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8)
■장흥을 다시 읽는다(3) - 정유년 장흥의 영웅 마하수(8)
  • 김선욱
  • 승인 2023.12.1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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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수 삼남(三男) 이룡(而龍)‧손(孫) 시웅(時雄)도 … 절의(節義) 정신 실천

김선욱/ 본지 편집위원, 시인

 

 

 

 

 

 

 

 

▲3남 마이룡의 제실
▲3남 마이룡의 산소

 

 

 

 

 

 

 

 

 

▲4남 마화룡의 제실
▲4남 마화룡의 산소

 

 

 

 

 

 

 

 

 

 

 <지난 호에 이어서>

3) 마하수 3남 마이룡(馬而龍)

『호남절의록』 등재 …병자호란에 근왕하러 출정

마이룡(馬而龍) : 자(字)는 운경(雲卿). 본관은 장흥(長興). 충정공(忠貞公) 천목(天牧)의 후

손이고 정유재란(1597) 때 순절한 주부(主簿) 하수(河秀)의 셋째 아들이다. 학식이 크고 원대하였다. 광해군 4년(1612)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우후(虞侯)에 제수되어 수사(水使) 안몽윤(安夢尹)과 함께 관하의 전함(戰艦)을 내어 근왕(勤王)하러 가고자 하였다. 조카인 시웅(時雄) 또한 따라와 함께 출발했으나,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후에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재주가 총명하다고 천거하여 낙안 군수(樂安郡守)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장흥(長興)]

ⓒ『호남절의록』(김동수 교감·역주)권5 상, 병자의적, 창의제공사실, 399쪽.

우후공(虞候公) 이룡의 행장

-전 병조참판 민창혁 찬

공의 성은 마씨요 휘는 이룡(而龍)이다. 자는 운경(雲卿)이다. 윗대 조상 휘 려(黎)는 백제 온조왕의 개국원훈으로 마사량현을 수봉받아 후손이 이곳에서 세거하였다. 고려조에 이름난 문벌로 대를 이어왔고 조선조 태종 조에 좌명공신으로 휘 천목(天牧) 장흥부원군 충정공은 공의 8세조이다.

고조는 봉직랑의 이건(以乾), 증조는 봉사의 팔준(八駿), 조부는 어모장군의 인서(麟瑞), 선친은 중후대부(선공감 주부)의 하수(河秀)다.

정유년에 왜군이 몰려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니 공은 충무공 후원군으로 목숨을 바치기로 하고 명량 해전에서 공을 세운 사실은 국사에 소상히 실려 있다. 지금도 (후인들이) 그 풍채를 사모하여 우러러 본다.

공의 나이 17세에 명량 해전에서 부친이 순절한 것을 보고, 분개하여 옷깃을 여미며 복수를 맹세하며 말하기를, “남자가 기왕에 군무에 종사하려면 평소에 좋은 도리(방도)를 연구하지 않는다면 갑작스러운 변란에 어찌 대응할 것 것이냐? 정세를 잘 살피고 적을 잘 제압하려면 병법에 관한 책과 옛 명장들의 전법을 꿰뚫고 넉넉한 채비를 사전에 갖추어 한다.”고 말하고, 모래 위에 팔진도의 육화(六花 : 진 치는 법) 술책을 쓰는 법 등을 상세히 그려 익혔다. 공은 또 우리나라 천문지리도(天文地理圖)를 그려 놓고 담론하여 지형지세와 주요 요새 등을 잘 파악하고 숙지하여 유사시에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妣)는 함풍 노씨(魯氏)다. 신사년(1581년)에 장흥 안양방 주암촌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사기(史記)를 한 번 읽으면 곧 외우니 사람들이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가 컸다.

임자년(1612년)에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고 무진년(1628년)에 녹도(鹿島)의 진(鎭)을 맡고 나서 탄식하기를 “나의 포부는 큰데 맡은 판국이 작아 마음에 차지 않는구나.” 하였다.

병자년에 전라좌수영 수군 우후(優厚)로 승진한 뒤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 관하의 전선에 분발을 재촉하고 수사 안몽윤(安夢尹)의 군막에 조카 시웅(時雄)을 참모로 합세하게 하였다.

