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7)
■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7)
  • 김선욱
  • 승인 2023.12.0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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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수 아들, 손(孫)들 … 절의(節義) 정신 실천

김선욱/ 본지 편집위원, 시인
▲마하수 5부자가 태어난 안양면 학송마을

 

 

 

 

 

 

 

 

 

 

▲마하수 장남 마성룡의 묘
▲마하수 장남 마성룡의 제각

 

 

 

 

 

 

 

 

 

 

 

▲마하수 차남 마위룡의 묘
▲마하수 차남 마위룡의 제각

 

 

 

 

 

 

 

 

 

 

 

<지난호에 이어서>

명량해전에 함께 참여했던 마하수 공의 아들들은 어찌 되었는가.

마하수 공의 기개(氣槪) 높은 절의(節義) 정신은 자손들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어, 장남‧차남‧삼남과 차남 마위룡의 아들 시웅 등이 모두 충절(忠節)을 실천하며 『호남절의록』에 등재되었다.

마하수의 장자(長子) 마성룡(馬成龍,1564∼1631)은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였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정유재란 때 명령해전에서 부친을 도와 아우 위룡(爲龍), 이룡(而龍) 등과 함께 향선 10여 척을 모아 충무공 후원군으로 명량 전투에 후원군으로 참전하였다. 이때 부친이 전사한 후, 성룡도 부상당한 상처를 싸매고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배안에 안치한 후 아우 위룡 등 4형제 모두 칼을 들고 적진을 돌격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공은 명량해전에서 귀향한 후 생(生)을 마칠 때까지 동남방(일본 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고 의복‧음식 등에서 일본의 물산(物産)이면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고 선친 시묘살이 3년간을 하루같이 묘소에 올라 슬프게 통곡함이 도에 지나쳐서 피눈물이 되었다고 한다.

마하수의 차자(次子) 마위룡(馬爲龍,1576~1638)도 효성이 지극하였지만 특히 학문에도 힘썼다. 임진란 때 선산부사 정경달의 군영으로 들어가 전략을 함께 세워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공은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다시 첨정(僉正)으로 승차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부친을 도와 형 성룡 등 4형제 모두 충무공 후원군으로 참여하였다. 부친이 전사한 후, 시신을 거두고 염을 한 후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충무공 진중으로 들어가 충무공 진중에서 함께 왜적과 싸우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에 귀향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위룡의 아들 시웅(時雄)은 마하수의 삼자(三子)요 위룡의 아우였던 이룡(而龍)과 함께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마하수의 삼남(三男) 마이룡(馬而龍,1581〜1653)은 광해군 4년(1612)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란(1636) 때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우후(虞侯)에 제수되어 수사(水使) 안몽윤(安夢尹)과 함께 관하의 전함(戰艦)으로 근왕(勤王)하러 출전하였다. 이때 조카인 시웅(時雄) 또한 따라와 근왕군 참모로서 함께 출전했으나 충청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무인년(戊寅年)에 해산하여 향촌으로 돌아온 후 벼슬길에 더는 나가지 않았다. 임진년(壬辰年)에 민정중(閔鼎重) 선생이 본도(전라도)에 암행어사로 와 공을 만난 후 공의 재능과 학문을 인정하여 공을 낙안군수(樂安郡守)에 제수였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마하수의 4남(四男) 마화룡(馬化龍,1587〜1664)은 4형제 중 가장 조용하게 생을 살다 간 분이다. 관직에만 충일했다고 전해졌다. 봉훈랑(奉訓郞)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을 지냈다.

마하수의 차남 마위용의 아들 마시웅(馬時雄,1551〜1674)은 어렸을 때부터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사(蔭仕)로 직장(直長)을 제수 받았다. 병자란(1636) 때 계부(季父) 우후공(虞侯公: 마이룡)을 따라 좌수영(左水營)의 관아에 있었다. 아버지 첨정공(僉正公)이 글을 보내 권하여 말하기를 “나는 늙었고 또한 병이 들었으니 너가 계부(季父)와 함께 국난(國難)에 나가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마시웅은 우후공과 함께 피난 중인 왕을 보필하러 갈 때 근왕공의 참모가 되었는데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돌아왔다. 후일 고령(高齡)이라 하여 직급이 승급되었다. ‘자식들에게’ 라는 훈계서(訓誡書)를 남겼는데 단지 숭정(崇禎) 때의 음직(蔭職) 자급(資級)만을 썼다고 한다. 시(詩)를 지었는데 “옆 사람들이여 삼품계(三品階)의 벼슬이 되었다고 축하하지 말라. 나는 바로 숭정(崇禎) 때의 직랑(直郞) 벼슬만을 받들 뿐이다 傍人莫賀階三品 我是崇禎奉直郞”라고 하였다.

이처럼 마하수 공의 절의 정신은 3대까지 전승되었고, 후손들의 이러한 절의(節義)의 실천으로 병자호란 등에 창의하거나 참전하여 『호남절의록』 등에 등재 되며 장흥마씨 가문의 위상 제고와 성세를 주도하였다.

