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天防) 유호인(劉好仁) 이후, 장흥에서 천방 선생에 대하여 가장 많이 언급한 이는 존재 위백규(魏伯珪) 선생이었다.
위백규 선생은 천방이 기거한 연하동의 서당(書堂) 그림과 평가를 비롯해 천방의 시(詩)에 대한 평, ‘중용차의’에 대한 의미 규명의 글(逸顧後序), 천방의 행장 등 천방에 대한 4편의 기록을 남겼다.
먼저 연하동의 서당에 대한 그림에서 존재(存齋) 선생은, “선생(천방)이 기거하는 연하동의 좋은 땅은 도학을 강론하거나 연마하던 곳이지만, 세대가 오래되면 끼친 그 자취를 증험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림으로 그려 붙여, 후세 학자들이 경모(景慕)의 땅으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先生卜居是洞 以爲道學講磨之所 世級久遠 遺跡無徵 故亦爲圖附 以爲來學景慕之地云 後學 魏存齋 伯珪 評”라는 평과 관련의 그림을 남겼다.(『천방선생문집』)
존재 선생은 또 천방 선생의 영소시(詠梳詩)에 대해 “언어가 하늘의 뜻을 이룬 것 噫 此詠梳一絶韻 語天成意”이라면서 “누가 선생의 보배(白珩, 흰 옥구슬)로운 학문(瑾瑜-아름다운 玉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학문을 비유한다)을 자랑스럽게 묻겠으며, 또한 이 보물(連城之價)같은 시를 노래하겠는가. 何况先生之席上瑾瑜 誰肯問白珩 而誦其連城之價哉 士之不遇 從古如斯後人 讀此必有爲之斷琴 而長嘆者矣”라고 하면서 천방 선생의 시를 보물(寶物)로 평가했다.
위백규 선생은 또 천방 선생의 행장(行狀)에서, 참으로 위백규 선생다운 명문(名文)을 남겼다. 아마 천방 선생에 대한 거의 모든 글 중에서 존재 선생이 쓴 이 행장만큼의 명문(名文)은 없을 것이다. 위백규 선생은 천방 선생의 일대기를 적은 이 글을 통해 천방의 경의(敬意) 정신에 바탕한 모든 행적이며 현실의 삶의 모습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참으로 적절하게 기술해 놓았다.(내용, 언급은 생략)
위백규 선생은 또 ‘일고후서(逸顧後序)’라는 천방의 ‘중용차의(中庸箚疑)’에 대한 발문 성격의 글에서, 천방선생의 놀라운 학문의 깊이를 간단히 언급하고, 천방이 유문(遺文)으로 남겼던 ‘경의설(敬義說)’이 거의 폐기되어진 상태를 매우 애석해하고 안타까워 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선생의 학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보물로서 100년 후라도, 그 후의 유수한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귀한 보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해 마지 않았다. 嗚呼 先生平日學 範經說固多可傳者 皆泯而無徵誠可惜也 …又失之 又有某年重陽日 與愚翁健叔諸公 設小酌於雷龍舍南冥學舍 因論敬義說 今古紙斷爛僅認 其題.(『천방산생문집』, 逸稿後敍)
이처럼 위백규 선생의 4편의 글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위백규 선생이 천방 선생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존재 위백규(魏伯珪) 선생이 고관(高官)도 아니었고 평생을 처사로 살았던 천방을 그토록 높이 평가한 이유가 있었다. 천방의 유문 중 ‘대학도(大學圖)’며, 많은 시문(詩文)이 거의 유실되었음에도 위백규 선생이 유독 천방의 ‘경의설(敬義說)의 유실’에 그토록 애석해 하였던 이유도 천방의 ‘경의(敬義)’ 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의(敬意) 사상 역시 존재 위백규의 평생을 지배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위백규 선생에게는 최고, 최선의 실천 윤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폐청산積幣淸算’은 오랫동안 누적된 잘못되고 부정적인 것들, 즉 악습 같은 것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뜻이다. 즉 잘못되어 있는 것들을 드러내어 살펴보고 그러한 잘못이 다시는 없도록 제도적으로 시스템화 하는 일이 적폐청산인 것이다. 적폐청산은, 다른 의미로 ‘정도(正道)의 구현’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적폐청산 정신은 일찍이 조선조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장흥의 천방 유호인(劉好仁)의 ‘경의(敬義) 정신’, 특히 ‘의(義) 정신’과 맞닿아 있다.
