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4) - 주천(舟村) 마하수의 사적(事蹟)
■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4) - 주천(舟村) 마하수의 사적(事蹟)
  • 김선욱
  • 승인 2023.11.0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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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위백규 찬…주촌 공의 기본이 되는 전기(傳記)

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인
주천공-위백규

 

 

 

 

 

 

 

 

 

 

 

 

 

 

 

 

 

 

 

 

 

 

 

 

 

 

 

 

 

 

 

 

 

 

 

 

 

 

 

 

 

 

 

 

 

 

 

 

 

 

 

 

 

 

 

 

 

 

 

 

 

 

<지난호에 이어서>

옛 임진난 때 나의 5대 족조(위씨, 魏德毅)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용만관(의주)에 갔다 온 후에 고향에서 정유재란을 당했다. 가족과 더불어 배를 타고 법성포에서 피란한 후 5형제가 모두 무사하여 가족의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

이때 공(魏德毅)이 잔치 끝에 말하길, “우리 장흥 고을에서 마 주부(馬河秀)가 이순신의 명량해전에 향선 10여 척으로 후원하다가 순절하였다. 우리도 만약 그 마공의 후원군에 참여하였다면 우리가 오늘 이같이 무사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내가 공의 순절한 사적(事蹟)을 보았다. 마공(馬公)의 그 순절을 매우 장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제암(霽巖, 정명렬)의 난중일기(정유재란 일기)를 보았다. 정공(丁公)은, 마(馬) 주부가 이충무공의 후원군으로 싸우다가 마침내 순절하였다고 기록하였는바, 백세가 지났어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마씨가승(家乘)에 실린 사적(事蹟) 또한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마공(馬公)은 열사(烈士)요, 장부(丈夫)로다!

공의 이름은 하수(河秀)요, 자는 선천(先天)이다. 대대로 녹을 받은 세가(世家)이다. 옛날 백제(百濟)의 온조왕을 보좌하던 마려(馬藜)는 온조왕(溫祚王)의 왕십제(王十濟)와 함께 원훈(元勳)으로 마사량현을 받았다. 이 현은 대대로 마씨에게 속하고 장흥부(長興府)에 속했고, 마씨는 그대로 부(府-장흥부)의 사람으로 되었으며, 승국(勝國) 시대에는 대대로 대관(大官)이 되었다.

태종(太宗)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장흥(長興)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고 시호를 충정(忠靖)으로 받은 천목(天牧)이 공(公)의 7대조이다. 충정공 둘째아들 조은공(腆) 경태(景泰)는 군수를 역임한 후 예강(예양강)에서 사셨다. 조은공이 중보(仲寶)를 낳으니 생원이며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 호가 미학재(媚學齊)이다. 미학재가 득진(得辰)을 낳으니 벼슬이 첨정(僉正)이다. 첨정공이 이건(以乾)을 낳으니 벼슬이 주부(主簿)다. 주부공이 팔준(主簿)을 낳으니 벼슬이 봉사(奉事)다. 봉사공이 인서(麟瑞)를 낳으니 벼슬이 사직(司直)이다. 이분이 곧 공(公)의 부친이다. 공의 어머니는 장흥위씨(魏) 참판 원신(元信)의 여식이다.

공은 무술년(戊戌年) 3월초 8일에 장흥(長興) 안양방(安良坊) 주암촌(舟岩村, 지금의 장수리)에서 태어나셨다. 후인들이 그 충절을 기리면서 호를 주촌(舟村)이라 하였다. 공이 어렸을 때 김남계(金南溪) 선생의 맏아들 김공(金公)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다. (金公이) 쌍고송(雙枯松, 두 그루의 마른 나무)을 제목으로 글을 짓게 하였다. (이에 公이 글을 짓기를),

본래 겨울나무인데 추위를 못 이기고 / 爾本歲寒物

어찌하여 눈 속에서 말라죽었느냐 / 如何雪枯怳

장순과 허원처럼 휴양성 지키다 안록산 보고 / 見眼陽壘遠巡

깜짝 놀라 죽었듯이 죽었느냐 / 共棄軀抵”

하였다. 이에 남계(南溪) 선생이 감탄하고 말하기를, “장차 크게 될 것이다.”고 기대하였다.

