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호 사설 - 우암 송시열과 천방 유호인
제205호 사설 - 우암 송시열과 천방 유호인
  • 김선욱
  • 승인 2023.11.2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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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은 정학(正學)을 이었다”

장흥의 서원과 사우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나, 그 책 속의 서원 편에 ‘예양서원’ 역사 소개가 잘못 기재돼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장흥군의 문화유적』, 『장흥의 서원과 사우』, 『문림의 향기2』 등이다. 잘못된 소개 내용이 대동소이한데, 그 중 대표적으로 『장흥의 서원과 사우』의 ‘예양서원’의 소개 내용을 보자.

“이 원사(예양서원)는 …영천(靈川) 신잠(申潛)을…장흥의 사림들이 존경하여 모범을 삼고자 1610년(광해군 2년) 여론을 모아 영천사를 창건하여 영천을 배향해 왔다. 1653년에는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과 천방(天防) 유호인(劉好仁)을 추가로 모시고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축문을 지었다. … ”(『장흥의 서원과 사우』 00쪽)

상기 내용에서 잘못된 것으로, ①건립 당시 원사의 이름은 영천사(靈川祠)가 아니라 사우당(祠宇堂)이었다는 것 ②건립시 영천 신잠만을 배향한 게 아니라 천방도 함께 배향했다는 점 ③1653년 월봉을 추배할 때 천방을 그때 추배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 등이다.

이 사실은, 사우당을 건립하고 초대원장을 맡았던 정명열의 증언이니, 정명열의 기사(記事)를 사실로 보아야 한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사우당 건립 때 신잠과 천방을 함께 배향했다고 나온다. 이런 사실은 1664년 예양서원을 중수하며 추강 남효온을 추배할 때 송시열(1607~1689)이 남긴 고유문(告由文, 중수 축문) 속에도 그 답이 대충 다 나와 있는 데도, 그런 오기(誤記)를 했다는 점이 아쉽다.

또 예양사를 세울 때의 그 사을 기록한 ‘예양사 건사 사실’에서도 상기 오기(誤記)의 사실이 확인된다.

“…임자년(1612)에 도사(都事) 정명열(丁鳴烈) 공이 (천방 선생을) 향사하자는 의논을 제일 먼저 주창하여, 진사(進士) 이승(李昇)·선세기(宣世紀)·위정훈(魏廷勳)·김여규(金汝珪) 수 십 인과 예양강 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기묘년(1639)에 명현인 영천(靈川) 신잠(申潛)을 주향(主享)하고 천방 선생을 배향하였다. 그 후 김월봉(金月峯)·이목은(李牧隱)·남추강(南秋江)을 제향(躋享)하니, …본 고을의 사우(祠宇)가 천방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연유가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그때의 사실로 보아 선생(천방)을 ‘향현(鄕賢)의 관면(冠冕)’이 되다.’라고 이르고…”(『천방선생문집』, 000쪽)

이 ‘예양사 건사 사실’에서 주목되는 점으로 ‘본 고을의 사우(祠宇, 예양사)가 천방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이로써 향리에서 천방 선생을 ‘향현(鄕賢)의 관면(冠冕)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우암 송시열의 1664년때 중수 축문이다.