존재 선생은 12살(1738년) 때 “다른 사람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에게 들어라. 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존재집存齋集』제24권,附錄, 年譜)”라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수신(修身)과 자기 수양, 자기 비판에 철저했던 호남의 3대 실학자였다. 이러한 존재 선생의 수기(修己), 수신(修身)의 실천은 바로 정통 유학(儒學)에서 내적(內的)인 자기 수양을 위한 도리인 ‘경의(敬義)’의 정신이었다.
한 일화로, 1789년 68세 때, 남해안 태풍재난으로 정조가 검교직각(檢校直閣) 서영보를 위유사(慰諭使)로 급파해, 서영보가 과객행세를 한 채 존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일이 있었다. 마침 그날 밤이 제삿날로 국법으로 밀주(密酒)를 단속할 때였다. 부인이 제주(祭酒)를 내오자 선생이 ”이 술은 안 된다. 백성들이 법을 안 지키면 누가 지키냐”면서 제주를 부어버리고 다시 청수(淸水)를 길어오도록 했다. 이처럼 선생은 자신에게도 엄정했었다.
존재 선생은 31세 때 스승 윤봉구(尹鳳九)에게 성리학을 수학하면서 당대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지어 올렸다. 33세 때는 정치를 악기로 보고 새 줄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 ‘정현신보 시폐(政鉉新譜 時弊)’를 정리했다. 또 52세 때는 장흥부사 황간의 요청으로 29개 적폐를 지적한 상소문인 ‘봉사(封事)’를 지어 올렸고, 65세 때는 사회의 온갖 적폐를 적시한 ‘구폐舊弊 32條’를 정리한 『정현신보(正絃新譜)』를 저술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선생은 70세 때 국가개조를 논하고 백성의 실상과 그 해결책을 논한 상소문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집필했다. 선생이 정조에게 ‘만언봉사’를 올리자 정3품 승지 윤숙을 비롯한 사간원에서 사투리를 써 가면서 임금의 귀를 더럽혔다고 성토했을 정도였다.
특히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 선생의 실학사상과 개혁정신이 집약됐다고 평가되는 『정현신보』는 33세 때 초안을 잡고 65세에 완성한 필생의 역작으로, 선생의 정치철학과 실학사상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저작물로 손꼽힌다.
또 선생의 ‘만언봉사’는 존재 위백규 선생이 백성의 참담한 실상을 정조에게 올린 상소문으로 ①임금이 뜻을 세우고 전하여 학문을 밝히는 일(立聖志明聖學) ②보필할 사람을 가려서 어질고 재능 있는 인물을 기용하는 일(簡輔弼擧賢能) ③염치를 장려하고 기강을 떨치는 일(勵廉恥振紀綱) ④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고 서로 앞 다투어 출세하려는 습관을 억제하는 일(正士習抑奔競) ⑤뇌물을 탐하는 행위를 단속하고 사치를 금하는 일(律貪贓禁奢侈) ⑥옛 제도에 따라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일(由舊章革弊政) 등 6개 항목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즉 존재 선생은 이처럼 성학(聖學)의 참뜻을 밝힘으로써 정도(正道)를 구현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적폐청산으로 정도(正道)의 세상을 구현하는 일에 평생을 고뇌하고 이러한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궁벽한 장흥에서 고독한 한생을 살았던 분이 바로 호남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불리울 수 있는 존재 선생이었다.
이는 바로 경의(敬義)의 사상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당대의 당면의 적폐를 극복하여 정도(正道)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상소했던 의(義) 정신이었고, 천방(天防)이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세상을 위해 비를 내리게 하는 기우제에서 자신을 불 살으려는 치성을 보여준, 진정으로 공(共)을 위한 의(義)의 정신과 그 맥을 같이하는 정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백규 선생이었기에 선생은 비록 천방이 기술하였지만 유실되어 버린 ‘경의설’의 유실을 매우 안타까워했을 것이고, 그가 천방의 행장에서 표현하였듯이, 경의(敬意)의 정신을 실천, 궁행하였던 천방 선생의 학문을 유독 남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과거 조선조에서 삼벽三僻(지역·성씨·사람이 궁벽)에 갇혔던 재야 선비요 재야 학자로서의 천방과 존재 선생이 그런 불우 환경을 극복했던 위대한 성리학자요, 실학자였으며, 삼벽의 환경에서도 뜨거운 가슴에 사(私)보다 공(共)을 위한 삶에 헌신하고, 경국제민(經國濟民)의 큰 뜻을 품고 시문(詩文)으로서 또는 학문으로서, 평생을 오롯이 정도(正道)를 추구했던 장흥지역의 대표적인 사표(師表)였음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