(공은) 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을유년에 선공감주부로 있었다.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부모를 섬기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사자산(獅子山) 깊은 골에 피난하면서 아들 위룡(爲龍)을 선산군수 정경달(丁景達)의 의병 막하에 참여케 하였다.

을미년에는 장흥군수(당시 장흥부사) 배흥립(裴興立)이 향병을 거느리고 왜적을 치려고 공을 부관으로 임용할 때, 공이 부친(麟瑞)을 걱정하니, 부친이 말하기를, “군(君, 임금)과 부(父)는 일체이다. 충(忠)과 효(孝)는 둘이 아니다. 아비는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 싸워라” 하시었다.

이에 공이 마침내 (배군수 부관을 맡고) 큰 아들 성룡으로 하여금 부친을 배에 모시고 피난토록 하였다. 그해 7월에 사직공(司直公)이 왜적을 수색하다 죽었는데, 아들 성룡은 다행히 뭍에 오로면서 흉살을 피하였다. 다행이 화를 면한 성룡은 공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공은 배군수 진중에서 피를 토하며 통곡하고 말하기를, “충신도 되기 전에 불효한 죄를 저질렀다”고 ”한탄하면서 복수를 맹세하고 장사를 지내고 나서 그 뜻(복수를 맹세한 일)을 실천하려고 적(원수)에 대한 복수와 적과 함께 살고자 하지 않았다.

정유년 왜적이 침공하니, 공은 창의(倡義) 계획을 세웠다. 이에 동참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중 향촌사람 중에 의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백진남(白振男), 정명열(丁鳴說),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등 10여 명이었다. 이들은 각각 피란선(避亂船)에 자제들과 자제들의 노복들, 군량미와 무기 등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우리는) 정세를 엿보아 적이 지쳐있을 때 전격적으로 적을 토벌한다는 계책을 세웠는데, 7월에 이통제(李統制)가 복직되어 부임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공이 말하길 “이공이 왔으니 우리가 무엇을 근심하겠느냐?”하고 말하고 마침내 회령포(會寧浦) 이공(李公)에게 찾아가 만나 뵈었다. 이공이 말하기를, “창날 속에 찾아오느라 수고하셨다. 한 고을의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는 배가 얼마나 되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십수 척(隻)입니다.”하니 이공이 말하길, “내가 어지러운 상태에서 직임을 받았다. 게다가 군수품이 탕진되어 여세(군세)가 미약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모여들고 여러분 향선(鄕船)이 우리의 후원군(後援軍)이 되어준다면 군대의 진용에 보탬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공(公)이 말하기를, “복(僕, 자신의 겸칭)이 비록 노쇠하였지만 흉중(胸中)에는 다만 의(義) 한 글자가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공(公)과 생사(生死)를 함께 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이공(李公)이 기뻐하며 공을 크게 칭찬하였다.

이때 공이 시(詩)를 지어 말하길,

예악과 문물이 열리고 예의바른 성왕의 터에 /禮樂衣冠聖祖基

어찌 방자하고 더러운 왜적이 말을 몰아 달리게 할손가 / 那令醜虜肆驅馳

내 머리는 세었지만 마음은 장정이다 / 男兒白首心猶壯

연원처럼 이제 왜적과 싸워 죽을 때이다 / 正是文淵裹革時

라고 하였다.

공은 모든 배(향선)를 진영 바깥 바다에 배진(排陣)하였다. 후원(後援)의 의병(疑兵)이 참여한 가운데 시작된 명량(鳴梁)의 전투였다. 적선(賊船) 삼백(三白)여 척이 명량해를 가리며 포위하였다. 이공(李公)이 매우 급박한 상태였다. 이공 휘하의 장수들이 모두 물러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杳然之地). 그러므로 그(왜적의) 공격의 예봉을 꺾을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공이 칼을 뽑아들어 돛대를 치며 “장부가 난리에 임하여 죽음에 처했을 뿐이니 어찌 구차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丈夫死耳豈可臨難苟免” 고 말하고 네 아들 성룡, 위룡, 이룡, 화룡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여 싸우다가 순직하였다.