공은 부지런히 관군을 독려하여 충청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청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수치스러운 소식을 듣고 관군을 흩어지게 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어 무인년(1638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명리(名利)와 연을 끊었다.

임진년(1652년)에 노봉 민정중(閔鼎重) 공이 “마공은 호남의 제일가는 재사(才士)”라고 간언하여 낙안 군수(樂安郡守)를 제수하였으나 질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 다른 기록에는, “1652년에 노봉老奉 민정중閔鼎重 선생이 본도에 암행어사로 와서 공公을 재才와 지智로 계천啓薦-가르치고 천거하다-하여 낙안 군수樂安郡守에 제수였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장흥마씨대동보』坤, 36쪽)

다음 해인 계사년(1653년) 1월 4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73세였다. 배필은 철원(鐵原) 윤씨(尹氏)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이 시한( 時翰)이고, 차남이 시명(時鳴)이다.

문충공 자손으로 우후공의 6세 방손 심(沈)이 와서, 내게 행장을 청하였다. 내가 먼저부터 늘 공의 공적과 원수를 갚지 못한 사유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공이 뜻을 폈다면 공의 부친 명량전 절의(節義)가 더욱 빛날 것이었다. 하지만 항복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돌아와 그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분통해 하지 않았으리.

이에 (행장을 써 주기를 청한 것을) 사양치 않고 행장을 지어 보낸다.

순조(純祖) 정묘(丁卯) 1807년 6월 28일

가선대부 전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영흥 민창혁 삼가 글을 짓다.

公馬氏而龍其諱字雲卿有遠祖諱租黎以溫以溫祚王十濟元勳食封馬斯良縣子孫仍居焉縣今屬長興府及麗朝代有名閣至我 太宗朝有諱天牧以佐命勳受爵府院君謚忠靖卽公之八世祖 高祖奉直郞 諱以乾曾祖奉事諱八駿 祖禦侮將軍諱麟瑞 考主簿諱河秀値 丁酉倭寇 充斥以李忠武舜臣後援立慬于 鳴梁昭載國乘至今想望其風采公時年十七慟府君畢命於兵間慨然有袵革之志嘗對人曰男兒旣 從事於武而不素有講究倉卒應變其何以審勢制敵平於是武經諸書及古名將陣法圖說無不通貫賅洽恰每於沙上作八陣 六花縱橫合變之狀又 詳於蓋天分野圖及我東地誌朝夕寓目形諸談論西北沿鎭 東南海檄之山川險夷關坊墟實若親履而實踐焉 妣咸豐魯氏生員希益女以 萬歷 辛巳生公于 長興安良之舟巖村 公自幼受經史一遍卽誦 人咸以遠大期之遂擢 壬子武科循資例遷而 戊辰出爲鹿島鎭菅嘆曰 志大局褊何足有爲 丙子官全羅左水虞候聞車駕播越督發管下戰艘肄水使安公夢尹幕以子時雄爲 參謀以倡勤王師行至忠淸界聞城下之恥仍散還本鎭 戊寅解歸田廬絶意名利 壬辰老峯閔文忠公 持斧湖南以才堪禦牧薦公于朝尋除樂安而病未就以翌年癸姿巳 正月四日考終 享年 七十三 配判官漆原尹怒女擧二男二女男長曰 時翰以孝行屢登府剡次曰時鳴長女李溶次女丁巽

就主簿公兆右坤坐原葬焉尹氏祔左以余文忠公孫今其 六世傍孫沈來請文以記之余實有感於先故而若公芝世德之偉熱立志之忼慨恨未同時而獲覩其容儀如使勤王之師直達圍城以昌矢石則府君

鳴梁之節亦當匹美於前後而惜平和議成而中道班師未展其素蘊 余所曠感豈但以先故而己哉玆不論猥陋略爲之點綴爾 崇禎三丁卯六月二十八日 ⓒ『장흥마씨대동보』(乾), 375쪽.

4) 마하수 4남 마화룡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 역임하다

자는 운현(雲顯), 호는 죽포(竹圃)다. 선조 정해(丁亥) 1587년 10월 7일생으로 봉훈랑(奉訓郞)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을 지내고 갑진(甲辰) 1664년 10월17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77세.(평생을 조용하게, 관직에만 성실히 복무하며 살았다는 후문이다.)