다음은 마하수 공 4형제와 손(孫) 시웅에 관한 사적 등의 내용이다.

1) 마하수 장남 마성룡

-『호남절의록』 등에 등재

『호남절의록』과 마성룡

마성룡(馬成龍,1564∼1633) : 자(字)는 운거(雲擧). 본관은 장흥(長興). 주부(主簿) 하수(河秀)의 아들이다. 성격이 솔직 담백하며 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정유란(1597) 때 아버지 주부공(主簿公) 및 아우인 위룡(爲龍)과 함께 고을의 배 10여 척을 모아 이충무공을 후원하였다. 명량(鳴梁) 싸움에 주부공이 적에게 죽고 공도 또한 상처를 입었으나 상처를 싸매고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향선(鄕船)에 두고 아우와 함께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였으나 적은 이미 패주한 뒤였다. 얼마 후 상처가 도져 죽었다. [장흥(長興)]

馬成龍 字 雲擧 長興人 主簿 河秀 子性樸直事親色養丁 酉從 主簿 公與弟 爲龍 聚鄕船十餘隻爲 李忠武公 後援 鳴梁 之戰 主簿 公死於賊公又被槍裹瘡收父屍置 鄕船與弟手劍罙進賊已敗走未幾病瘡而卒 [長興 ]

ⓒ『호남절의록』, 권3 상, 임진의적, 이순신참좌제공사실, 馬成龍. 243쪽

『장흥지방의 국난극복사』와 마성룡

마성룡(馬成龍) : 자(字)는 운거(雲擧). 호는 죽창(竹窓)이여, 장흥인(長興人)으로 참판(參判) 마하수(馬河秀)의 아들(長男)이다.

공은 소박하고 정직하였으며, 항상 부드러운 표정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정유재란 때 부친 참판공을 도와 향선(饗船) 10여척을 모아 충무공의 후원군으로 명량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참판공이 전사하였고 공 역시 부상당한 몸으로 상처를 싸매고 참판공의 시체를 거두어 배안에 안치한 후 아우와 함께 칼을 들고 돌격해 적을 대파한 후 마침내 상처가 악화되어 순절하였다.

ⓒ『장흥지방의 국난극복사』, 이상구, 장흥문화원 1998, 231쪽

죽창공 마성룡의 연보

『장흥마씨대동보』 …부(父) 시묘 3년, 피눈물 뿌려

공은 명종 갑자(甲子) 1564년 5월 25일 주암촌(舟岩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충성과 절의(節義)에 불타고 불의(不義)를 보면 정의심(正義心)에 복받쳐 한탄하는 호걸(豪傑)이었다.

종사랑(從仕郎)을 지내고 향리에 머물다가 정유재란 때 부친과 사형제가 명랑전투의 충무공 후원군으로 참전하였다.

바야흐로 부친 죽천공이 적탄에 맞아 순절하니, 동생 위룡(爲龍)과 더불어 복수를 맹세하면서 만약 조급히 사망을 알리면 적이 기세를 돋구어 더욱 굳세게 날 띨 것이니 초상을 극비로 하자고 하여 시신을 향선(鄕船)에 모신 후 계속하여 적과 싸우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 드디어 부친의 사망에 통곡하며 시신을 모시고 고향에 안장하였다.

이후 생(生)을 마칠 때까지 동남방(일본 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 또 의복이며 음식 등 왜놈의 물건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3년간을 하루같이 묘소에 올라 슬프게 통곡함이 도에 지나쳐서 피눈물이 되었다고 한다.

슬프다. 공은 이같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 찬양(讚揚)을 받으니 신하와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것이다. 신미(辛未) 1631년 8월 21일 별세하다. 사적(事蹟)이 『문헌절의제록(文獻節義諸錄)』에 있으며, 묘비명(廟碑銘)은 최영조(崔永祚)가 지었다.

배(配)는 유인(孺人) 보성선씨(寶城宣氏)로서 부(父)는 증참판(贈參判) 봉장(鳳章)이요 조(祖)는 봉사(奉事) 대윤(大倫)이고 증조(曾祖)는 생원(生員) 찬우(贊遇)이며 안렴사(按廉使) 윤지(允祉)의 후예이다. 외조(外祖)는 평사(評事) 기봉(岐峯) 공 백광홍(白光弘)이다.

병인(丙寅) 1566년 11월 25일에 출생하여 계유(癸酉) 1633년 4월 2일에 별세하다. 묘는 고(考) 묘소(墓所) 북측에 쌍비(雙非)로 묘비가 있다.

-ⓒ『장흥마씨대동보』(坤), 33-34쪽.

2) 마하수 차남 마위룡

명량해전 참가 … 병자호란에도 참여

마위룡, 『호남절의록』 등재

마위룡(馬爲龍,1576〜1638) : 자(字)는 운보(雲甫). 호(號)는 송파(松坡). 주부(主簿) 하수(河秀)의 둘째 아들이다. 효에 독실하였고 학문에 힘썼다. 임진란 때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의 의진(義陣)에 나아가 군무에 관해 많은 보좌를 하였고 공로가 매우 컸다. 제용판관(濟用判官)에 제수 되었고 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다.