사자(死子)가 된 공의 네 아들은 비상(秘喪)을 당하여 좌우에서 적을 찔러죽이며(衝殺) 나갔다가 부친을 부축하여 빠져나왔고 이어 향배(鄕輩)를 옹호하고 시체를 보호하는 수단을 써서 두 번이나 적을 진격하였고, 이공(李公)이 거군들을 격파하니 왜적이 숨은 곳이 없었다.

네 아들이 부친의 시신을 모시고 육지로 올라왔다.

이에 정명열(丁鳴說)이 탄식하며 “육십 노쇠한 분이 백의종군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건만 조정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누가 호남의사라고 칭할 것이며 또 누가 나라에 상계할 것인가?”하였고, 이어 만장(輓章)에서 “공이 육십세에 순절하시니 충렬의 위업을 햇님이 비추고 혈강에 울화가 맺힌다. 충절의 넋은 어느 곳에 의지할 것인가 벽파정 저문 썰물이 안벽을 치며 울더라.”라고 하였다.

공은 실로 정절의 장부(丈夫)요 완전한 인재로서 나라를 위하여 바친 공훈과 영특한 성품으로 마땅히 합당한 지위에 천거되어야 할 터이나. 시운에 어긋나더라도 만약에 요행으로 몸소 직분을 다하고 부친상을 당했더라면 떳떳한 효자가 될 것인데, 하늘이 이를 도와주지 아니하니 당황스럽고 근심할 뿐이다.

거적자리에 누워 병란을 생각하니 원흉을 쳐부술 조급한 생각에 피를 뿜어 바다에 맹세하고 이순신을 후원하기로 했다. 당시에 나라가 믿고 의지한 이순신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순신을 구하지 못하면 바로 나라가 망한 판국인데 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리라, 또 내 부친이 왜적에게 피살되었으니 왜적을 쳐 물리친다면 부모의 원수도 갚는 길인데 내 몸을 어찌 아낄손가” 하고 만경창파에 쏟아지는 화살과 적탄을 무릅쓰고 위기일발에 처한 이순신을 구했건만 하늘이 어찌 그 정성을 몰랐는가.

그러나 감히 충렬의 속마음과 높은 품격이 하늘의 명령에 부응하는 것이 주천공의 평소의 뜻이었으니 가히 흠 없는 인간이로다.

우뚝하게 솟은 의로운 담력으로 피를 쏘아 높은 이상을 아득한 남쪽바다 푸른 파도 위에 펼치고 순절하시니 고요하게 애국지사를 애도하는 눈물에 옷깃을 적시는 것이 어찌 나만의 생각이겠는가?

슬프고 애석하도다.

공의 드러내지 못한 공적에 대한 보답은 마땅히 자손에게로 미칠 것이다.

누구도 닦기 어려운 그 공덕을 두고 어찌 밝히지 않겠는가.

후손들은 공의 두텁고 깊은 공적을 선양하고 하늘은 반드시 이를 증거하리로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나 써서 전하고 하늘의 명(命)을 기다리로라.

수령(遂寧) 위백규(魏伯珪)가 삼가 짓다.