배(配)는 공인(恭人) 보성 선씨(寶城宣氏)로 봉사(奉事) 세구(世耈)요, 조(祖)는 증(贈) 참판(參判) 봉문(鳳聞)이고 증조(曾祖)는 봉사(奉事) 대윤(大倫)이다. 전라도 관찰사 겸 안렴사(按廉使) 윤지(允祉)의 후예이다.

외조는 김해인 김경추(金景秋)로 호가 송정(松亭)이다.

운현공의 묘는 안하(安下) 교동 해자룡(亥子龍) 자좌(子坐)에 상하봉(上下封)이다.

-ⓒ『장흥마씨대동보』(坤), 36쪽.

5) 마하수 손(孫) 시웅

병자란, 근왕하기 위해 출정

마시웅(馬時雄,1551〜1674) : 자(字)는 여헌(汝獻). 호(號)는 국포(菊圃). 본관은 장흥(長興). 첨정(僉正) 위룡(爲龍)의 아들이고 우후(虞侯) 이룡(而龍)의 조카이다. (주촌공 마하수의 孫이다).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다. 음사(蔭仕)로 직장(直長)을 제수 받았다.

병자란(1636) 때 계부(季父) 우후공(虞侯公 : 마이룡)을 따라 좌수영(左水營)의 관아에 있었다. 아버지 첨정공(僉正公)이 글을 보내 권하여 말하기를 “나는 늙었고 또한 병이 들었으니 너는 계부(季父)와 함께 국난(國難)에 나가라.”고 하였다.

우후공(虞侯公)이 근왕하러 가고자 할 때 공은 참모가 되었는데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돌아왔다. 후일 고령(高齡)이라 하여 직급이 승급되었다. ‘자식들에게’ 라는 훈계서(訓誡書)를 남겼는데 단지 숭정(崇禎) 때의 음직(蔭職) 자급(資級)만을 썼다.

시(詩)를 지었는데 “옆 사람들이여 삼품계(三品階)의 벼슬 되었다고 축하하지 말라. 나는 바로 숭정(崇禎) 때의 직랑(直郞) 벼슬만을 받들 뿐이네(傍人莫賀階三品 我是崇禎奉直郞).”라고 하였다. [장흥(長興)] ⓒ『호남절의록』((김동수 교감·역주)권5 상, 병자의적, 399쪽

국포공 시웅의 행장

금성인 임승한(林升漢) 찬(撰)

(인적사항, 原文으로 대신)

…비(妣)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공을 신묘년(1591년)에 12월 25일 안양방 주암촌에서 낳으니, 어려서부터 효도하며 도량이 크고 공명정대하며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로 남에게 매이지 않는 큰 포부를 가졌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시문(詩文)을 두루 섭렵하였다.

벼슬이 (음직으로) 봉직랑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부친 송파공이 남한산성에서 호종(扈從)할 때 공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동단결하여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하라.”고 권면하였다.

이후 숙부 우후공(우후공(虞侯公 : 마이룡)과 함께, 전장에 나가 싸우다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후 좌수사 안몽윤(安夢尹)과 더불어 대책을 세우고 관하에 전장에 나갈 것을 명하여 전함 을 거느리고 충청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치욕적인 항복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손수 국화를 심고 호를 ‘국포산인(菊圃散人’이라고 하였다.

평상시 맑은 절개를 가지고 덕(德)으로 사람들을 교화하며, 마음이 고요하고 물욕(物慾)이 없었다. 문집(文集)을 읽다가 홀로 의분이 북받쳐 탄식하니, 충절의 본뜻이 드러나곤 하였다.

안몽윤(安夢尹) 수사에게 편지를 써 전하였는데, “이리저리 꾀를 내어 다시 한번 나아가고자 하니 저(宗大夫)의 맹세는 이미 때를 잃었으니 마땅히 강화(講和)를 받들고 동의하며, 기꺼이 참여하되, 비록 군사를 파한 뒤라 하더라도 임금을 위하여 힘쓰는 마음과 적개심이 큽니다.”하였다.

