰乘其精。

바로 혁혁한 이충무공이구나 / 赫赫李公

공(마하수)은 이충무공에서 나왔구나 / 公於李公。

별(마하수)이 달(충무공)을 따랐던 것과 같구나 / 若星從月

나는 묘비에 이 말을 새기노니 / 我琢其石

백세(百世)에 이르도록 길이 남으리라. / 百世不滅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판관 춘추관

규장각 검교 직각 지제교 풍산 홍석주(洪奭周)가 짓다

『淵泉先生文集(연천집)』 권26, 豐山 洪奭周成伯著, 墓碣銘[上], 繕工監主簿 馬公, 墓碣銘 : 正宗十七年癸丑秋。上親拜神宗皇帝壇。怵然念壬辰東援之績。以李忠武公舜臣有再造國家功。命裒其遺文遺事。爲全書以頒。於是太史氏之闕而未書者。稍稍得見于世。而一時忠臣志士。得牽聯以托名于卷者。數十餘人。繕工主簿馬公河秀其一也。公字先天。其先出中國。有從唐元帥東征者。留處于百濟之馬斯良縣。遂以縣氏。縣今長興府也。馬氏在高麗及國初。世有顯人。有諱天牧。策太宗朝佐命勳。封長興府院君。謚忠靖。於公爲七世。參奉諱以乾。奉事諱八俊。司直諱麟瑞。公之曾祖祖若考也。司直娶同縣魏氏。以嘉靖戊戌生公。公生而有異姿。兒時甞賦雙枯松。有巡遠睢陽之句。識者異之。二十七。擢武科。仕旣至主簿。一朝以親老棄去。壬辰倭冦作。與邑宰裴興立相約。戮力討賊。未幾。司直公避冦。沒于海。公血泣呼天。益不欲與賊俱生。先是。李忠武以三道統制使。破賊南海上。旣而遭讒去。賊又大入。盡殲我水師。殺新統制使元均。朝廷大震。卽日起李公于謫戍中。還其舊任。公時逃難在海中。聞李公來。大喜。遂詣軍門上謁。李公亦驚喜曰。冐白刃相尋良苦。君有船幾何。對曰。可十餘艘。李公曰可矣。君爲我後援。公曰。當死生以之。於是與鄕人丁鳴說,白振南等十餘輩。布船海口。爲疑兵。九月十六日。李公悉舟師。邀賊于鳴梁。公望見。賊圍李公急。與二子成龍,爲龍。大呼入賊陣中。力戰良久。公竟中丸死。而賊亦大敗遁走。不敢復與李公角矣。嗟乎。衝風之翮。非一毛之力也。大廈之搆。非一木之材也。李公雖忠勇善用兵。其所以百戰百勝。而莫爲之敵者。亦豈非羣義士同力之助哉。李公之功。在社稷生民。萬世賴之。有能贊李公之功者。是亦社稷之所賴也。而况其以身殉義者乎。公死時年六十二。子奉公柩。葬于華葢山坤坐之原。以其配咸豊魯氏祔。公之子四人。其二曰而龍,化龍。側室子二人。曰起龍,雲龍。女壻一人曰金汝順。爲龍官僉正。而龍官虞侯。化龍官判官。金汝順爲宣傳官。其餘及諸孫。俱不顯。公歿後二百餘年。七世孫彦模。始乞銘墓之文于余。余取忠武書。徵之而信。遂爲之銘曰。

維斗之南。光氣熊熊。孰乘其精。赫赫李公。公於李公。若星從月。我琢其石。百世不滅。

通政大夫行承政院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奎章閣 檢校 直閣 知製敎

豐山 洪奭周 撰

-ⓒ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2002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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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 제14대 황제 신종(神宗)에 제사하였다는 뜻이다.

2) (), (), 휴양(睢陽) : ()은 장순(張巡), ()은 허원(許遠), 휴양(睢陽)은 지금의 하남성의 땅 이름이다. 당나라 현종 14(755)에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려올 때, 그 유명한 휴양(睢陽. 하남성 상구현 남쪽) 방어전에서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던 장수가 장순(張巡,709757)과 허원(許遠, 709~757)이었다. 이 두 장수를 가르켜 순원(巡遠)이라고 한다 순원(巡遠)과 휴양(睢陽)’은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절을 의미한다. 소나무는 예부터 충절을 의미했다.

3) 배흥립 : 본관은 성산(星山: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이고, 주요 관직으로 장흥부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전라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인이었다. 당시 장흥부 부사였다.

4) “대하지성(大廈之成), 비일목지재야(非一木之材也)” : “대해지윤(大海之潤), 비일유지귀야 (非一流之歸也).” 이 말은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에서 재상 관중(管仲,B.C732~B.C645)이 제환공(齊桓公, ?~B.C643)에게 큰 뜻을 이루려면 많은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제언할 때 한 말이다. 즉 관중은 신이 듣기로 높은 건물은 나무 한 그루로 이루지 못하고(臣聞大廈之成, 非一木之材也), 넓은 바다는 강물 한 줄기로 이루지 못한다(大海之潤, 非一流之歸也)”라고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높은 건물은 목재 하나로 이루지 못하고 넓은 바다는 강물 한 갈래로 적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5) 여기서 유두(維斗)는 천지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두칠성, 북두성을 가르킨다. “()는 정()과 신()은 있지만 작용이나 형체는 없는지라, 전해 줄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으며, 터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으니, 스스로를 근본으로 삼아 아직 천지(天地)가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이미 엄연히 존재하여 온 것이다.북두성(北斗星)은 그것을 얻어서 영원토록 어긋나지 않으며, 일월(日月)은 그것을 얻어서 영원토록 쉬지 않는다. 伏戲氏得之 以襲氣母 維斗得之 終古不忒 日月得之 終古不息라고 했다.(장자, 6, 大宗師, 1).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 중 ()’에 대해 이이(李珥)천하의 중심축[綱維]이기 때문에 유두(維斗)라고 표현했다 所以爲天下綱維.”, 성현영(成玄英)뭇 별의 중심축[綱維]이기 때문에 유두(維斗)라고 했다 爲衆星綱維 故謂之維斗.” 안동림(安東林)세계를 매달아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밧줄이라고 풀이하였다.

6)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 : 조선의 문신이다. 홍낙성의 손자로 홍길주, 홍현주의 형제이다.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본관은 풍산(豊山),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795(정조 19) 식면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수찬·교리 등을 거쳐 이후 당상관이 되어 승지, 이조참의에 오르고 홍문관부제학, 홍문관제학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에 이어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이후 형조공조병조호조예조 판서 등과 대제학을 지내고 후에 좌의정까지 역임했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실록청 총재관에 임명되어 순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주자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과학 등의 학문에도 이름이 높았다.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풍산세고6, 상예회수10, 학강산필저4, 연천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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