在昔壬辰之變我五代族祖恭議公扈駕龍灣回下鄕丁酉契家眷乘舟避過兵于法聖浦亂己而歸五兄弟蘭室之人無一見衊遂設慶飮公記之

其末曰李統制鳴梁之役吾鄕義士以鄕船十餘隻爲其後援至若馬主簿殺身以殉我若以起勤龍灣之心同入南洋今日莛上극 無魚少一人之嘆耶余奉玩遺墨壯其馬公之死而以未得其詳爲恨及

見霽巖丁公亂中日記始得公當初赴義之擧畢境殉節之狀瞭然於目前百歲之下勝激感欽歎又索觀

馬氏家牒所載其實蹟與丁公日記相脗始信公果是烈丈夫也

公諱河秀 字先天 長興世家 古百濟佐輔 諱黎以溫祚王十濟元勳受封於 馬斯良縣 世食其邑縣今屬長興仍爲府人勝國時世大官至之我

太宗朝有諱天牧爲佐命親勳封長興府院君 謚忠靖公其七代孫也忠靖生諱 腆景泰丙子以前郡守退老 汭江號釣隱郡守生 諱仲寶生貝以文行爲世名儒號媚學齊生員生諱得辰僉正僉正生諱以乾主簿主簿生諱八駿奉事奉事生諱麟瑞司直郞 公之考也 妣長興魏氏贈參判元信女以

嘉靖戊戌三月初八日生 公於長興安良坊之舟岩村 後人慕其節以舟村稱 焉幼時受學於 金南溪胤 金公以雙枯松爲題命賊之 公應聲對曰 爾本歲寒物 如何雪枯怳 見眼陽壘遠巡 共棄軀抵 南溪異之語人曰 且看此兒將來成就如何耳 甲子別試登 萬曆乙酉遷達繕工注簿 久不調遂棄官歸養及壬辰變作奉 老避兵于獅山深谷 送子爲龍赴 善山宰 丁公景達募義

乙未 地主裵公興立率鄕兵討賊請公今爲副貳公以 親老憂之司直公 曰君父一體 忠孝無二 致汝其勿辭

公遂許之使長子成龍泰司直公乘舟避兵于扶安邊江 同年七月司直公遇搜賊歿于海成龍幸免登陸凶于公 公時在裵公陳中噴血犬慟曰 進未及爲忠臣徒負終天不孝之罪遂矢復而葬自是志復讐益不欲與賊俱生

丁酉倭寇猖公心計無可往從約鄕人之有氣義者 白公振男 丁公鳴說 金公聲遠 文公英凱 卞公弘源 金公澤南 任公永凱 十餘人 各備避亂船載子弟僮僕及糧餉器械以爲乘機覘勢並進勦賊之計矣七月聞李統制復任喜.

曰李公來吾輩何憂遂往拜于會寧浦李公曰昌刃來訪勤苦君之一鄕同志之船幾何

公曰可十數隻李公曰吾受任於板蕩之餘勢寡力單君聚鄕船爲我後援以補軍容

公曰僕難衰老胸中只有一義字當與公死生以之 李公極加稱賞公

常因有曰詩 禮樂衣冠聖祖基 那令醜虜肆驅馳 男兒白首心猶壯 正是文淵裹革時 遂與約中諸船排陣外洋.

爲後援疑兵及鳴梁之戰賊船三白餘艘蔽海而來圍李公甚急管下諸將皆退在杳然之地莫敢嬰其鋒公拔劒擊楫曰丈夫死耳豈可臨難苟免與四子成龍爲龍而化龍突入賊律力戰良久中丸而

死四子秘喪左右衝殺而出屬鄕船護屍手劍再進賊爲

李公所破擧軍而遁更無所施四子奉極返陸 丁公鳴說嘆漢曰 六十衰翁身無見職而面激義殉節孰謂湖南義士竟是 朝廷不識何狀人也 以詩送柩曰 公年六十死於邦烈日秋霜照血腔鬱結忠魂何處托碧波亭下暮潮撞鳴呼

公寔貞丈之全材苟當推穀之地必樹于城之勳特之性不苟合命與時違不敢僥倖於倘來自甘盡職於庭闈適丁時艱方圖移孝天不弔我遽羅鞠凶胸中之甲仍添笘枕之戈噴血誓海幸遭李公當時邦國之所恃者李公也方其李公之爲賊所圍也公之心以爲不救李公是無國也吾獨生無所用也治李公是活國也國苟活矣吾一死分也又以爲吾親歿賊賊若殲討親讐亦快復也親讐可復也吾何