공이 책을 펴고 읽으니 주옥같은 공의 말씀이 가히 도움이 되고, 죽음으로써 조정과 이별하게되니, 그가 쓴 글(詩文)이 애석할 따름이다.

나이 83세에 수직(壽職)으로 벼슬이 정삼품에 올랐다. 자손에게 유훈하기를 “수직(壽職)은 쓰지 말라”하셨다.

(임자년壬子年에 수직으로 정삼품을 받았을 때 읊은 시詩가 있다. 그 시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여 삼품계三品階 벼슬이 되었다고 축하하지 말라. 나는 바로 숭정崇禎 때의 직랑直郞 벼슬만을 받들 뿐이네 傍人莫賀階三品 我是崇禎奉直郞” 이다. 유고遺稿에 ‘계물서戒勿書’와 ‘수추서壽秋書’도 있다. 『장흥마씨대동보』坤, 36쪽)

다음 해 1월 29일에 별세하다.

배필은 영광 정씨(靈光丁氏)로 사남(四男)을 낳으니, 종훈(種勳), 승훈(承勳), 세훈(世勳), 중훈(重勳)이다.

슬프다. 공이 집에 있을 때의 지조와 행실 그리고 난리 때 충성심이 이와 같거늘, 남달리 뛰어난 사적(事績)의 공훈이 없어질까 안타까워하며, 대강의 줄거리를 이와 같이 쓰고 뒤에 입언자의 뜻을 기다린다.

公諱時雄字汝獻馬氏遠祖諱黎以溫祚王十濟元勳食采馬斯良縣及高麗改爲會寧而今屬長興子孫

仍家焉入我 太宗朝有爲天牧以佐命勳受爵長興府院君謚忠靖卽公之九世祖也冠冕襲世有聞人曾祖諱麟瑞 萬層乙未島夷陸梁時以前司直爲把禦因沒于海祖諱河秀繕工主簿 丁酉之變與 李忠武公舜臣糾合義旆轉遏凶鈴至鳴梁之役遂殉焉考諱爲龍 丁酉敵愾不顧墨衰赴戰 丙子扈駕南漢以軍器寺僉正因退臥田廬號松坡 妣卞氏通政弘源女籍草溪公以 萬曆辛卯十二月二十五日生 于長興安良坊之舟岩村自髫齡性孝尤多氣節器宇磊落夙抱不羈涉經史工詞律蔭奉直郞 崇禎丙子 松坡公南漢扈

駕所貽胎書于公勉以同 赴勤王 公遂與虞侯公諱而龍卽決裏革之計成虞侯公卽公仲父也卽與左水伯安公夢尹圖畵赴勤發官下戰艦數百艘行至忠淸界聞城下之盟因還鄕里不樂於世手種芳菊自號菊圃散人平居每取陶靖節胡澹菴集讀之其孤 憤忼慨之意此可見也其上 安水相書曰 更慾一進於運籌當奉講袒豫州中流之誓宗大夫過河之策則雖於罷兵之後而其勤王之餘愾不以處葬而有異也其吟詠若于篇咳唾珠玉可以協郊廟之鉉而惜其爲林下林枯槀之文而止耳年八十三以壽秩至三品遺戒子孫勿書言壽秩特書 崇禎蔭資有詩云 翌年正月二十九日終 于正寢卽顯廟壬子也葬于安良坊月溪子坐 配丁氏贈掌樂正昌悅女籍靈光墓祔左擧 四男長鍾勳受學閔先生老峯 門有聞譽次童勳承勳世勳鳴呼公之居家志行昌難忠羲如是其卓異而隉沒是瞿玆叙其梗槩以俟後來立言者志之 崇禎 四 戊辰流火月上澣 ⓒ『장흥마씨대동보』(乾), 377쪽.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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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봉 민정중(閔鼎重,1628~1692)은 조선 효종~숙종 초반 시기의 학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형이었다. 1649(인조 27) 정시문과에 장원, 호남어사(湖南御史)를 지낸 뒤 대사헌을 거쳐 이조 ·공조 ·호조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675년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으로서 장흥부(長興府)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 풀려나 좌의정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장흥 연곡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2) 해마다 정월(正月)에 나이 80세 이상(以上)의 관원(官員) 90세 이상(以上)의 백성(百姓)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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