정유란(1597) 때 아버지 주부공 및 형 성룡(成龍)과 더불어 충무공의 명량해전에 참여하였다. 아버지가 적에게 죽자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후 후일 상복을 입고 다시 충무공의 진지에 나아가 끝까지 힘써 싸웠다. 충무공이 전몰(戰沒)함에 마침내 돌아와 여묘(廬墓)하면서 상제를 마쳤다.

*공의 아들 시웅(時雄)과 아우 이룡(而龍)은 병자란(1636) 때 의병을 일으켰다.

馬爲龍 : 字 雲甫 號 松坡 長興 人 主簿 河秀 次子篤孝力學 壬辰赴丁盤谷景達義陣贊劃戎謨多有殊績 除濟用 判官陞僉正 丁酉從 主簿 公與兄 成龍 同赴李忠武公 鳴梁陣 主簿 公死於賊收父屍旣殯後以墨縗更赴 李公陣終始力戰及忠武公戰沒遂還廬墓追服 [주:子 時雄 弟而龍 丙子起義 [長興]

ⓒ『호남절의록』, 권3상, 임진의적, 이순신참좌제공사실, 마위룡. 243쪽

마위룡, 『국난극복사』에 등재

마위룡(馬爲龍, 1576∼1638) : 자는 운보(雲甫)요 호는 송파(松坡)다. 장흥인(長興人)이며 참판(參判) 마하수(馬河秀)의 차남이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의 군영으로 들어가 전략을 함께 세워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공은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다시 첨정(僉正)으로 승차되었다.

정유재란 때 부친 참판공을 도와 형 성룡(成龍)과 함께 충무공(忠武公)의 막하로 들어가 노량해전에 참가하였다. 참판공이 전사함에 따라 시신을 거두고 염을 한 후 상복을 입고 다시 충무공 진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시종 힘껏 사우다 충무공이 전사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하며 상복을 입었다. 공의 아들 시웅(時雄)과 아우 이룡(而龍)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장흥지방의 국난극복사』, 이상구, 장흥문화원, 1998, 231쪽

송파공 마위룡의 행록

-『장흥마씨대동보』(坤)

공은 선조 병자(丙子) 1576년 9월 8일 출생하여 임진란에 선산의 정경달(丁景達) 군수의 막하로 들어가 싸운 전공으로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에 특별 임용되고 첨정(僉正)으로 지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명량전투에서 적을 토벌했다.

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에 나가 싸우고 경오(庚午) 가도(假島) 싸움에서는 정충신(鄭忠信) 원수의 부름을 받아 싸웠다.

또 정축년(1637년) 남한산성 행차를 호종(扈從)하고 주야로 성을 수비하는데 대한(大寒) 추위에 손가락이 얼어 갈라지니 임금이 이를 보고 토시를 하사하고 군기사(軍器寺) 첨정(僉正)에 임용하였다.

이후 후금(後金)과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사직하고 향리 동복(同福) 산골에 종적을 감추고 살면서 스스로 호(號)를 송파(松坡)라 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무인(戊寅) 1638년 8월 29일에 별세하다. 향년 62세다.

사적(事蹟)이 『문헌절의제록(文獻節義諸錄)』에 있다. 위백규(魏伯珪)가 행장을 찬(撰)하고 우의정(右議政) 정만석(鄭晩錫)이 묘비명을 지었다.

배는 영인(令人) 초계변씨(草溪卞氏)로 부(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홍원(弘源)이고, 증조는 도사(都事) 증(贈) 이조참의(吏曹參議) 희(喜)의 손이며, 외조(外祖)는 감찰(監察) 칠원윤씨(漆原尹氏) 윤은우(尹殷佑)이다.

공의 묘는 부친 묘 우측 곤좌(坤坐)이며 묘비가 있다. 학송리 주저등(舟底嶝)에 제각(祭閣) 승유재(承裕齋)가 있다.

ⓒ『장흥마씨대동보』(곤(坤), 34-35쪽.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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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정중(閔鼎重,1628~1692) : 호는 노봉(老奉). 조선 효종~숙종 초반 시기의 학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형이었다. 1649(인조 27) 정시문과에 장원, 호남어사(湖南御史)를 지낸 뒤 대사헌을 거쳐 이조·공조·호조·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75년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으로서 장흥부(長興府)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 풀려나 좌의정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장흥 연곡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2)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1542~1602) : 선조 3(1570) 대과에 급제한 문관이다. 6품 가평현감과 정5품 형조정랑에 머물던 그는 15916월 종3품 선산도호부사에 임명됐다.

3) 영인(令人) : 존건조에 정4, 4품 문무관 아내의 봉작.

4) 윤은우(尹殷佑,?1594) : () : 자는 운방(雲方) () 퇴와(退窩), 명종 때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여주목사겸 진관병마절도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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