愛吾親之所遺哉於是 溟波萬頃視爲平地節雨丸雷恬若無事單 舸獨擧突入於長蛇封 豕之口救活吾

王之瓜牙天豈不憖其誠烈閃蔽基飛丸哉然且不免豈烈膽 上格天亦欲成公之素志就之爲完人哉如斗 義膽血射靑 冥而南洋雲水一死寂寥志士 沾衿之淚豈特一公一身而巳哉鳴呼惜哉

公娶 咸豐魯氏生員希益女生六男一女男成龍從仕郞爲龍

僉正而龍虞候化龍奉訓郞 騎龍 雲龍 女適宣傳 金汝順靈光人公不食之報宜在胤子四難而猶未大闡豈厚積濬發於其後孫耶究之天理必有可徵余略叙爲傳執右契以侯

遂寧 魏伯珪 謹撰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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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순(張巡, 709757)() 때의 사람이다. 당 현종(玄宗)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허원(許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수양성(睢陽城)을 지켰다. 후에 성의 백성을 독려하여 인육을 먹으면서도 10개월이나 버티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장렬하게 죽음을 택했다.

2) 장흥 마씨(長興馬氏)의 득관시조(得貫始祖) 마려(馬黎)는 백제의 개국공신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23권 백제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마려(馬藜), 오간(烏干) 10인이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인도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해 남하해서 위례성을 도읍(都邑)으로 백제를 건국하고 온조(溫祚)를 왕()으로 받들었다.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元勳) 마려(馬黎)에게 좌보(左輔)의 벼슬을 내리고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려 후손이 세거(世居)하여 대대로 이어 받았다. 마사량현(馬斯良縣)은 고려 초에 장흥부 회령(會寧)으로 고쳐 불렀는 바 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회령으로 하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에 속하게 되니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3) 백제 왕십제, 즉 십제공신(十濟功臣)은 마려(馬藜), 오간(烏干), 전섭(全攝),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이다. 백제 개국공신 중 마려(馬藜)는 마()씨의 시조, 전섭(全攝)은 전()씨의 시조, 조성(趙成)은 직산 조씨의 시조이다.

4) 승국勝國: 전대의 왕조. 이긴 나라. 조선의 경우 고려를 칭함. 마하수나 위백규는 조선인이므로 여기서 전대의 왕조는 고려를 의미한다.

5) 장순(張巡, 709757)() 때의 사람이다. 당 현종(玄宗)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허원(許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수양성(睢陽城)을 지켰다. 후에 성의 백성을 독려하여 인육을 먹으면서도 10개월이나 버티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장렬하게 죽음을 택했다.

6) 문연과혁(文淵裹革 : 말가죽으로 시체를 싼다는 말로,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이 말은 후한서(後漢書)(마원전馬援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마원(馬援, 기원전 14~49)은 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으로, 왕망(王莽)의 부름을 받고 무장으로 출사했다가 다시 광무제 휘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일찍이 감숙(甘肅) 방면의 강(), ()족을 토벌하고, 교지(交趾) 지방의 난을 평정하여 지금의 하노이 부근까지 진출했는데, 그 공으로 후()에 봉하여졌다. 그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 주위에는 모두 아첨꾼들만 있단 말인가. 내게 참다운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옛날 복파장군 노박덕은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일곱 군을 새로 일으키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호의 작은 봉토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제후로 봉하여졌다. 상이 너무 과분하니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무슨 좋은 생각들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주위에서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못하자, 마원은 스스로 "지금 흉노(匈奴)와 오환(烏丸)이 북쪽 국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이들의 정벌을 천자께 청하리라" 하고는 "대장부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馬援嘗曰 大丈夫 當以馬革屍裹安能死兒女手)"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마혁과시란 군인이 군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 어느 곳에 있든지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지 작은 공에 만족하여 일상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후에 마원은 흉노와 오환의 토벌이 끝난 후에도 노구를 이끌고 남방의 만족(蠻族)을 토벌하러 출정했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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