”아, 우리의 양현(兩賢 : 신잠, 천방)은 한 세상을 아울러 살다 이화(罹禍)에 같이 걸리니 사림들은 지극히 애통하도다. 살아온 바른 삶(渾正)을 어찌 왜곡(歪曲)하리오. 한 자리에 합향(合享)하도다. 오직 천방 선생은 실로 정학(正學)을 이었기에 배향(配享)하여 제사 올리니 춘추로 중정일(仲丁日)이라네. …重修還祝文 : 尤菴 文正公 宋時烈 撰 / 繄我兩賢 一代生並 同罹禍綱 士林至痛 渾正焉誣 合享一席 維玆天放 實承正學 配侑烝嘗 春秋仲丁… (『천방선생문집』, 00쪽)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이 왜 이 축문의 첫 머리에서 삼현(三賢)이 아닌, 양현(兩賢)이라고 했을까. 이 축문은 처음에 예양서원의 기원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이고 예양서원 건립 시에 신잠과 천방의 양현을 배양했기 때에 이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암은 양현 중 신잠에 대해서는 그 가계 때문이라도 너무 잘았을 것이다. 신잠의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 종호(申從濩)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의 서출 제9왕자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의 딸이고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였으며, 성종의 부마(駙馬)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의 동생이었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이고, 이황(李晄)의 가르침을 받았다. 가문이나, 학문적 기반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신잠이었다. 그러나 신잠의 가문이 그처럼 당당하고 절의(節義)가 높은 고관이었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뛰어나 삼절로 불린 예술가이긴 했지만. 당대 지배 학문이던 유학자는 아니었다. 당대 정통 유림(儒林)·사림(士林)에서는 유학자가 고관이나 또는 시인이나 서화인보다 더 존숭 받았고, 공히 사표(師表)로까지 공인 받았다. 우암도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우암은 당연히 필사본이었겠지만, 천방이 집필한 『대학도』, 『경의설』, 『중용차의』, 100여 편의 시문 등의 자료를 다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천방에 대하여 놀라워했을 것이다. 첫 머리에 양현(兩賢)을 거론하고, 이어 오직 천방만을 다시 거명하며 “천방이 정학(正學)을 이었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더욱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천방은 우암의 전대 인물이었다. 또 천방이 고관이었거나 중앙무대에서 유명했던 학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암은 천방이 정학(正學), 즉 정통 유학을 이은 사람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두 사람이 비록 전후대의 인물이었지만, 서로 간에 학문적으로 ‘경의(敬意)’에 관한한 공감대를 공유한 사람이었다. 아마, 우암은 천방의 저작물들을 천방이야말로 정통 유학을 이은 진정한 도학자였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특히 반곡의 행장 등을 통해 그가 기우제 제관으로 분신도 마다하지 않았던, 죽음도 무릅쓰고 공(共)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했던, 천방의 참된 선비상과 군자상을 보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대 그 누구 못지않게 의(義)와 의리(義理) 사상에 경도되고 그 의리의 학문을 궁구했던 학자가 우암이었다. 그는 충(忠)과 의(義)를 인간의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였던 대석학이었다. 특히 그는, 의리(義理) 사상을 궁구하고 충과 의(義)를 인간의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였던 대석학이었다. 의리(義理) 사상의 대가였던 그는, 의(義) 실천의 대가들이었던 정몽주, 사육신, 조광조 등 수많은 충신, 열사, 의사 등의 충절과 의리를 기리는 사업에도 생을 바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주자의 성리학과 도학사상을 지극히 존숭하여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이 지속적인 상소를 통하여 국가의 현안문제와 선비들의 나아갈 방향과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던 것도 평생을 통해 경(敬)과 의리(義理)를 실천하였던 학문적인 토대 때문이었다. 송시열의 이러한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정신과 경의(敬義)의 실천적인 의리(義理) 정신은 이후 많은 선비들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걸쳐 의리(義理), 의(義)의 정신에 충실했던 우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직의(直義), 의(義)를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그런 송시열이 예양서원의 중수축문 성격의 추배 발문을 쓰면서 천방 유호인을 만난 것이었다. 거기에서 송시열은 천방의 치열한 유학에 대한 궁구(窮究)와 경의(敬意) 정신의 실천적인 삶을 보았을 것이고 그렇기에 단적으로 ‘천방이야말로 진정으로 정학(正學)을 이었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의(敬義), 의(義)에 관한한 천방과 우암이 일맥 상통하는 공유했던 정신이었던 것이다. 우암이 유일하게 천방을 정학(正學)을 이은 사람으로 평가했던 이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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